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일 서울 중구의 한 카페에서 한겨레와 인터뷰하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이하영(왼쪽)·박현정 조사관. 류우종 선임기자 wjryu@hani.co.kr |
‘안녕’은 작별이자 환영의 인사다.
과거 권위주의 정권의 국가폭력 사건을 조사해온 독립기구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 또는 진화위)가 분기점을 맞는다. 5년간 활동해온 제2기는 11월26일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국회는 제3기 탄생을 위한 법안 통과를 준비 중이다. 3기 설립은 이재명 대통령의 공약이었다. 한겨레는 2기를 돌아보고 3기를 바라보며 ‘안녕 진화위’를 시작한다.
‘진화위’는 그동안 부정적 뉴스로 자주 등장했다. 내란 옹호 논란이나 설립취지에 반하는 발언으로 시끄러웠던 몇몇 위원장과 국회에 나와서도 마스크를 벗지 않는 기행을 벌인 국정원 출신 간부 탓이었다. 부정기 연재될 ‘안녕 진화위’는 그동안 조명되지 못한 얼굴과 목소리를 찾아 나선다. 과거사 조사와 규명에 진심을 가진 이들의 이야기와 함께 3기로 가는 여정의 의지와 기대를 담아본다.
굿바이 진화위! 헬로 진화위!!
두 조사관이 사무처 운영지원과 2명의 직원들로부터 조사를 받은 것은 지난해 5월의 일이다. ‘취조관’ 역할을 맡은 운영지원과 직원들도 내키지 않아 하는 분위기였다. 윗선의 지시였다.
‘진도 군경에 의한 민간인 희생 사건’(진도 사건) 현장 취재를 한 한겨레 기자와 접촉해 정보를 준 적이 있는지를 밝혀내려는 조사였다. 박현정 조사관은 이 사건 담당이었던 터라 가장 큰 의심을 받았다. 진도 사건과 무관한 이하영 조사관도 조사실에 불려갔다.
당시 김광동 위원장은 재임 기간(2022년 12월10일~2024년 12월9일) 내내 진실화해위 내부 상황과 비공개 정보에 관한 한겨레 단독보도가 나올 때마다 제보자 색출 작업을 한다며 소란을 피웠다. 제보자를 찾아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한국전쟁기 민간인 희생 사건을 조사하는 조사1국 조사2과 박현정(53)·이하영(45) 조사관을 지난 6일 서울 중구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한겨레와 첫 ‘접촉’이었다. ‘진도 사건’ 보도로 인해 조사를 받았다는 이야기도 이날 처음 털어놓았다.
두 사람은 1기와 2기 진실화해위를 모두 경험했다. 두 번 다 한국전쟁기 사건, 그중에서도 주로 전남 지역을 맡았다. 특히 영광과 영암에서는 각각 100일 이상 머물며 조사를 했다고 한다. 소설 ‘남부군’과 ‘태백산맥’의 주 무대인 전남은 전쟁 당시 인민군의 점령과 퇴각, 빨치산의 기나긴 투쟁 속에서 적대세력(인민군과 지방 좌익 등을 이르는 용어)과 군경에 의한 학살의 악순환이 상상을 초월했던 곳으로, 이념 갈등의 광풍이 빚은 한국 현대사의 고난을 상징하는 지역이다.
박 조사관은 1기 때 울산과 전·남북 보도연맹 사건과 미군 이리역 폭격사건을 맡은 데 이어, 2기에서는 전남 진도·영광 군경에 의한 희생 사건을 조사했다. 이 조사관은 1기 때 영암 적대세력에 의한 민간인 희생 사건과 장흥·완도 군경에 의한 희생 사건을, 2기에서는 영암 군경에 의한 희생 사건을 조사했다. 1기와 2기 사이 10년여의 공백기에 박 조사관은 국민권익위원회, 한반도통일역사문화연구소,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옛 전남도청복원추진단에서, 이 조사관은 보훈처, 대일항쟁위원회(대일항쟁기강제동원피해조사및국외강제동원희생자등지원위원회), 사회적참사특별조사위원회에서 근무했다.
두 사람에게 2기에서 한국전쟁기 민간인 희생 사건을 조사하며 느낀 기쁨과 슬픔에 관해 들었다. 이들은 ‘희생자 인정 여부’를 둘러싼 위원과 간부의 편파적 사건 처리로 좌절을 겪었다고 말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1950년 7월 대전 산내면 골령골에서 군인들이 보도연맹원을 학살하고 있다. 보도연맹원 학살은 한국전쟁 발발 직후 전국 각지에서 진행됐다. 미 국립문서기록관리청 |
― 1기와 2기는 많이 달랐지요?
박현정 : “제가 2022년 8월 2기 중간에 입사했는데, 첫 느낌은 도서관 같다는 거였어요. 1기 때는 별정직 조사관들이 서로 출장을 지원해주고 퇴근 후나 출장지에서 술을 마시며 사건에 대한 고민을 공유하고 방향성을 찾는 시간이 많았는데, 2기 때는 조사관들이 개별화되어 심지어 옆 과 조사관의 이름이나 얼굴도 모르는 경우가 태반이었어요.”
이하영 : “1기 때만 해도 역사 연구자 중심이었던 거 같아요. 그런데 2기에서는 뭔가 법률가들 중심으로 바뀐 우리 사회의 변화가 위원회에도 반영된 거 같아요. 조사 업무가 피해자들의 민사 소송을 준비하는 과정의 일부가 돼버린 감이 없지 않아요. 보고서를 써도 전체 맥락에서 희생자가 어디에 위치하는지를 설명하기가 어려워진 거죠. 소송할 때는 굳이 그렇게 할 이유가 없으니까요.”
― 조사방향을 놓고서도 말들이 많았어요.
박현정 : “1기 때는 조사관 중에 제노사이드 학회 연구자, 사회단체 출신들이 있었고, 어떤 역사의식을 갖고 학살의 실체를 밝혀낸다는 자긍심이 있었어요. 참전군인과 경찰, 목격자가 많이 살아계실 때라 그분들의 증언을 직접 받기도 했고요. 그런데 2기 위원회는 가해자 조사는 아예 없었고, 그냥 이념논쟁의 장이 돼버렸어요. 가해자인 국가가 사라지고 진실규명 신청서에 쓰인 희생자가 실제 희생자냐 아니냐에만 초점이 맞추어진 느낌이 있어요. 희생자가 어떤 활동을 해서 죽었는지가 쟁점이 됐죠. 죽인 사람은 없고 죽은 사람만 있는 거죠. 조사방향이 달라진 거예요.”
한국전쟁기 진도 군경에 의한 민간인 희생 사건이 벌어졌던 전남 진도군 의신면 만길리 마을 모습. 60여 가구가 살고 있다. 고경태 기자 |
1950년 10월 20일(음력 9월 10일) 진도 군경에 의한 민간인 희생자들이 의신 지서 경찰들에게 총살된 곳. 도둑굴재라고 불리는 창포리 골짜기 입구 밭이다. 고경태 기자 |
― 박현정 조사관이 조사한 ‘진도 사건’은 2기에서 가장 문제적이었어요. 진도경찰서 기록에 적혀진 ‘암살대원’이라는 메모 때문에 4명에 대해 진실규명이 보류되다 결국 ‘조사 중지’로 끝났죠.
박현정 : “`암살대원'과 관련된 여러 가지 논란들과 결국 조사중지 결정을 한 것은 백락정(군법회의 사형판결문 사후 발견으로 진실규명이 취소된 충남 남부지역 보도연맹사건 희생자) 사건과 더불어 2기 위원회의 가장 잔인한 결정이었어요. 위원회는 가해자인 국가가 살해를 정당화하기 위해 작성한 19년 후(1969년)의 기록을 토대로 이들에게 빨갱이라는 낙인을 찍었고, 빨갱이는 죽어도 된다는 논리를 다시 입혔어요. 경찰기록과 전혀 달랐던 조사관의 조사결과는 아무런 힘을 갖지 못하고 무력했습니다. 조사중지로 결정되던 날, 저녁 늦게라도 좋으니 결과가 나오면 연락드리겠다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8~9시경 전화를 드렸을 때 신청인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2년 반 노력이 물거품 됐다는 생각에 한동안 눈물을 참지 못했어요.”
― 이하영 조사관이 조사했던 전남 영암 민간인 희생 사건은 지난 2월 87건 중 65건이 소위원회에 상정되지 못하고 무더기 보류되는 일이 있었어요. 황인수 국장이 이에 대해 “조사관이 조사정보시스템에 자료를 하나도 입력하지 않았다”는 핑계를 대고 이옥남 상임위원이 “(조사에) 보완이 필요했다”는 식으로 해명 자료를 내면서 문제가 커졌고요.
이하영 : “영암 사건 희생자 대부분을 소위에 안 올린 실제 이유는 ‘유족 진술을 어떻게 믿느냐’는 거였죠. 국정원의 ‘6·25 처형자 명단’(1978년 국정원의 전신인 중앙정보부가 한국전쟁기 군경에 의해 학살당한 희생자 및 가족 등 6만여명을 정리한 명단)에 있거나 제적등본에 사망 일자가 정확히 기재돼 있는 경우만 통과시켜주고 유족이나 참고인 진술로만 된 사건은 다 빼버린 거예요. 결국 ‘조사 중지’로 결론이 난 분들이 꽤 있습니다. 제가 제대로 대응을 못 한 게 아닌가 하는 자책이 들고, 아직까지 이 일에 대해 스스로 잘 정리가 안 됩니다.”
― 얼마 전 한 언론에서 “진실화해위에 한국전쟁기 군경에 의한 희생 사건으로 신청된 사건을 조사한 결과 392건이 적대세력에 의해 벌어진 것으로 나타났다”고 보도했어요.
박현정 : “유족들을 보상금만 바라는 거짓말쟁이로 모는 프레임이죠. 적대세력에 의한 희생자들이야말로 김광동 위원장이 더 높이 명예회복과 배·보상을 시켜주고 싶은 분들이었죠. 그런데 그런 분들을 가짜 유족으로 취급한 셈인데, 김광동 위원장도 반기기 힘든 기사 같은데요. 적대세력에 의한 희생자들은 사법부가 배·보상을 인정하지 않고 있는데, 국가가 배·보상해줬으면 이런 논란도 없었을 거예요. 유족들이 의도적으로 거짓말을 했는지는 알 수 없겠지만, 군·경과 적대세력 중 누가 가해자였는지는 조사하면 다 나온다는 것을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이하영 : “이런 프레임의 기사는 조사관에 대한 불신임으로까지 이어지죠. 사실 희생자 유족들이 가해자가 누구인지 몰라 신청서 낼 때 아무 데나 체크하는 경우가 많아요. 면사무소 직원이 체크해 주기도 하고요. 절반 이상은 정말 몰라서 한 거거든요. ‘그때 아버지가 죽었다’는 사실만 아는 거죠. 박 조사관님이 말씀하셨지만, 결국 저희 조사 과정에서 다 걸러져요. 그걸 위해 진실화해위원회가 생겨서 조사관이 진술 조사하고 판단하는 건데요.”
지난 3일 전남 영암군 금정면 연보공원에 건립된 6·25 희생자 위령탑. 한국전쟁기에 억울하게 희생된 영령들과 희생자 가족들의 아픔을 위로하기 위해 영암군에서 세운 것이다. 진실화해위 제공 |
한국전쟁기 전남 영암 군경에 의한 희생자 유족과 적대세력 희생자 유족들이 2016년 함께 힘을 모아 건립한 용서와 화해의 위령탑. 영암군 군서면에 있다. 진실화해위 제공 |
― 2기 진실화해위에서 꼭 언급하고 넘어가고 싶은 사람은 누구일까요?
박현정 : “아무래도 조사1국장입니다. 국장은 조사방해를 했어요. ‘마스크맨’이라는 별칭을 얻으며 개인적 고초를 겪은 건 안타까운 일이지만, 와선 안 될 사람이었어요. 예를 들어 당시 희생자가 학생이었다면 ‘졸업증명서 떼어봐. 없어? 그럼 교복 입고 찍은 사진이라도 찾아봐’라고 해요. ‘교복 사진이 희생과 무슨 관련 있냐, 결정적 증거는 아니지 않냐’라고 하면 ‘그래야 죽었다는 신청인의 말을 믿어주겠다’는 거예요. 또 신청인이 신청서를 직접 쓴 게 맞는지를 확인하는 과정을 거쳤어요. 70대·80대 할머니가 잘 쓰지 못해 유족회가 써주는 경우 많거든요. 또 단순 착오를 갖고도 꼬투리를 잡아 거짓말을 한다고 했죠.”
이하영 : “사건에 대한 이해도가 없기도 했고, 일부러 그러기도 했던 거 같아요. 옛날에는 집에서 부르는 이름, 족보 이름, 제적등본상 이름이 다 다른 경우가 많거든요. 신청인은 홍길동이 죽었다고 하는데, 그건 집에서 부르는 이름이고, 제적등본엔 홍사동인 경우가 비일비재하고, 그 오류를 찾는 게 조사 과정인데, 그냥 무조건 잘못된 점을 잡아서 부각하는 일을 굉장히 많이 했죠.”
박현정 조사2과 조사관. 류우종 선임기자 wjryu@hani.co.kr |
― 그래도 보람과 기쁨이 있었죠?
박현정 : “한 70대 신청인은 조사 당시 만약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이 밝혀져 위령비에 아버지 이름을 새길 수만 있다면 나중에 아버지를 만났을 때 부끄럽지 않을 수 있겠다고 했는데 그 말이 진심으로 느껴졌고, 조사관의 역할과 의무감의 중요성을 돌아보게 됐어요. 이분이 어느 날 전화를 했는데 제가 ‘아 OOO 선생님’하고 전화를 받았더니 본인의 이름을 저장했다는 사실에 매우 감동했다고 했어요. 며칠 뒤 편지를 직접 보냈는데 몇십년 만에 본인이 편지를 쓰는 거라면서 별거 아닌 본인의 이름을 저장해주고 불러줘서 고맙다고 했어요. 아주 큰 감동을 하였어요.”
이하영 : “영암 사건 신청인 중에 ‘아버지가 6·25 때 죽었다’는 사실밖에 모르는 할머니가 계셨어요. 막막했지요. 본인 출생신고 되기 전에 아버지는 죽었고, 어머니는 친정으로 갔고, 친할머니와 단둘이 남은 거예요. 친할머니는 손녀딸 데리고 남의 집 식모살이하면서 첩으로 갔어요. 그러면서 성이 바뀌었고요. 나중에 원래 성을 찾기까지 또 지난한 과정이 있었어요. 학교는 당연히 못 다녔어요. 그러다 경상도로 이사를 하게 됐어요. 거기서 진실화해위원회를 알고 동사무소 가서 신청하신 거죠. 자기 호적에는 아버지 이름이 나오지도 않죠. 그러다 그분 고향에서 오래 살면서 사건을 잘 아시는 분을 만나게 된 거예요. 영암군 삼호읍의 작은 마을이었는데, 마을 사람들은 1950년 사건 당시 갓난쟁이였던 그 할머니를 기억하고 있었어요. 살아는 있는지 궁금해하더라고요. 알고 보니 그분 아버지는 부역 혐의로 마을이 초토화될 때 휩쓸려 돌아가셨더라고요. 마침내 퍼즐이 맞춰진 거죠.
그런데 여기까지만 보람과 기쁨이에요. 이 건은 결국 조사 중지됐어요. 이 분은 학교도 안 다녀 생활기록부도 없고, 실제 희생자의 딸로 올라와 있지도 않죠. 아버지가 혼인신고도 안 했고요. 이 사건은 조사보고서를 작성해 진실규명 인용 의견으로 올렸지만, 소위에도 못 올라갔어요. 그분이 전화 오면 이 모든 이야기를 하나도 해드릴 수 없어요. 다만 이렇게만 말씀드렸죠. ‘마을 갔더니 할머니 아는 사람 만났다. 어떻게 살았는지 너무 궁금해한다’고요. 그 마을에 살았던 사람들은 족보도 만들고 사망신고도 해서 다 진실 규명했는데….” (2기 전체에서 조사 중지된 2111건 중에서는 한국전쟁기 군경에 의한 희생 사건이 65%인 1365건으로 압도적 비중을 차지했다.)
이하영 조사2과 조사관. 류우종 선임기자 wjryu@hani.co.kr |
― 3기 진실화해위에서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박현정 : “1기 때는 감춰온 사건이 너무 많아 여순사건, 형무소 사건, 보도연맹 사건을 직권조사했어요. 2기에는 전남 신안 지역 사건과 종교인 희생 사건을 직권조사했죠. 2기 위원회는 적대세력에 의한 희생 사건을 강조했어요. 3기에서는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 사건이 벌어지게 된 근본적인 배경을 드러내는 작업을 했으면 해요. 군경 사건과 적대세력 사건은 다 연결돼 있어요. 한 마을에서 시기에 따라 가해 주체만 바뀐 거였죠. 국가가 빨갱이는 죽여도 된다는 논리를 심었기 때문에 학살의 악순환이 생기게 된 겁니다. 그러니 보도연맹 사건 희생자 가족이 인민군 점령기에 가해자가 되고, 수복 후에는 다시 부역자가 돼 살해를 당하기도 하는 거죠. 불행한 역사를 반복하지 않으려면 그 역사적 맥락을 드러내서 국가의 책임을 드러내는 게 중요합니다. 3기에서는 그런 걸 총괄적으로 정리하는 작업이 이뤄져야 합니다. 그 시작은 국정원의 ‘6·25 처형자 명단’ 전체를 위원회로 가져와 직권조사로 이어질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동안은 조사관이 국정원에 가서 명단을 열람하고 위원회에서 조사한 진실규명 대상자가 있는지만 확인할 수 있었죠.”
이 사진은 경찰기록에 근거해 희생자를 부역자로 둔갑시켰다는 비판을 받았던 2기 진실화해위의 퇴행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1950년 9월 진도중학교 1학년생으로 경찰에 학살당했지만 ‘암살대원’이라는 1969년 진도경찰서 기록에 따라 진실규명이 보류된 허훈옥(당시 14살)의 동생 허경옥(가운데)씨가 지난해 10월10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행정안전위원회 진실화해위 국정감사에 참석해 억울함을 호소하고 있다. 하지만 김광동 진실화해위원장은 유족의 면전에서 “피해자가 가해 활동에 있지 않았다고 단정할 수 없다”고 반박했다. 윤운식 선임기자 yws@hani.co.kr |
이하영 : “1기와 2기 때 국가의 예산과 인력 투입으로 전국에서 굉장히 좋은 원자료들이 생산됐어요. 3기에는 그 자료들을 통합할 수 있었으면 해요. 국정원의 ‘6·25 처형자 명단’을 보면 왼쪽은 처형자 명단이고 오른쪽은 그 가족이에요. 국정원이 이걸 만든 이유는 오른쪽에 있는 가족을 관리하기 위한 거였죠. 전쟁이 끝난 뒤에도 이들을 보듬은 게 아니라 언제든지 감시하고 제재를 가할 수 있는 근거를 위해 국가 단위에서 조사를 지속해 왔던 겁니다. 그래서 1990년대까지도 연좌제라고 해서, 유가족이 취업할 때나 해외 나가려고 할 때 제동을 걸었죠. 이런 자료들이 파편화돼 있어요. 국정원 명부와 경찰이 작성한 각종 신원조사기록 등 한국전쟁 희생자 기록을 집대성해서 최종판 같은 게 만들어지고 데이터베이스화돼서 일반 국민들에게 서비스될 수 있으면 좋겠어요.”
― 1·2기 위원장들을 다 겪으셨을 텐데요.
박현정 : “1기 송기인·안병욱·이영조 위원장, 2기 정근식·김광동·박선영 위원장을 다 겪었어요. 송기인 위원장은 독립기관의 대표로서 외풍을 막는 게 본인 역할이라고 했고, 실제 조사업무에 전혀 관여 안 하셨어요. 안병욱 위원장은 ‘진실화해위는 보고서가 가장 중요하고, 역사교과서로 남아야 한다’면서 본인이 역사 전문가로서 조사관 조사보고서를 일일이 수정하는 빨간펜 선생님을 자처했습니다. 두 분 다 강점이 있는 거죠. 그런데 2기를 겪으면서 위원장 자질에 대해 많이 고민을 해보았는데요. ‘그저 위원장은 위원회 설립취지를 알고, 유족과 피해자의 아픔을 공감해주는 사람이면 좋겠다’는 작은 바람만을 갖게 됐어요. 김광동 위원장 덕분이죠.”
지난 6일 서울 중구의 한 카페에서 한겨레와 인터뷰하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박현정(왼쪽)·이하영 조사관. 류우종 선임기자 wjryu@hani.co.kr |
이하영 : “지금 생각해보면 김광동 위원장은 한국전쟁기 사건을 총괄하는 1소위원장(2021. 2~2022. 12) 때부터 작정하고 일을 한 거 같아요. 1기 때는 적대세력 사건을 더 키우고 군경 사건을 깎아내리는 일이 없었는데, 2기 때 너무 소모적인 논쟁이 된 거죠.”
― 마지막 1년을 박선영 위원장과 보냈습니다.
박현정 : “독특한 분이세요. 노조에서 위원장님과 대화할 기회가 있었는데 쉽지 않았어요. 김광동 위원장은 2기 진실화해위를 이념전쟁터로 만든 측면이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젠틀하고 유쾌했어요. 박선영 위원장님과는…음.”
이하영 : “군경 사건보다는 적대세력 사건에 더 관심이 많으셨던 분으로 기억해요. 그 외에는….”
고경태 기자 k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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