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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룸에서] 관성 깬 '실용 외교'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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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룸에서] 관성 깬 '실용 외교'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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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중국 수출 5.9%↑ 수입 1.9%↑…무역총액 4.3%↑
李 '원자력 추진 잠수함' 공개 요구
숙원 사업을 협상 돌파구 삼아 성과
中·北엔 더 치밀하고 역동적 외교를


이재명 대통령이 지난달 29일 한미 정상회담이 열린 경주국립박물관에 도착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맞이하고 있다. 대통령실 제공

이재명 대통령이 지난달 29일 한미 정상회담이 열린 경주국립박물관에 도착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맞이하고 있다. 대통령실 제공


경주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에서 하이라이트는 미중 정상회담이나 북미 정상회담 성사 여부가 아니었다. 6년 만에 이뤄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만남은 예상대로 양국 간 휴전으로 마무리됐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을 향한 트럼프 대통령의 러브콜은 메아리 없는 외침이 되고 말았다. 적어도 한국 입장에선 지난달 29일 한미 정상회담에서 이재명 대통령이 트럼프 대통령에게 한국의 원자력 추진 잠수함 보유 필요성을 설득하는 장면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이 대통령은 디젤 잠수함으로는 북한과 중국의 잠수함을 추적하는 데 한계가 있다는 설명과 함께 "원잠 연료를 공급받을 수 있게 해달라"고 했다. 주변국이 민감할 수밖에 없는 안보 사안을 공개 석상에서 밝힌 것은 이례적이었고, 이를 이튿날 트럼프 대통령이 전격 수용한 것은 예상 밖이었다. 여당뿐 아니라 보수 진영에서 자주국방을 환영하는 목소리와 일부 진보 진영에서 군비경쟁 가속화에 대한 우려가 동시에 나온 것은 그만큼 논쟁적 사안이라는 방증이다.

한국이 원잠 시대를 열기까지 넘어야 할 산은 많다. 당장 트럼프 대통령은 한국의 요청을 승인하면서 '미국 필리조선소 건조'를 언급한 반면, 대통령실은 잠수함 동체와 원자로를 국내에서 만들고 연료만 미국에서 제공받겠다는 방침을 분명히 했다. 한미 조인트 팩트시트에 담길 문구에 따라 지난한 협의를 다시 거쳐야 할 수 있다. 한미 동맹이 새 국면에 접어들었다는 평가도 있지만, 호들갑 떨 일은 아니다. 지난 30년간 한국의 숙원인 원잠 도입에 부정적이었던 미국 입장을 감안하면 트럼프 대통령의 승인이 언제까지 유효할지 모른다. 유지된다 해도 상응하는 한국의 군사적 역할을 원할 것이기 때문이다.

눈여겨볼 대목은 이 대통령의 관성을 깬 외교이다. 일견 무모해 보였던 원잠 공개 요청은 역설적으로 트럼프 행정부의 무리한 대미투자 요구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 대통령 입장에선 미국에 내줘야 할 게 있다면 안보 등 분야에서 반드시 얻어내야 할 것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한미 정상회담 후 이 대통령은 참모진에게 "국력을 더 키워야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협상이 녹록지 않았다는 뜻이다.

한국전쟁 이후 한국이 국력을 쌓는 데는 미국의 역할이 작지 않았다. 이와 동시에 한국에선 미국의 안보적 지원은 당연하다는 타성에 젖은 인식은 점점 굳어졌다. 중국이 미국의 라이벌로 급부상한 사실도 '미국이 전략적으로 한국을 버릴 수 없을 것'이란 인식에 영향을 주고 있다. 하지만 75년 전과 비할 수 없을 만큼 한국의 위상은 성장했다. 세계 질서 유지를 위한 미국의 개입주의는 미국 우선주의로 급속히 기울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 이후에도 한반도에서 미국의 적극적 역할을 기대하기 어렵게 만드는 요인들이다.

한국이 동맹과 이념에 기반한 경직된 외교로 복잡다단해진 국제 환경 속에 한반도 평화를 구축하는 데는 한계가 따를 수밖에 없다. 대통령실은 원잠 추진과 관련해 "중국을 설득했다"지만, 미국의 지원을 받아 한국이 원잠을 건조하고 운용할 경우 대중국, 대북 관계에 미칠 수 있는 영향들을 면밀하게 살펴봐야 한다. '국익 중심' 실용외교란 미중 사이에 균형을 잡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을 것이다. 미국을 상대할 때보다 더 치밀하고 틀에 얽매이지 않은 외교가 필요할 때다.

김회경 정치부장 hermes@hankook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