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일 오후 서울 중구의 한 카페에서 1기에 이어 2기에서 조사관으로 일한 김상숙(오른쪽)·나효은씨 모녀가 한겨레와 만나 인터뷰하고 있다. 류우종 선임기자 wjryu@hani.co.kr |
‘안녕’은 작별이자 환영의 인사다.
과거 권위주의 정권의 국가폭력 사건을 조사해온 독립기구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 또는 진화위)가 분기점을 맞는다. 5년간 활동해온 제2기는 11월26일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국회는 제3기 탄생을 위한 법안 통과를 준비 중이다. 3기 설립은 이재명 대통령의 공약이었다. 한겨레는 2기를 돌아보고 3기를 바라보며 ‘안녕 진화위’를 시작한다.
‘진화위’는 그동안 부정적 뉴스로 자주 등장했다. 내란 옹호 논란이나 설립취지에 반하는 발언으로 시끄러웠던 몇몇 위원장과 국회에 나와서도 마스크를 벗지 않는 기행을 벌인 국정원 출신 간부 탓이었다. 부정기 연재될 ‘안녕 진화위’는 그동안 조명되지 못한 얼굴과 목소리를 찾아 나선다. 과거사 조사와 규명에 진심을 가진 이들의 이야기와 함께 3기로 가는 여정의 의지와 기대를 담아본다.
굿바이 진화위! 헬로 진화위!!
“굉장히 특수한 직업이에요. 역사학자의 시선이 있어야 하고, 수사관의 감각이 있어야 해요. 비참한 형태로 떼죽음을 당한 수십 년 전의 사건을 조사하는….”
엄마의 말에 딸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그래서 의미 있고 재미도 있어요. 유족과 참고인들을 탐문하고 자료를 찾아가면서 역사의 어떤 퍼즐을 맞춰가는 거잖아요.”
김상숙(63) 성공회대 연구교수는 그 특수한 직업을 먼저 경험했다. 나효은(29)씨는 지금 그 직업에 종사한다. 바로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 조사관이다. 1기와 2기를 이어 엄마와 딸이 조사관으로 일한 초유의 사례다. 2기 진실화해위 활동 종료를 코앞에 둔 14일, 서울 중구 한 카페에서 김상숙·나효은씨 모녀를 만나 과거사 조사와 연구에 매진해온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김상숙 교수는 여성 노동운동사를 연구하다 2007년 8월 전문계약직 조사관으로 1기 진실화해위에 들어와 2010년 7월까지 일했다. 나효은 조사관은 2021년 5월 2기 직원 채용 시험에 합격해 들어왔다. 조사2과와 3과를 거쳐 조사활동 종료 뒤 위원회팀에서 근무 중이다. 둘 다 한국전쟁기 민간인 희생 사건을 담당했다. 엄마는 대구 10월 사건 관련 민간인 희생 사건(10월항쟁)과 영천 민간인 희생 사건, 포항지역 미군폭격 사건 등을, 딸은 거제·통영·경주 군경에 의한 민간인 희생 사건과 국민보도연맹 및 예비검속 사건 등을 조사했다. 김 교수는 1기 때 조사한 ‘10월 항쟁’을 계속 연구해 2016년 ‘10월항쟁’(돌베개)을 펴냈는데, 이는 한국전쟁기 사건 조사관들과 연구자들이 꼽는 필독서다.
2019년 4월 제주에서 함께 한 김상숙(왼쪽) 나효은씨 모녀. 김상숙 제공 |
“야근할 때면 딸을 사무실에 데려와 옆에 앉혀놓고 일했어요. 줄 게 없잖아요. 보고서 주면서 오·탈자 찾으라고 했죠.(웃음) 그때 청원 오창창고 보도연맹 사건이었던가?”(김상숙) “맞아요. 어릴 때 엄마가 보고서 주면 열심히 읽고 오자 찾아냈어요. ‘사람들이 며칠간 창고에 갇혀있었다’는 내용 보면서 무서워했던 기억이 나요.”(나효은) 딸이 10대 초반이었던 시절이다. 1기 진실화해위가 끝난 뒤에도 딸은 연구보조원으로 엄마의 연구 현장에 동행했다. 엄마가 국사편찬위원회 등의 발주를 받아 한국전쟁 생존자·목격자 생애사 구술작업을 할 때마다 옆에서 동영상 촬영이나 녹취 작업을 도왔다.
“엄마 따라다니면서 한국전쟁기 민간인 희생 사건 유족분들 이야기 워낙 많이 들었잖아요. 1기 진실화해위원회가 2010년에 사건 조사를 모두 완료 못 한 채로 문을 닫은 것도 알았고요. 2020년 2기가 문 열 때 당연히 ‘내가 들어가서 해결하고 싶다’는 생각을 한 거죠.” 그렇게 자연스레 진실화해위에 입사한 나효은 조사관은 실제 엄마가 못다 한 사건을 해결해낸다.
나효은 조사관이 2024년 9월 경북 경주시 산내면에서 한국전쟁기 민간인 학살 사건에 관해 탐문조사를 하는 모습. 경로당에서 추천받은 최고령 어르신과 집 대문 밖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나효은 제공 |
김상숙 교수가 1기 진실화해위 조사관으로 활동하던 2010년 7월30일 대구10월항쟁유족회 사무실에서 10월항쟁유족회와 전국유족회의 간담회에 참석한 모습. 왼쪽부터 나정태 경산코발트광산유족회 이사, 김상숙 조사관, 채영희 대구10월항쟁유족회 회장, 이성번 대구10월항쟁유족회 사무국장, 김진수 진실화해위 대협팀장, 오원록 전국유족회 상임의장(당시 직함 기준). 김상숙 제공 |
“1기 때 ‘10월 항쟁’과 관련된 민간인 희생 사건을 조사하면서 경주 안강읍을 다녔는데, 신청인(1934년생)이 뒷산에 나무하러 갔다가 오른쪽 무릎관절에 토벌대 총을 맞고 장애인이 돼 평생 후유증을 앓았대요. 그런데 1기에서는 조사해야 할 사건이 워낙 많다 보니, 사망자 아닌 부상 생존자는 신청을 받아놓고 막바지에 다 각하시켰어요. 그런데 나는 맡은 사건을 절대 각하로 올리진 못하겠더라고요. 가까스로 ‘진실규명 불능’을 받아내서 보고서에 기록을 담았어요.”(김상숙)
“2기 때 그분 신청을 받았어요. 다만 연로하셔서 아드님과 소통했지요. 기분이 묘하더라고요. 다행히 ‘상해’도 각하하지 않고 조사하도록 했어요. 1기 때 엄마가 조사해 놓은 진술조서를 근거로 그분이 총 맞는 거 본 사람, 지게로 지고 내려온 사람들을 다시 찾아 진실규명을 해드렸어요. 그러고 나서 피해자분이 한 달 뒤 돌아가셨어요. 90세였죠. 딱 1년 전이네요.”(나효은)
나효은 2기 진실화해위 조사관. 현재 조사관 중 최연소다. 류우종 선임기자 wjryu@hani.co.kr |
모녀는 열정도, 일 욕심도 닮았다. 딸은 2기 최연소 조사관임에도 남들의 두 세 배 일을 한다는 평가를 받았다. 작성한 조사보고서가 12편에 이를 정도다. 두 사람이 1·2기에서 희생을 입증한 피해자를 합하면 총 800여명이다. 운전면허가 없어 조사를 위한 지역 출장 때 오로지 ‘뚜벅이’로 다닌 점도 같다. “처음 조사한 거제 군경 사건이 젤 기억에 남아요. 거제 둔덕면이라는 산골짜기 마을에서 여섯 분이 돌아가셨는데, 버스 타고 면 꼭대기에 올라가 내려오면서 이틀간 마을 경로당마다 문 두드려 참고인 조사를 했어요. 1949년 4월 국군 제16연대, 호림부대가 주둔하면서 민간인을 학살한 사건이었죠. 총 쏘는 걸 본 사람, 시신을 찾은 사람, 고문한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종합하니까 정확히 언제 사건이 벌어졌는지가 파악되더라고요.”(나효은)
아쉬움과 좌절도 없지 않았다. 나효은 조사관이 맡은 사건 중에서는 33건이 ‘조사 중지’ 처리됐다. 이옥남 상임위원과 황인수 조사1국장이 참고인 진술에만 의존한 사건은 아예 소위원회에 올리지 않기도 했다. 나 조사관은 “나중에는 어떻게든 최대한 진실규명 되는 쪽으로 상임위원과 국장의 요구에 맞춰주고 타협을 했다”면서 “3기 때 꼭 내 손으로 조사 중지된 사건을 진실규명하고 싶다”고 말했다. 딸의 말에 엄마는 “다음에는 희생자 입증기준에 대한 조정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2기 때는 참고인 진술이 여럿 있어도 잘 인정해 주지 않았고, 군경에 의한 사건에 한해 희생 입증 기준이 훨씬 엄격했다는 것이다.
1기 진실화해위 조사관을 지낸 김상숙 성공회대 연구교수. 류우종 선임기자 wjryu@hani.co.kr |
사실 김상숙 교수는 2기에서도 그림자 같은 존재였다. 외부에서 전직 조사관들과 연구자, 시민단체 활동가들로 국가폭력 연구모임을 조직해 김광동 위원장의 “전시에는 재판 없이 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 등의 발언에 비판 성명을 내거나 ‘과거청산 이대로 좋은가’ 국회 토론회 등을 조직하는 일을 주도했다. 한마디로 ‘2기 진실화해위 바로잡기 운동’의 핵심이었다. “원래 과거청산의 정신은 국가폭력 근절, 즉 재발 방지에 있죠. 그런데 그저 피해자를 구제해준다, 그것도 선별해서 시혜를 베풀어준다는 쪽으로 흘러가고, 그러다 보니 어떤 유족들은 민간인 학살 사건이 일어나도 되는데 ‘우리 아버지 빨갱이 누명만 벗으면 된다’는 태도로 나오기도 했죠. 2기에서 오히려 퇴행한 셈이에요.”(김상숙)
모녀는 지금도 만나면 출장을 가서 조사하다 생긴 에피소드나, 연구하며 새롭게 찾아낸 사실 등을 놓고 이야기꽃을 피운다. 대부분 한국전쟁과 관련돼 있다. 이들은 한국전쟁을 어떻게 볼까. “저는 전쟁이 지나간 학살의 흔적을 보는 건데, 민간인 학살은 해방 직후부터 있었어요. 한국전쟁은 그 연장선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1946년부터 빨치산 토벌작전이 끝나 지리산 입산금지가 풀린 1955년까지 전쟁 기간으로 봐야 하지 않을까요?”(나효은) “한국전쟁을 인민군과 국군, 중국군과 미군 등 정규군의 싸움으로만 기억하는데, 분단체제 반대세력과 이승만의 내전이라는 측면도 있어요. 그런 의미에서 10월항쟁·제주4·3·여순항쟁·한국전쟁은 이어지는 사건인데, 보통 별개의 사건으로 여기는 것 같아요. 여순항쟁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10월항쟁 언급은 잘 안 하거든요. 이걸 연결하여 보는 관점이 필요해요.”(김상숙)
1998년 5월5일 경북대학교 교정에서의 김상숙·나효은씨 모녀. 김상숙 제공 |
김상숙 교수는 ‘여자들의 한국전쟁’을 주제로 다음 책을 준비 중이다. “해방 후부터 발생한 여성들의 국가폭력 피해를 들여다보고 있어요. 키워드는 반공과 가부장제, 연좌제입니다.” 나효은 조사관은 3기가 출범해 일할 기회가 생길 경우 한국전쟁기 사건과 관련한 경찰기록을 교차 분석해보고 싶단다. “제가 조사 일 외에도 기록조사 티에프에서 일하면서 국정원의 ‘6·25 처형자 명단’ 실무도 맡은 적 있어요. 그동안은 피해자 조사에 초점을 맞추었죠. 가해주체를 조사하는 것도 조사관 책임이라고 생각해요.”
엄마는 딸이 멋지다. 어릴 적 ‘활발한 개구쟁이’였던 딸이 에너지 넘치고 순발력 있는, 자신보다 개선된 버전의 조사관이 됐다고 여긴다. 이제는 동지적 유대감도 느낀다. 그래도 늘 걱정이 앞선다. “운동권 디엔에이, 과거사 연구자 디엔에이는 물려받았지만, 자기 돌봄 디엔에이는 못 줬어요. 어떤 형태로든 자기를 돌보고 관리해서 길고 꾸준하게 갔으면 좋겠어요.” 딸도 성장했다. “입사할 때는 ‘김상숙 전 조사관님 딸입니다’가 붙어야 자기소개가 됐는데, 이제 몇 년 조사하면서 역량도 다져졌고 올해 노조 출범하면서 사무국장도 맡았어요. 비로소 엄마와 동료가 된 거 같아요.”(나효은)
맨 앞에서 김 교수는 조사관의 미덕으로 역사학자의 시선과 수사관의 감각을 말했다. 여기에 두 개가 더 붙는단다. “가해자의 논리와 싸우는 전사, 죽은 분들의 존엄성을 회복하는 사제의 측면도 있어요. 근데 2기 때 조사관이 제대로 활동 못 하도록 상임위원과 국장이 방해하는 모습을 보면서 너무 안타까웠어요. 3기에는 제발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 사건이 온전하게 진실 규명되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그 일을 현장에서 몸소 겪으며 마음고생 했던 딸은 말없이 미소를 머금기만 했다.
고경태 기자 k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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