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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시간 대작 오페라가 온다…얍 판 츠베덴 “바그너는 마약”

헤럴드경제 고승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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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시간 대작 오페라가 온다…얍 판 츠베덴 “바그너는 마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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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달 4일부터 ‘트리스탄과 이졸데’ 국내 초연
국립오페라단·서울시향·바그너 전문가 총출동
장장 6시간의 사랑과 죽음 담은 러브스토리
얍 판 츠베덴 서울시향 음악감독이 내달 4일부터 무대에 오를 국립오페라단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지휘를 맡았다. [국립오페라단 제공]

얍 판 츠베덴 서울시향 음악감독이 내달 4일부터 무대에 오를 국립오페라단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지휘를 맡았다. [국립오페라단 제공]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바이올린으로 시작되는 아주 긴 선율. 관현악은 이 화음에 변화를 주며 긴장감을 유도한다. 이른바 ‘욕망의 화음’으로 불리는 바로 그 선율. ‘트리스탄 화음’(라♭ - 시 - 레 - 파♯)의 습격이다. 바그너 오페라 ‘트리스탄과 이졸데’ 1막 전주곡의 두 번째 마디부터 등장하는 이 음표들은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금지된 사랑’을 노래한다. 트리스탄은 아일랜드 공주인 이졸데의 약혼녀를 살해한 원수다.

“바그너의 음악은 마약과도 같아요. 오늘은 바그너를 듣고, 내일은 모차르트나 브람스를 들을 수 없어요. 바그너의 음악에 빠져들면 바그너와 함께 일어나고, 바그너와 함께 잠들고, 꿈에서도, 식사를 하면서도 온통 바그너를 생각하게 되고 하루 종일 바그너 안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어요. 마치 바그너가 목을 조르는 것 같은 경험이죠.”

얍 판 츠베덴 서울시립교향악단 음악감독은 바그너의 음악을 말하며 굉장히 상기돼 보였다. 네덜란드 출신으로 뉴욕필하모닉을 이끌었던 세계적인 지휘자인 그는 앞서 홍콩필하모닉을 이끌며 바그너의 4부작 오페라 ‘니벨룽의 반지’ 전곡을 녹음했다. 이 음반은 2019년 영국 그라모폰 시상식에서 ‘올해의 오케스트라’에 선정됐다. 한 마디로 자타공인, 명실상부 ‘바그너 전문가’ 중 한 명인 셈이다.

국립오페라단 ‘트리스탄과 이졸데’ B캐스트인 브라이언 레지스터와 엘리슈카 바이소바 [국립오페라단 제공]

국립오페라단 ‘트리스탄과 이졸데’ B캐스트인 브라이언 레지스터와 엘리슈카 바이소바 [국립오페라단 제공]



츠베덴 감독은 “바그너는 사람을 끌어당겨 음악의 일부가 되도록 경험하게 하는 작곡가다. 바그너의 음악은 사랑하거나 증오하거나 둘 중 하나다. 지금의 난 사탕가게에 온 것처럼 흥분감을 감출 수가 없다”며 눈을 빛냈다. 17일 늦은 오후 한국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바그너 예찬’이 길어지자, “미안하다. 내가 지금 좀 흥분했다”며 웃음까지 지었다. 츠베덴 감독과 함께 서울시향이 오랜만에 오페라 전막 연주를 시도한다. 재단법인 설립 이후로는 처음이다.

‘트리스탄과 이졸데’는 바그너가 1855년부터 대본을 쓰기 시작, 10년 만인 1865년에 초연된 작품이다. 대본 작업에만 2년, 작곡에만 2년이 걸렸다. 장장 6시간에 달하는 이 오페라는 이졸데가 자신의 약혼자를 살해한 트리스탄과 사랑에 빠지는 독일 켄트 신화를 바탕으로 한다. 작업 1년 전,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읽고 쓴 대본이기에 이 작품에도 쇼펜하우어의 철학이 문신처럼 새겨져 있다. 낮(표상)과 밤(의지), 규범(표상)과 욕망(의지)으로 표상적 세계와 초월적 세계를 구분하고 음악으로 메시지를 드러냈다.

특히 오페라는 조성의 해체를 담아낸 ‘트리스탄 화음’으로 19세기 낭만주의 음악의 종지를 찍고, 20세기 현대음악의 문을 열어젖혔다. 드뷔시의 ‘목신의 오후 전주곡’, 말러의 ‘부활’, ‘대지의 노래’, 슈트라우스의 ‘살로메’ 중 키스신은 물론 스크랴빈, 쇤베르크가 ‘트리스탄 화음’의 영향을 받아 그들만의 음악을 써 내려갔다.


이졸데 역을 맡은 A캐스트 소프라노 캐서린 포스터 [국립오페라단 제공]

이졸데 역을 맡은 A캐스트 소프라노 캐서린 포스터 [국립오페라단 제공]



국립오페라단은 이 무대를 위해 ‘바그너 전문가’들을 모두 모았다. 최상호 국립오페라단 단장은 “‘트리스탄과 이졸데’는 바그너 작품 중에도 고도의 집중력과 음악적 역량을 요구하는 대작”이라며 “국내 예술 단체의 제작 역량을 총동원했다”고 귀띔했다. 지휘자인 츠베덴 감독은 그중 한 명이다. 최 단장은 츠베덴 감독의 서울시향 취임 이후 무대의 지휘자로 함께 하기 위해 호시탐탐 기회를 엿봤다고 한다.

츠베덴 감독은 “지난해 국립오페라단에서 ‘트리스탄과 이졸데’ 요청을 받고 조금 놀랐다”며 “먼저 오페라를 제안했다는 것, 그것도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라는 점에서 이건 정말 엄청난 일이자 내게도 새로운 도전”이라고 했다.

트리스탄 역엔 바그너 주역을 노래하는 영웅적 테너라는 의미를 지닌 ‘헬덴 테너’ 스튜어트 스켈톤이 낙점됐다. 이졸데 역은 소프라노 캐서린 포스터가 맡았다. 11년 연속 독일 바이로이트 페스티벌 무대에 선 세계적인 소프라노다. 그는 특히 지난 10년간 바그너 ‘니벨룽의 반지’에 출연했으니, 명실상부 바그너 스페셜리스트다. 포스터는 조산사로 일하다 뒤늦게 성악가의 길을 걸었다.


국립오페라단 ‘트리스탄 이졸데’ 연출을 맡은 슈테판 메르키와 이졸데 역의 캐서린 포스터, 트리스탄 역의 스튜어트 스켈톤 [국립오페라단 제공]

국립오페라단 ‘트리스탄 이졸데’ 연출을 맡은 슈테판 메르키와 이졸데 역의 캐서린 포스터, 트리스탄 역의 스튜어트 스켈톤 [국립오페라단 제공]



그는 “2007년부터 매년 바그너 작품에 참여하고 있지만, 여전히 감정적으로 어렵게 느껴진다”며 “바그너의 작품은 목소리와 태도 등 여러 가지를 갖춰야 하고, 에너지 소비가 많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성악가가 되기 전 첫 직업이 생명을 낳는 것을 돕는 조산사였는데, 그 일이 정신적 준비를 시켜줬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이번 무대에선 원작의 재해석이 눈에 띈다. 연출을 맡은 스위스 출신의 슈테판 메르키는 2023년 코트부스 국립극장에서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선보였다. 그는 작품 속 바다를 우주로, 트리스탄의 배를 우주선으로 치환했다.

메르키 연출가는 “사랑과 자유를 이어주는 유니버스라는 점에서 배경을 우주로 옮겼다”며 “트리스탄 화음의 첫 음은 죽음, 다음 상승 음은 별을 향한 그리움을 표현하고 있다. 이 안에 담긴 그리움과 욕망을 담기에 우주가 가장 적합한 공간이었다”고 말했다.

트리스탄을 노래하는 스켈톤은 “바그너의 작품은 끊임없이 출렁이는 그리움의 물결을 표현한다.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그리움과 사랑은 결국 죽음을 통해 이뤄진다”며 “이 모든 감정을 담아낸 도구가 바로 음악이었다. 오늘 당장 은퇴할 것 같은 기분으로 노래해야 하는 배역이다. 성악가에게 관객에게도 특별한 시간이 될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