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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칸 한 칸 만화로 다시 그려낸 나혜석의 삶 [미깡의 어쩌면, 인생 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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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칸 한 칸 만화로 다시 그려낸 나혜석의 삶 [미깡의 어쩌면, 인생 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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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승하 '내 마음 하나 잊지 말자는 것이다'

편집자주

스마트폰 화면으로 보는 만화가 일상인 세상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손가락 사이로 책장을 끼워가며 읽는 만화책만의 매력을 잃을 수 없지요. 웹툰 '술꾼도시처녀들', 오리지널 출판만화 '거짓말들'의 만화가 미깡이 한국일보를 통해 감동과 위로를 전하는 만화책을 소개합니다.


나혜석의 대표작 '자화상'. 수원시립미술관 소장

나혜석의 대표작 '자화상'. 수원시립미술관 소장


올해 12월 10일은 나혜석이 세상을 떠난 지 꼭 77년이 되는 날이다. 나혜석은 우리나라 최초로 개인전을 연 여성 서양화가이자 조각가이자 미술 교사였고 소설가, 시인, 수필가, 평론가로서도 수많은 글을 발표했다. 또한 독립운동가, 여성운동가로서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국내 최초로 세계일주를 한 여성으로 기록돼 있기도 하다. 줄줄이 적다 보니 그가 얼마나 다방면에서 빛났던 인물인지 새삼 실감하게 된다.

그러나 아주 오랫동안 나혜석의 이름에 가장 먼저 달라붙던 수식은 이런 것들이었다. 불륜을 저지른 화냥녀, 이혼 스캔들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겁 없는 여자, 자식까지 버린 파렴치한 여자. 종국에는 사회로부터 고립돼 길바닥을 떠돌다 쓸쓸히 눈을 감은 사람. 평생 800점이 넘는 그림을 그렸음에도 화재와 전쟁으로 거의 모두 소실되어, 작품보다 추문으로 기억되던 비운의 예술가.

나혜석의 글과 그림, 그리고 시대를 앞서간 행보는 그가 행려병자로 사망한 이후 수십 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재조명을 받기 시작했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방대한 기고문, 신문 기사, 소설, 기행문 등을 집대성했던 일이 출발점이었다. 재능은 있지만 너무 나대다가 벌받은 여자 정도로 치부하던 사람들은 그의 글을 다시금 제대로 읽고 나서야, 그 불꽃같은 사유와 급진적이기까지 한 앞선 사상에 충격을 받았다. 그의 걸음은 당대가 받아들이기엔 너무 일렀던 것이다. 이후로 지금까지 나혜석의 흔적을 기리고 그의 작업을 발굴하고 다시 읽으려는 시도는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내 마음 하나 잊지 말자는 것이다·유승하 지음·창비 발행·228쪽·1만8,000원

내 마음 하나 잊지 말자는 것이다·유승하 지음·창비 발행·228쪽·1만8,000원


유승하 작가의 만화 '내 마음 하나 잊지 말자는 것이다' 역시 그 흐름 위에 놓여 있다. 작가는 11년 전부터 나혜석에 관한 만화를 그려 왔다. 나혜석에게는 '최초'라는 수식이 여러 개 붙지만, 그중에서도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만화가라는 사실이 작가를 매료시켰다. 나혜석의 만화는 1920년 잡지 '신여성'에 실린 판화 작품으로, 살림과 여성운동을 병행하는 친구의 모습을 그린 네 컷 만화다. 꼭 요즘의 인스타툰을 떠올리게 할 만큼 간결한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이 책에 해당 작품이 실려 있는데, 네 컷 만화로 데뷔한 나 역시 얼마나 놀랍고 반가웠는지 모른다.

이 만화는 나혜석이 오롯이 자신의 힘으로 그림 공부를 떠난 순간부터 생을 마감하기까지의 삶을 일인칭 시점으로 따라간다. 나혜석을 처음 접하는 독자에게는 선명하고 친근한 첫 안내서가 될 것이며,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독자에게도 낯선 지점들을 새로 열어 보인다. 특히 유승하 작가가 애정과 존경을 담아, 희미하게 남은 나혜석의 그림에 색감과 붓 터치를 상상해 덧그린 장면들은 작품 전체의 정서를 또렷하게 밀어 올리며 오래 남는 여운을 만든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77년. "여성도 하고 싶은 대로 뭐든 할 수 있는 세상"을 꿈꿨던 나혜석이 지금의 한국을 보면 어떤 생각을 할지 문득 궁금해진다.

미깡 만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