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근평 국제부 기자 |
그때 하늘에서 드론이 뜨고 동시에 장사정포가 날아든다. 서둘러 축제장을 빠져나가려던 차량 행렬로 자유로 진입로는 금세 꽉 막힌다. 이유를 몰라 경적이 울려 퍼지는 사이 멀리서 연기가 치솟고 총성이 들린다. 북한군으로 보이는 무장 인원이 몸을 낮춘 채 대전차로켓포를 멈춰있는 차량들을 향해 겨눈다.
이 가상의 장면은 마냥 낯설지는 않다. 2023년 10월 7일 이스라엘 남부 232번 도로와 노바 페스티벌에서 실제로 벌어진 일을 한반도의 지명과 도로로 바꿔봤더니 ‘머나먼 중동의 비극’쯤으로 소비됐던 사건이 바로 옆 동네 이야기로 다가온다.
이스라엘 남부 트쿠마 마을의 자동차 무덤. 2023년 10월 7일 이스라엘 232번 도로에서 하마스의 기습 침공으로 파괴된 차량을 모아 추모 공간으로 만들었다. 이근평 기자 |
닮은 건 이뿐이 아니다. 이스라엘은 하늘엔 방공체계 ‘아이언돔’, 땅에는 펜스와 센서로 촘촘히 둘러친 ‘아이언월’이 있다는 믿음 위에 나라를 운영해 왔다. 장비를 믿고 경계 병력 상당수를 서안지구로 옮겼다. 그런 신화가 하마스에 의해 단 몇 시간 만에 무너졌다.
한국도 DMZ와 군사분계선(MDL) 일대에 각종 감시장치를 깔고 이를 ‘과학화 경계시스템’이라 부른다. 병력 감축과 복무 기간 단축 논의에는 늘 “장비가 지켜준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하마스와 북한의 관계가 그리 먼 것도 아니다. 무기와 전술 면에서 두 조직은 놀랄 만큼 유사하다. 합참도 당시 이를 언급했다. ▶휴일 새벽 기습공격 ▶대규모 로켓포 발사로 방공체계 혼란 야기 ▶드론 공격으로 각종 감시·통신·사격통제 체계 파괴 후 침투 ▶패러글라이더를 이용한 침투작전 등 하마스가 구사한 수법은 북한이 평소 강조한 전술교리다. 이스라엘의 안보 신화가 깨지는 과정을 북한이 선행학습의 교범으로 삼을 것이란 예상은 자연스럽다.
하마스가 스스로를 ‘포위된 약자’로 포장해 온 선전술 역시 북한이 다듬어온 ‘피포위 의식’과 다르지 않다. 수십 년간 군사력을 축적하고 공격 의지를 갈고 닦았으면서도 약자 프레임으로 상대의 내부 갈등을 야기하는 점도 눈여겨볼 만하다.
하마스와 북한은 또 수뇌부를 지키기 위해 민간인 희생을 거리끼지 않는다. 하마스는 요격체계 대신 민간인을 방패로 쓰는 일종의 ‘민간인돔’을 세우고 지휘부를 땅굴에 숨겨놨다. 김정은 정권도 유사시 주민을 내팽개치고 도주할 수 있도록 지하 갱도를 촘촘히 팠다.
232번 도로의 악몽을 한반도에 대입해보는 건 섬뜩하지만 필요한 경고일 수 있다. 하마스의 서사가 진화를 거듭하는 북한 정권의 생존법과 투쟁법을 이해하는 단초가 된다는 점에서다.
이근평 국제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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