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글은 올해 초 정부에 1대 5000 축척의 국내 고정밀 지도의 반출을 요청했고 정부는 지난 11일 관련 요청에 대한 심의를 내년 2월 5일까지 보류했다./조선DB |
한국과 미국이 관세 협상과 안보협의 최종 결과물인 ‘조인트 팩트시트(공동 설명 자료)’를 확정하면서 이번 합의가 국내 IT 산업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팩트시트에 “한·미 양국은 디지털 서비스와 관련된 법률 및 정책, 특히 망 사용료와 온라인 플랫폼 규제와 관련해 미국 기업이 차별받지 않도록 한다”는 내용이 포함되면서 구글이 우리 정부에 요청한 1대 5000 축적 고정밀지도 데이터 국외 반출 문제가 새 국면을 맞게 될 전망이다.
미국이 팩트시트에 디지털 규제를 직접적으로 언급하면서 정부·여당이 추진하던 온라인플랫폼법(온플법)과 해외 빅테크에 부과하려던 망 사용료 도입에도 제동이 걸릴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17일 업계에 따르면 백악관 홈페이지에 게재된 팩트시트에는 온플법, 망사용료, 위치 정보 등 디지털 분야에서 미국 기업이 불리한 대우를 받지 않도록 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팩트시트에는 “한·미 양국은 미국 기업이 디지털 서비스 관련 법과 정책에서 차별받거나 불필요한 장벽에 직면하지 않도록 보장한다”는 문구가 들어갔다. 아울러 “위치정보·재보험·개인정보를 포함한 데이터의 국경 간 이전을 촉진하기로 약속하고, 세계무역기구(WTO)에서 전자적 전송(electronic transmissions)에 대해 관세를 부과하지 않는 영구적 유예 조치를 지지한다”는 문구가 포함됐다.
한·미 정상회담 팩트시트(공동 설명자료)에 담긴 디지털 정책 관련 문구./팩트시트 |
애플, 구글, 마이크로소프트(MS) 등 미국 빅테크 기업들은 그동안 한국 정부의 위치 정보 반출 불허, 망 사용료 등이 ‘비관세 장벽’이라며 이런 규제를 해소해달라고 촉구해왔다. 미국 비영리 단체인 컴페테레 재단은 지난달 발간한 보고서에서 “한국 정부가 미국 빅테크 기업들이 한국 고객들에게 제공하는 온라인 유통, 소셜미디어, 지도, 물류와 같은 주요 서비스를 제한하는 정책을 계속 추진할 경우 양국은 1조달러(약 1400조원)에 달하는 경제적 손실을 입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빅테크 기업의 오랜 민원 사항이 이번 협상에 반영된 것으로 분석된다.
국내 업계에서는 이번 팩트시트가 정부가 심의 중인 구글의 고정밀 지도 반출 요청에도 영향을 줄 것으로 보고 있다. 구글은 올해 초 정부에 1대 5000 축척의 국내 고정밀 지도의 반출을 요청했다. 정부는 지난 11일 관련 요청에 대한 심의를 세 번째로 보류하고, 구글 측에 내년 2월 5일까지 서류 보완을 요구했다. 구글은 지난 9월 기자간담회를 열고 국내 좌표 정보가 보이지 않도록 조치하고 위성 이미지 속 보안 시설을 가림 처리하겠다고 약속했지만, 이에 대한 보완 신청서는 정부에 추가로 제출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정부는 안보 우려를 들어 구글의 고정밀 지도 반출 요청에 대해 지난 2007년과 2016년에 불허 결정을 내렸고, 이번에도 안보 불안을 고려해 고심하고 있지만, 미국의 압박이 지속되면서 허용 쪽으로 의견이 기울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미국 컴퓨터통신산업협회(CCIA)는 앞서 성명을 내고 “한국 정부가 디지털 지도 데이터의 국외 반출 승인을 지속적으로 부당하게 미루고 있다”며 “이는 최신 내비게이션, 물류, 모빌리티 서비스 발전을 저해하는 조치”라고 비판했다. 이들은 정부가 구글의 지도 반출 요청을 받아들이는 조건 중 하나인 한국 내 데이터센터 설치에 대해서도 “외국 기업에 현지 데이터센터 유지 의무를 부과하는 것은 비용 부담과 경쟁 불이익만 초래하고 한미 자유무역협정(KORUS FTA)에서 보장된 비차별 원칙에도 어긋날 수 있다”고 했다.
국내 관광 업계와 관련 IT 서비스를 운영하는 기업들은 정부가 지도 반출을 허용하지 않아 구글 지도 서비스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고, 한국을 찾는 1000만명의 외국인 관광객이 불편함을 겪고 있다고 호소하고 있다. 정부는 1대 2만5000 축척보다 자세한 정밀 지도는 군사나 보안상의 이유로 해외 반출을 금지하고 있는데, 구글은 1대 2만5000 지도로는 구글 지도에서 길 찾기 기능(내비게이션)을 구현할 수 없기 때문에 반출을 허용해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구글과 관광업계는 지도에 사용되는 위성 이미지는 민간 위성 업체가 촬영해 판매하는 자료로, 전 세계 개인·기업·정부 등 누구나 구매하면 접할 수 있기 때문에 구글이 1대 5000 축척의 지도를 지반으로 길 찾기 서비스를 제공한다고 갑자기 안보 위협이 커지지 않는다는 게 이들의 입장이다.
반면 지도 서비스를 운영하는 네이버, 카카오 등 정부가 지도 반출을 허용하면 국내 기업들이 미래 공간서비스 산업 주도권을 구글이나 애플에 뺏길 수 있다고 우려하고 있다.
다만 지도 반출 허용 쪽으로 정부 심의 결과가 기울어도 세부 조율에는 시간이 걸릴 것으로 예상된다. 앞서 김용범 대통령실 정책실장은 “고정밀 지도 반출 건은 “‘동등한 대우(equal treatment)’ 원칙에 합의했기에 (개별 사안은) 계속 협의해 나갈 것”이라며 “애플은 한국 정부가 제시한 안을 문제 없다고 수용했고, 구글은 아직 이견이 있어 협의가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정부와 여당이 추진 중이던 온플법과 망사용료 법제화에도 제약이 생길 것으로 보인다. 미국 민간 싱크탱크인 정보기술혁신재단(ITIF)은 팩트시트에 명시된 내용에 대해 “한국 정책입안자들이 미국 기술기업 대상으로 부과하려는 규제를 금지(explicitly banning)하는 합의”라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이번 합의로 망사용료, 온플법 등 ‘비관세 장벽’을 제거하게 됐다”고 했다.
허윤 서강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팩트시트는 원칙적으로는 법적 구속력을 갖진 않지만, 한미 관계는 힘의 비대칭성이 워낙 크기 때문에 미국에는 강제성 없는 MOU(양해각서)라도 한국에는 구속력을 갖는 측면이 있다”며 “온플법, 망사용료, 고정밀 지도 반출 문제는 미국 무역대표부(USTR)이 매년 보고서에서 비관세 장벽으로 규정하고 강하게 반대해왔기 때문에 앞으로도 압력이 계속될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이재은 기자(jaeeunlee@chosunbi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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