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로 건너뛰기
검색
이데일리 언론사 이미지

"韓 '수조원' 첨단투자 못한다…과감한 금산분리 완화 시급"

이데일리 조민정
원문보기

"韓 '수조원' 첨단투자 못한다…과감한 금산분리 완화 시급"

서울맑음 / -1.0 °
[구시대 금산분리에 첨단산업 발목]
반도체 장비 5000억…데이터센터 건설 60조원
美日 금산분리 유연…자산운용사와 합작 투자
"오래된 규제에 묶여 첨단산업에 전략 투자 못해"
"CVC 완화는 미봉책…GP 등 패러다임 전환 필요"
[이데일리 조민정 기자] “인공지능(AI) 데이터센터든 원전이든 해묵은 ‘금산분리(금융자본과 산업자본 분리)’ 원칙 때문에 한국 기업들이 첨단산업에 투자할 여력이 없다. 우려가 있다면 투자자와의 관계에 제한을 두면 되는데 투자 자체를 막는 건 문제가 있다.” (홍대식 서강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반도체 등 다양한 산업군의 글로벌 기업들이 ‘AI 광폭행보’를 보이고 있지만, 한국 기업들은 그저 막막한 심정이다. 막대한 초기 투자금을 쏟아붓기 위해서는 조 단위 규모의 자금이 필요한데, 보유 현금과 은행 대출로는 이를 충당하기 어려워 투자 단계부터 막히고 있는 탓이다. 민간 기업이 자산운용사와 수조원대 합작투자를 통해 천문학적인 자금을 조달하는 미국과 정 반대의 현실이다. 산업계에서는 첨단산업 전략 투자가 가능하도록 ‘금산분리의 패러다임을 바꿔야 한다’는 목소리가 쏟아지고 있다.

[이데일리 문승용 기자]

[이데일리 문승용 기자]


韓만 엄격…“수조원 첨단 투자 어려워”

9일 산업계에 따르면 첨단 반도체 팹(공장)의 건설 비용은 통상 20조~30조원에 달한다. 과거와 달리 AI 반도체를 생산해야 하기 때문에 선단 공정과 첨단 기술에 따른 투자 규모가 점차 커지는 추세다. 건설 투자금은 순수 건물을 짓는 금액뿐 아니라 반도체 장비 가격까지 포함되는데, 최첨단 장비로 꼽히는 네덜란드 ASML의 ‘하이-뉴메리컬 어퍼처(NA)’ 극자외선(EUV) 장비만 해도 5000억원을 넘는다. 일반 EUV 장비 가격도 대당 2000억원 수준이다. AI 데이터센터 건설의 경우 초대형 프로젝트 기준으로 50조~70조원까지 투입되고 있다.

상황이 이런 데도 한국 기업들은 금산분리로 인해 투자금 마련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 일반지주회사의 기업형 벤처캐피털(CVC) 보유를 허용하는 등 일부 규제를 완화하긴 했지만, 여전히 해외투자와 외부자금 비율 등 각종 규제가 있어서다. 대기업이 직접 펀드를 운용할 수 있는 기업 위탁운용사(GP) 보유도 불가능해 첨단산업에 한해 규제를 풀어줘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미국은 금산분리 제도를 운영하고 있지만 유연하게 적용하고 있고, 일본은 최근 산업 변화 기조에 따라 규제를 대폭 완화하고 있다. 유럽은 엄격한 금산분리 규제 없이 폭넓은 ‘금산 결합’을 인정하고 있다. 주요국들은 기업들이 직접 펀드를 운영하고 자산운용사와 직접 합작투자를 체결하는 등 AI 분야에서 조 단위 투자금을 마련해 이미 멀찍이 달아나고 있다. 미국 스탠퍼드대 인간중심 인공지능연구소(HAI)가 지난 4월 발표한 AI 인덱스 리포트 2025에 따르면 지난해 미국의 AI 민간 투자액은 1090억달러(약 158조원)로 1위를 차지했다. 한국은 13억3000만달러(약 2조원)로 11위에 그쳤다. 미국의 투자액은 한국의 80배에 달했다.

홍대식 교수는 “지금 시대엔 대기업들도 글로벌 경쟁력을 갖춰야 하기 때문에 스스로 집중해서 유망한 분야에 투자를 많이 하려고 한다”며 “(금산분리와 같은) 오래된 규제에 묶여서 첨단산업에 과감한 전략 투자를 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라고 설명했다. 최준선 성균관대 법학전문대학원 명예교수는 “산업 간 경계가 모호해지는 ‘빅블러’ 시대에 시대착오적인 정책”이라며 “회사마다 이사회가 있고 투자 정책도 있고, 금융감독원의 엄격한 감시 역시 있어서 과거와 상황이 다르다”고 말했다.


네이버의 첫 번째 자체 데이터센터인 ‘각 춘천’의 남관 서버실.(사진=네이버클라우드)

네이버의 첫 번째 자체 데이터센터인 ‘각 춘천’의 남관 서버실.(사진=네이버클라우드)


“특별법보단 사후 규제…GP 허용 필요”

정부는 특별법 방식으로 AI, 반도체, 바이오 등 첨단산업에 한해 금산분리 규제를 완화하는 방안을 관계 부처와 논의하고 있다. 이에 산업계는 사후 규제 등 현 제도를 활용한 유연한 제도가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홍기용 인천대 경영학과 교수는 “특별법 내용이 너무 파격적이면 동의하기 쉽지 않을 수 있고, 추후 발생할 수 있는 파생적인 문제점들을 파악하기 어렵게 특별법 내용을 담는 경향이 많다”며 “굳이 특별법을 또 만들기보단 기존 틀에서 확장하는 방법이 부작용이 작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규제 완화 또한 CVC 논의를 넘어 첨단산업의 GP 규제를 풀어주는 과감한 규제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홍대식 교수는 “미국 구글이나 일본 소프트뱅크가 큰 규모의 투자를 하는 건 스스로 투자자를 모으는 주체가 될 수 있기 때문”이라며 “CVC 투자 규모를 열어주는 건 몇십억 단위 투자가 100억 정도로 올라가는 건데 지금은 조 단위 투자가 시작”이라고 말했다.

미국 메타의 경우 지난달 사모펀드 블루아울 캐피털과 초대형 데이터센터 개발을 위해 270억달러(약 38조원) 규모로 합작투자를 체결했다. 마이크로소프트(MS)는 지난해 9월 세계 최대 자산운용사 블랙록과 300억달러(약 44조원) 규모의 AI 인프라 펀드(AIP) 설립했다. 올해 초엔 엔비디아와 일론 머스크의 AI 기업 ‘xAI’도 AIP에 합류하며 투자금이 불어나고 있다. 반도체 기업 인텔은 경영난 속 자산운용사 아폴로와 51:49 합작투자로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공장을 설립하기로 하며 자금 마련에 성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