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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NS ‘가상인물 성착취물’ 판치는데…처벌 못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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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NS ‘가상인물 성착취물’ 판치는데…처벌 못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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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지능을 활용해 ‘가상인물 딥페이크 성착취물’을 만들어 올리고 있는 인스타그램의 한 계정. 인스타그램 갈무리

인공지능을 활용해 ‘가상인물 딥페이크 성착취물’을 만들어 올리고 있는 인스타그램의 한 계정. 인스타그램 갈무리


‘민감 대사 검열 피하면서 조회수 확보. 실제 릴스(인스타그램 쇼트폼 영상)에 사용한 대본 제공’



가상인물로 딥페이크 성착취물을 만들어올리는 인스타그램의 한 계정은 최근 ‘스마트폰 하나로 누구나 10만∼300만 조회수 릴스 만드는 법’이라는 40분짜리 강의를 3만9000원에 판매했다. 남성에게 성적 대사를 하는 속옷 차림의 여성 간호사·승무원·군인·방송기자 등이 등장하는 15∼30초 분량 영상이 많게는 470만 조회수에 달했다. 다른 계정은 수위가 더 높은 음란물을 유료로 판매했다.



최근 인스타그램·틱톡·유튜브 등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가상인물 딥페이크 성착취물’이 제작·유통되고 있지만, 실제 ‘피해자’가 특정되지 않아 현행법으로 처벌이 어렵다.



10일 사회관계망서비스를 살펴보면 특정 직업군을 성상품화하는 영상을 주로 제작하는 계정들이 눈에 띈다. 계정 이름에 인공지능(AI)이 들어가 ‘가상인물 영상’으로 식별되지만 ‘연예인 XXX 닮았다’, ‘진짜 저러는 승무원 있을 듯’과 같은 댓글이 이어져 실존 인물과의 경계는 분명치 않다. 서해용 보건의료노조 성평등위원장은 “해당 영상은 간호사란 직업의 존엄을 파괴한다. 환자의 성희롱·성추행에 시달리는 여성 간호사들이 많은데 현장에서 받는 위협이 더 커질 것”이라고 우려했다.



문제는 당사자가 ‘가상인물’이라면 딥페이크 성착취물이라도 처벌 어렵다는 것이다. 성폭력처벌법은 ‘대상자의 의사에 반해 성적 욕망 또는 수치심을 유발할 수 있는 형태로 영상물 등을 제작한 자’를 처벌한다고 규정한다. 가상인물 성착취물에는 ‘대상자’가 실존하지 않아 ‘반하는 의사’를 가진다고 보기 어렵다. 청소년성보호법은 인물이 아동·청소년으로 인식되면 표현물만으로 처벌하지만, 성인 여성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 정보통신망법에 따른 ‘음란물 유포죄’로 1년 이하 징역 또는 1천만원 이하 벌금을 물리거나 ‘유해 콘텐츠’로 차단하는 방법이 유일하나, 처벌이 가볍다.



실제로 지난 7월 의정부지방법원 고양지원은 텔레그램에서 여성의 나체가 드러난 딥페이크 성범죄물을 유포한 혐의로 기소된 남성에게 “실제 사람의 얼굴에 여성의 나체를 합성했는지, 가상인물에 실제 여성의 나체를 합성했는지 알 수 없어 피해자가 실제 존재한다고 단정하기 어렵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이 판결은 성폭력처벌법 관련 조항을 “동의 또는 반대의 의사를 가진 대상자가 실제 존재하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해석했다. 동시에 법원은 “인공지능의 발달로 실제 사람과 구별하기 어려운 가상인물의 그림을 누구나 쉽게 획득할 수 있게 됐고, 실제 사진과 합성사진의 구별도 어려워진 것이 현실”이라며 고충을 드러냈다.



이경하 변호사(이경하 법률사무소)는 “피해자가 특정되지 않거나 특정하기 어려운 사건에서 피고인들이 ‘가상 인물’이라는 변론 전략을 펼칠 것이 우려된다”고 말했다. 이런 지적이 나오자 허영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지난 9월 ‘실제 인물로 인식될 수 있는 가상 인물’을 성적 욕망 또는 수치심을 유발할 수 있는 형태로 제작·배포·시청한 사람을 처벌하는 성폭력처벌법 개정안을 발의하기도 했다. 다만 입법예고 누리집에는 ‘표현의 자유를 억압한다’는 이유의 반대 의견이 적지 않다. 허 의원은 한겨레에 입법 취지를 “인공지능을 활용한 성적 영상물이 급증하는 이유는 누구나 쉽게 제작할 수 있음에도 현행법상 피해자가 실존 인물이어야 처벌이 가능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허민숙 국회 입법조사처 입법조사관은 “인물의 실존 여부를 떠나 사회적 해악이 처벌 기준이 되어야 한다”며 “실존 인물이 아니라도 처벌할 수 있는 법적 기준이 없다면 다툼이 계속 생기고, 무죄판결도 이어질 것”이라고 우려했다. 이어 “특정 직업군을 성상품화하는 영상의 경우 성에 대한 왜곡된 인식을 심고 사회적 해악을 초래한다”고 덧붙였다. 민고은 변호사(법률사무소 진서)도 “법원은 성폭력범죄의 보호 법익을 피해자의 성적 자기결정권으로 판단하고 있지만, 사회의 성 풍속 측면에서 ‘가상인물 딥페이크 영상’을 어떻게 법으로 보완할지 고민해야 할 시점”이라고 했다.



캐나다 서스캐처원주·브리티시컬럼비아주는 ‘실제 인물 식별 가능 여부와 관계없이’ 딥페이크 성범죄물을 처벌한다. 미국 버지니아주는 딥페이크 피해자를 ‘실제 인물과 유사한 인물’까지 확대했다. 과학기술학 연구자인 백가을 전 디에스오(DSO·디지털성범죄아웃) 팀장은 “역사적으로 이미지 기술의 발전과 보급은 성착취에 악용되어왔고, 향후 관련 규제나 사회적 압력이 없다면 더 심각해질 것으로 보인다”며 “최근 소셜미디어에 올라오는 영상은 사회적 약자인 여성에 대한 ‘증오 콘텐츠’다. 실존하는 여성처럼 보이게 해 특정 직업에 종사하는 여성들의 안전과 존엄을 위협하기에 이를 처벌할 수 있도록 법이 개정돼야 한다”고 말했다.



고나린 기자 m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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