박정희 사후 권력 잡은 신군부, 검열 고삐 쥐고선
"학생 시위 지지 불가" 지침 내려 보도 좌지우지
"검열 철폐" 기자들 저항하자 다음 날 계엄 확대
'내란 완성' 위해 언론계에 체포·고문·해직 칼바람
편집자주
'모든 언론과 출판은 계엄사의 통제를 받는다.'지난해 12월 3일 밤, 윤석열 당시 대통령이 선포한 비상계엄 포고령 제3항은 권력이 언론을 암전한 45여년 전의 악몽을 떠오르게 했다. 역사는 돌고 돌며,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격언을 상기시킨다. 독재 권력이 등장할 때, 가장 먼저 장악하려는 것이 언론이며 언론인은 독재자의 탄압과 가해를 가장 혹독히 겪는 직업군이다.
한국일보는 12·3 불법 비상계엄 1주년을 맞아 1980년 전후 권력이 지운 352개의 기사를 발굴해 뒤늦게 독자들께 배달하면서, 비록 기사를 신문에 싣지는 못했지만 끝까지 취재하고 처절하게 맞섰던 당시 본보 기자들의 증언을 모으고 기록했다.
순박하지만 동시에 강골이던 청년 김주언은 7년차 한국일보 기자였던 1986년, 전두환 정권 문화공보부가 언론사들에 하달하던 보도지침 584건(85년 10월~86년 8월)을 편집국에서 빼내 민주언론운동협의회(민언협)에 전달한다. 1986년 9월 민언협은 시사월간지 '말' 특집호인 '보도지침, 권력과 언론의 음모'를 통해 언론 통제 실상을 폭로했고, 김주언 등은 옥고를 치러야 했다. 왼쪽은 제5공화국이 막을 내린 1988년 12월, 국회 언론청문회에서 김 전 기자가 '말' 특집호를 들고 증언하는 모습. 오른쪽은 이제 일흔을 넘긴 그가 지난달 20일 서울 중구 한국일보사에서 인터뷰를 하며 '말'지를 들고 있는 모습. 한국일보 자료사진·민경석 기자 |
1980년 봄, 담배 연기가 자욱한 서울시청 2층 강당. 때아닌 피아노 선율이 들려오자 김주언(당시 26세)의 마음은 복잡해졌다. 평화롭고 따뜻한 느낌의 클래식 곡과 자신의 처지가 영 딴판이었던 탓이다. 한쪽 구석을 보니 중년 남성이 검정 피아노 앞에 앉아 건반을 누르고 있었다.(①) 멍하니 듣다가 벽에 걸린 녹색 칠판의 문구를 보고 현실로 돌아왔다.
1980년 5월 14일자 검열 지침. 그래픽=이지원 기자 |
그래픽=송정근 기자 |
신입 기자인 주언은 '검열 심부름'을 온 참이었다. 선배들이 쓴 기사를 다음 날 조간신문에 실어도 될지 군인들에게 허락받는 절차였다. 자존심이 여간 상하는 일이 아니었기에 선배들 대신에, 갓 입사한 주언에게 떠맡겨진 잡무였다. 그가 꿈꾸던 기자 생활과 거리가 멀었다. 직전 해 박정희 전 대통령의 유신 독재가 끝난 터라, 이제 민주화를 위해 기자로서 할 일이 많을 줄로만 알았는데···.
선배들은 주언과 동기들이 언론 자유를 만끽할 시기에 입사했다며 "운 좋은 놈들"이라고 덕담을 했지만, 현실은 전혀 달랐다.
전두환 정권의 보도지침을 폭로했던 김주언 전 한국일보 기자가 지난달 20일 서울 중구 한국일보사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민경석 기자 |
'서울의 봄' 막으려 한 군부의 공장식 검열
역사는 그 해 초를 '서울의 봄'으로 칭했지만 기자들에겐 겨울이었다. 군부는 대통령이 시해당한 10·26 사건 이후 비상계엄령을 선포하며 계엄사에 보도검열단을 꾸렸다. 주로 군인들로 구성된 이 조직은 매일 신문과 방송, 통신 기사는 물론 대학 학보까지 샅샅이 확인한 뒤 보도 여부를 정해줬다. 특히 12·12 군사반란이 성공한 후 신군부는 더 노골적으로 언론의 목을 졸랐다. '사회 안정' 명분을 내세웠지만 진짜 의도는 따로 있었다. 입맛에 맞지 않는 기사는 모조리 지워버렸다.
검열단이 들어선 서울시청에서는 매일 공장식 검열이 자행됐다. 무장한 경비병이 지키는 입구를 통과해 한 층 올라가면 마루판이 깔린 널찍한 강당이 나온다. 다이아몬드 모양의 계급장이 박힌 군복을 입은 초급 장교들이 책상 앞에 앉아있었다. 이들은 또래인 젊은 기자가 들고 온 다음 날 자 아침 신문의 초판 대장(정식 인쇄 전 간단하게 찍은 지면)을 꼼꼼히 살펴본 뒤 상부 지침에 따라 '문제 기사'를 솎아냈다. 검열은 아무 표정 변화도 없이 사무적으로 진행됐다. 역사를 도려내는 건 무척 간단한 일이었다.
전두환 정권 시절인 1980년대 한국일보 편집국(기자들이 일하는 사무실) 칠판에 문화공보부 홍보정책실에서 하달한 보도검열 지침이 적혀 있다. '경제 불안 너무 조지지(비판하지) 말 것' 등의 내용이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
그래픽=박종범 기자 |
비상계엄 시기였던 1980년 5월 15일, 서울역 광장과 고가도로(현 서울로7017) 주변을 10만여 명의 대학생들과 시민들이 에워싸고 있는 모습. 13일 밤과 14일에 이어 이날 사흘째 계속된 시위로 민주화 열망은 절정에 이르렀다. 학생과 시민들은 '계엄령 해제'와 '유신헌법 개정'을 외치며 가두시위를 이어갔다. 그러나 압박감을 느낀 신군부는 이틀 뒤인 5월 17일 자정을 기해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고, 무장한 계엄군을 동원해 학생, 정치인, 재야인사, 언론인 등을 불법체포한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
난처한 건 현장에 선 기자들이었다. 특히 뜨겁게 불붙었던 대학가 시위를 취재한 젊은 기자들은 매일 언론을 향한 분노와 마주했다. "비상계엄 철폐"를 외치는 학생들은 "어용 언론"이라 부르며 분을 삭이지 못했다. 그럴 만했다. 주언의 동기인 정재용(당시 28세)이 최루탄 연기를 마시면서 종일 시위를 취재해도 기사는 한 줄 나가는 게 전부였다. '○○경찰서는 ○○○를 집시법(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로 구속했다.' 정작 학생들이 뭘 바라는지는 신문에 담지 못했다.
회사 안 풍경도 암울했다. 편집국(기자들이 일하는 사무실) 칠판에도 △가(可·보도 가능) △불가(不可) 항목이 그날그날 세세히 적혔다. 기자들은 '오늘의 말씀'이라 부르며 자조했다. 민주화를 요구하는 학생과 시민 10만여 명이 모인 5·15 서울역 시위(②) 이튿날 검열 지침은 끔찍했다.
그래픽=송정근 기자 |
혈기왕성한 기자들도 잠자코 있지만은 않았다. 한국일보 기자 신연숙(당시 26세)은 동료 기자가 잔뜩 화가 나 씩씩거리며 데스크(편집권을 가진 간부급 기자)의 책상을 뒤엎는 장면을 몇 번 목격했다. "왜 기사 잘랐느냐"거나 "검열당해도 일단 써봐야 하지 않느냐"는 항의였다.
그러나 달라지지 않는 현실 앞에 무력감만 자랐다. 검열의 칼바람이 불자 알아서 눕는 데스크도 점차 늘었다. 신군부는 편집국장, 정치·사회부장 등 주요 보직자를 개별 접촉해 포섭했다. 'K-공작계획'이었다. 언론을 회유, 통제해 우호적 여론을 조성함으로써 전두환을 'King(왕·대통령)'으로 추대한다는 뜻이었다.
권력을 탐하는 이들의 가위질은 집요했다. 기사뿐 아니라 칼럼과 만평, TV 프로그램 편성표까지 지웠다. 연숙은 가장 황당했던 검열을 떠올렸다.
"TV 편성표 아래 프로그램 내용을 안내하는 짧은 문구를 넣었어요. 음악 방송을 소개하며 '가수 심수봉 출연'(③)이라고 썼는데···, 그조차 불편했는지 삭제됐죠."
그래픽=송정근 기자 |
컴컴한 현실을 은유적으로 꼬집은 시사 만평도 군부에는 눈엣가시였다. 고집스러운 성격의 화백 안의섭(당시 56세)이 연재한 '두꺼비'가 골치를 썩였다. 26년 차 만평가였던 의섭은 집권 야욕을 노골화하던 신군부를 비판하는 네 컷 만화를 자주 그렸다. 반골 기질이 강했던 그는 '검열단에서 만평이 짤렸으니 다시 그려라'는 편집국 간부 요청을 듣고도 퇴근하기 일쑤였다. 순종하느니 아예 내지 않겠다는 항의였다. 만평이 잘려 나간 자리는 다른 기사나 광고로 급히 메워졌다.
침묵당한 광주의 진실과 분노한 기자들
민주화에 대한 기대감이 부풀던 1980년 1월 12일, 한국일보 편집국에서 기자들이 민주 자유 언론을 위한 시국선언을 하고 있다. 그러나 각 언론사의 젊은 기자들을 주축으로 벌어지던 검열 철폐와 자유언론 실천 요구도 모조리 '검열·삭제'돼 외부로 소식이 알려질 수 없었다. 저항을 해도 외부로 알려지거나 기록되지 못하니 '없었던 저항'이 된 셈이었다. 한국일보 50년사 |
5월 초, 민주화를 바라는 시위 열기가 달아오르자 편집국도 들썩였다. 8개월째 이어진 보도 검열. 임계점을 넘자 기자들이 '반격'에 나선 것이다. D-데이는 5월 9일이었다. 한국일보 기자 150여 명은 서울 종로구 중학동 사옥 12층 강당에 모여 구호를 외쳤다.
"계엄 철폐! 언론 사전 검열 폐지! 해직 기자 복직!"
사흘 뒤엔 한국일보와 자매지 기자 200여 명이 모여 총회를 열고 선언문을 냈다. 이들은 "비상계엄과 보도 검열은 언론의 본질적 사명을 부정했다"고 비판했다.
신군부는 거센 반발 앞에 폭거의 수위를 도리어 높였다. 대학생 시위가 격렬해지자 '사회 혼란에 따른 북한의 남침 가능성이 있다'며 비상계엄을 제주도를 포함한 전국으로 확대한 것이다. 5·17 내란이었다. 국회를 폐쇄하고 학생과 정치인, 재야인사들을 무더기로 잡아들였다. 말을 듣지 않던 기자들도 타깃이 됐다. 기자협회 간부를 맡은 한국일보 기자 노향기(부회장·당시 38세)와 박정삼(감사·당시 36세)이 체포 명단에 들었다.
기자들은 더 끓어올랐다. 특히 사회부와 사진부 기자들이 광주의 참상(④)을 현장에서 취재했음에도 이 내용 대신에 신문에는 '광주 소요 사태'라는 제목의 기사가 대문짝만하게 실리자 흥분이 고조됐다. 젊은 기자 30~40여 명은 일과 후 편집국 밖 복도에 모여 "진실 보도!"라고 소리쳤다. 편집국에 상주하면서 '상왕' 노릇을 했던 정보 기관원과 경영진을 향한 외침이었다. 기자 몇몇이 신문 제작을 거부하자 편집국 간부들은 통신사 뉴스를 얼기설기 엮어 겨우 신문을 찍어냈다.
농성은 끝내 목표를 이루지는 못했다. 5월 27일 새벽, 계엄군이 전남도청의 시민군을 무자비하게 진압하면서 광주의 봄은 짓밟혔고 편집국 농성도 약 열흘 만에 막을 내렸다.
그래픽=송정근 기자 |
신군부의 언론 통제, 보도 검열에 저항하는 움직임 선봉에 섰던 노향기 전 한국일보 기자(1980년 당시 기자협회 부회장)는 여든이 넘는 현재까지 고문으로 인한 후유증에 시달린다. 노 전 기자는 남영동 얘기는 하기도 싫다. 정말 고통이 심했다며 치를 떨었다. 노 전 기자를 비롯 언론검열 거부 운동을 주도했던 기자협회 간부들은 1980년 5월 17일 비상계엄 전국 확대와 함께 불법체포돼 고문당하고, 포고령 위반이라는 누명을 쓰고 옥고를 치러야 했다. 자연히 해직당했던 노 전 기자는 1989년에야 복직할 수 있었다. 왼쪽은 그의 입사연도인 1970년경 촬영한 것으로 추정되는 기자증 증명사진. 오른쪽은 지난달 21일 본보와 인터뷰하며 포즈를 취하는 모습. 민경석 기자 |
한편 수배령이 떨어진 향기는 초교 동창의 여동생 집에서 은신 중이었다. '체포 명단'에 오른 17일 밤을 떠올리면 아찔했다. 마침 그날 야근 당직이라 사무실에 있는데, 옆자리 김해도(당시 42세) 사회부장이 "오늘 밤 신군부가 계엄을 확대하면서 대학생들을 덮친다는데... 기자협회도?"라며 혼잣말인 양 언질을 줬다. 집에 전화를 하니 "여보, 집 뒤편에 웬 사내들이 와있어요"라는 것.
그날로 40여 일의 도망자 생활이 시작됐다. 젊은 부부와 애 둘이 사는 작은 단칸방에 짐덩이마냥 얹혀지내는 것도 곤욕이지만, 사촌 동생이 자신 때문에 남영동 대공분실에 끌려갔다는 이야기를 듣자 더는 버틸 수 없었다. 서울 성북경찰서를 제 발로 찾아간 그는 남영동에 끌려가 모진 고문을 당했다. 그곳에는 덩치가 산만한 사내가 있었는데 '고문기술자' 이근안이었다. 향기는 악몽만 같던 기억을 간신히 되살렸다.
노향기 전 한국일보 기자가 서울 중구 한국일보사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민경석 기자 |
"물고문은 시작에 불과해. 칠성판(고문대)에 묶어 전기고문하고 고춧가루를 탄 물을 얼굴에 붓고. 고통은 말로 못 할 정도야. 상상을 초월하더라니까. 1981년 가을에 출소하니까 이근안이 전화해 만나자고 하더라고. 다방에 마주 앉았지. 무슨 얘기를 했나 정확한 기억은 없지만 아마 미안했을 거야. 그래서 '당신에게는 유감없다'고 했던 기억이 나. 그런 시대였으니까."
일괄 사표 받고선 '저항 기자' 솎아냈다
1980년 언론인 대량 강제해직 당시 해고된 노향기(왼쪽), 신연숙 전 한국일보 기자가 지난달 21일 한국일보에서 인터뷰를 하면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당시에 기자협회 부회장이었던 노 전 기자는 다른 기협 간부들과 함께 신군부 검열에 항의하는 운동의 선봉에 섰다가 고문을 당하고, 옥고를 치르는 등 큰 고초를 겪었다. 신 전 기자는 정부에 항의하는 '제작 거부'에 참여했다가 그해 8월 1일 자로 강제해직당했다. 민경석 기자 |
그해 여름은 음울했다. 편집국에는 흉흉한 소문도 퍼졌다. '정부가 국가관이 좋지 않은 기자들을 걸러낸다더라'는 내용이었다. 유신정권 때부터 언론사에 드나들던 기관원들은 '요주의 기자'들을 이미 파악해 둔 터였다. 신문사 내부 도움 없이 알기 어려운 개인의 활동까지 낱낱이 알고 있었다. 주로 기자협회 활동을 열심히 하거나 보도 검열 반대 성명, 군사 정권 반대 지식인 서명 등에 이름 올린 기자들이 대상이었다.(⑤)
그래픽=송정근 기자 |
고작 6년 차 기자였던 연숙과 후배 여성 기자인 권태선, 안정숙, 김윤자도 '찍혔다'는 소문이 돌았다. 7월 31일, 회사는 모든 기자들에게 "일괄 사표를 내라"고 강요했다. 미래를 짐작한 연숙은 못 쓰겠다고 버텼지만 데스크가 "어파치 요식행위니까 그냥 쓰라"며 회유했다. 연숙은 선배 기자가 내밀어 끝내 서명했던 사직서 문구가 45년이 지난 지금도 선명히 기억난다.
'본인은 일신상의 사유로 사직합니다.'
다음 날, 편집국 게시판 앞에 사람들이 모여 들었다. 25명(⑥)의 이름이 적힌 방이 붙어 있었다. 해직자 명단이었다. 찍혔다던 연숙과 여후배들도 있었다. 신군부는 당시 언론사 사주들을 압박해 골치 아프게 하던 기자들을 강제해직시켰다. 연숙은 슬펐을까. "눈물보다는 헛웃음이 나왔다"고 했다.
"동기 한 명이 송별회에서 통곡했어요. '너를 이렇게 보낼 수 없다'고요. 그런데 저는 오히려 차분했죠. 광주 진실을 하나도 보도 못하는 신문사에 남을 바에 차라리 잘리는 게 낫다고 생각했어요."
그래픽=송정근 기자 |
1980년 언론인 강제해직 당시 해고당한 노향기(오른쪽), 신연숙 전 한국일보 기자가 지난달 21일 한국일보에서 인터뷰를 하면서 계엄사령부 보도검열단에 의해 삭제된 기사들을 배경으로 포즈를 취하고 있다. 민경석 기자 |
사회부 기자였던 조성호(당시 36세) 역시 해고의 칼날 앞에 놓였다. 편집국장은 성호를 찻집으로 불러내더니, 한참 머뭇대다 입을 뗐다.
"저쪽에서 나가란다." "저쪽이 어딥니까."
답을 못하고 진땀 빼던 편집국장은 황급히 자리를 떴다. 마음의 준비를 했던 성호는 어떤 영문인지 회사에 남았다. 경영진이 나서서 일부 기자를 해직자 명단에서 빼냈다는 사정은 한참 후에야 들었다.
연숙과 같이 해직당한 기자 중엔 출가해 스님이 된 이도 있었다. 여름 내내 편집국을 덮친 해직의 폭풍을, 법조팀 기자였던 최규식(당시 27세)은 이렇게 회상했다. "침울함, 한가할 수 없는 자괴감, 자조감, 열패감 그런 것에 다들 휩싸여 있었죠. (회사 밖) 출입처에서 일하다가 들어오면 해직기자 명단이 붙어있었어요. 하루에 끝난 게 아니라 며칠에 걸쳐서, 들어올 때마다 다른 이름이 붙었던 거죠. 심한 경우에는 살아남았다는 안도감도 있었고요."
언론의 무력화, 이 모든 게 전두환을 '왕'으로 만들기 위한 작업이었다.
내란 완성의 마지막 단계는 언론통폐합
삼청교육대 사건. 한국일보 자료사진 |
군부가 기사를 잘라내기만 한 것은 아니다. 유리한 보도는 큼지막이 쓰게 했다. 삼청교육대(⑦) 기사가 그랬다. 입사 3년 차 경찰기자였던 방민준(당시 32세)은 사회부장의 지시로 한동안 삼청교육대 기사를 여럿 썼다.
"삼청교육대 안에서 벌어진 부정적인 것들을 많이 봤어요, 신문에는 쓸 수 없었지만. 입소자들은 매일 반성문을 써야 했는데, 안 쓰면 기합을 받고 맞으니 없는 죄를 지어다가 쓰는 거죠. 그제야 교관은 좀 부드럽게 대해주고." 그러나 민준이 쓴 기사에는 인권유린을 폭로하는 대목은 없었다. 대신 '땀으로 잘못된 과거를 씻는다'는 식의 내용만 보도됐을 뿐이다.
그래픽=송정근 기자 |
1979년 10·26 직후 시작된 보도검열, 이듬해 3월 작성된 K-공작계획과 그해 여름 '언론인 대량 강제해직'에 이어 신군부 언론탄압의 정점은 11월 '언론통폐합'이었다. 내란 완성에 방해가 되는 언론들을 억누르기 위한 마무리 단계였다. 한국일보 사주 장강재를 비롯한 주요 언론사 사주들은 보안사 사무실로 불려가 '새 시대를 맞아 국가 언론정책에 적극 호응하겠다'는 폐간 각서를 썼다. 이로써 전국의 64개 언론사는 신문사 14개, 방송사 3개, 통신사 1개로 통폐합됐다. 강제해직과 언론통폐합 여파로 1980년 한 해 해직된 언론인은 1,000명이 훌쩍 넘는다.
비상계엄은 1981년 1월 24일 해제됐다. 동시에 검열단도 해체됐다. 그러나 전두환 정권에 장악당한 언론은 80년대 내내 심연의 터널을 지났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의 정점은 누가 뭐라 해도, 80년 5월 광주를 지우는 일이었다.
<3회에서 계속 / 12월 5일 한국일보 지면과 홈페이지에 공개됩니다>
- ① 46년 만의 보도
- • 46년 전 겨울 내란의 밤, 이제야 그 기사를 배달합니다
(www.hankookilbo.com/News/Read/A2025112314400001938) - • 46년 전 계엄 때 삭제된 기사 352개, 어떻게 입수했나
(www.hankookilbo.com/News/Read/A2025112916320001408) - • "탕탕탕···" 밤새 취재한 '쿠데타의 밤' 기사 지워지고, 검열 지옥이 열렸다
(www.hankookilbo.com/News/Read/A2025111914530005155) - • "박정희, 서울에 발포 명령 계획" 김재규 최후진술 보도, 전두환의 가위질로 삭제됐다
(www.hankookilbo.com/News/Read/A2025112720520001460)
- • 46년 전 겨울 내란의 밤, 이제야 그 기사를 배달합니다
- ② 해고, 농성, 고문
- • 전두환 'K'(왕) 만들기 공작에 1000명 넘게 스러졌다
(www.hankookilbo.com/News/Read/A2025111909450005795)
- • 전두환 'K'(왕) 만들기 공작에 1000명 넘게 스러졌다
최나실 기자 verite@hankookilbo.com
유대근 기자 dynamic@hankookilbo.com
홍인택 기자 heute128@hankookilbo.com
최은서 기자 silver@hankookilbo.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