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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인노예 폐지에 목숨 건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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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인노예 폐지에 목숨 건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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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역사다] 일라이자 러브조이 (1802~1837)



개신교 목사이자 지역 언론인이었다. 미국 미주리주 세인트루이스에는 가톨릭 신자가 많이 살았는데, 러브조이는 1830년대 초에 이 지역에서 활동하며 가톨릭 교리를 조목조목 비판했다. 이 역할에 머물렀다면, 러브조이는 종교적 관용을 모르는 원리주의 종교인으로 남았을지 모른다.



어느 날부턴가 러브조이는 미국의 노예제도를 비판했다. 그때 미국 남부의 백인은 흑인의 노예 노동으로 먹고살던 상황이라, 미국 사회는 노예제도를 건드리는 목소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언론의 자유라는 개념이 있었지만, 노예제도를 비판하는 글을 쓰면 백인 폭도에게 린치를 당하기도 했다. 적당히를 모르는 고집불통 러브조이가 이 싸움에 뛰어들었다.



자유 흑인 프랜시스 매킨토시는 노예 신분이 아니었는데, 1836년에 세인트루이스의 백인 군중이 이 사람을 붙잡아 산 채로 불태웠다. 러브조이는 미국의 백인우월주의를 비판했다(판사가 가톨릭 신자라서 공정하지 않다는 균형 잃은 공격도 했다). 이 일로 성이 난 백인 폭도가 신문사를 습격해 인쇄기를 강물에 내던졌다. 첫번째 테러.



러브조이는 이웃한 일리노이주 올턴으로 거점을 옮겼다. 이곳에 와서도 끈질기게 노예제도 폐지를 주장하자, 남부 백인의 눈치를 보던 올턴 백인들은 곧 러브조이를 미워했다. 일리노이주는 노예제도에 찬성하는 주가 아니었는데도 그랬다. 백인들은 러브조이의 신문사를 습격했고, 여러차례 인쇄기를 때려 부쉈다.



1837년 11월7일 이날도 폭도가 밀어닥쳤다. 러브조이는 인쇄기를 지키느라 싸웠다. 그러다가 총격전이 일어나 러브조이가 죽었다. 타협을 모르는 백인 목사가 흑인의 권리와 언론 자유를 위해 자기 목숨을 내놓은 것이다. 남북전쟁을 앞두고 노예제도 폐지론자들은 러브조이를 기렸다. 과격한 노예제도 폐지론자 백인 존 브라운이 목숨을 걸기로 마음을 다진 것도, 러브조이의 죽음을 전해 듣고라는 이야기가 있다(옛날 ‘나는 역사다’ 칼럼에서 다룬 적 있는 문제적 인물이다). 오늘날 미국 사회에서 러브조이는 언론의 자유를 지키던 투사로 기억된다.



김태권 만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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