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은수 편집문화실험실 대표 |
어떤 대화가 최상의 대화일까. '조연 여배우'(글항아리 펴냄)에서 대만 작가 등구운은 외국어로 대화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들은 외국어로 대화했기에 단어의 선택과 문장 구성에 신중했다. 영어로 말할 때면 시간이 느리게 가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대화하는 시간이 몇 배 길어졌다. 일상이 더없이 충만하게 느껴지는 건 당연했다. 시간이 부풀고 켜켜이 쌓이며 일상적인 대화마저 깊이를 더했기 때문이다."
타이베이 문학상을 받은 이 자전 소설은 황청이라는 한 여성의 삶을 다룬다. 스무 살 때 일본 배우를 닮았다는 이유로 우연히 연기자의 길에 들어선 그녀가 대역, 신인, 조연을 거치면서 상처를 이기고 성장해가는 모습이 담겨 있다. 성숙은 삶을 살아갈 때 생겨나는 게 아니라 돌아볼 때 이루어지고, 이는 우리 안에서 지혜와 영성이 자리 잡는 순간이기도 하다.
'외국어로 말하기'는 좋은 대화의 조건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외국어로 뜻을 전하는 건 언제나 쉬운 일이 아니다. 잘못된 표현을 써서 자칫 오해를 부르기 쉬운 까닭이다. 신중히 단어를 고르고, 세심하게 문장을 다듬는 과정은 저절로 나를 겸손하게 하고 상대를 배려하게 만든다. 좋은 대화는 오해를 남기거나 상대에게 상처가 되지 않도록 말을 선별하는 일에서 시작한다.
아울러 낯선 언어를 주고받기에 외국어로 대화하기에서는 상대 말에 귀 기울일 수밖에 없다. 영화감독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표현을 빌리면 누구나 '귀로서 거기에 존재'하는 것이다. 대화를 주도하는 사람은 언제나 말하는 이가 아니라 듣는 이다. 경청하는 귀가 없으면 모든 말은 허공에 흩어지는 독백으로 전락하는 까닭이다. 상대의 마음과 생각을 살피면서 조용히 듣고 자주 추임새 넣는 귀가 없을 때 대화는 시들해진다. 고레에다는 "만남도, 발견도, 자기 개혁도, 커뮤니케이션도 듣는 귀로부터 생겨난다"고 이야기한다.
외국어로 말하면 한마디라도 놓칠까 두렵기에 대화에 온 신경을 기울이게 된다. 대화의 기본 자세, "상대를 향해 몸을 약간 숙이고, 상대의 눈을 보고 말하고 듣는"(강원국) 자세가 저절로 연출되는 것이다. 이는 몰입의 행복으로 이어진다. 집중된 관심은 순간에 깊은 의미를 불어넣어 우리 기억 속에 오래도록 머무르게 한다. 느리고 천천히 타자를 배려하며 진행되는 대화는 일상을 충만하게 부풀리고 켜켜이 적층해 삶을 풍요롭게 이끈다. 인생이란 이렇듯 충분히 주의를 기울인 시간을 쌓아서 이루어진다. 주어진 시간은 같아도, 남들보다 더 깊이 사는 방법은 있다. 세심히 말하고 귀 기울여 듣는 대화는 그 출발점이다.
[장은수 편집문화실험실 대표]
[ⓒ 매일경제 & mk.co.kr,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