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국의 관세를 무기로 한 제1차 무역전쟁은 경주에서 사실상 끝이 났다. 미국은 최종 목표인 중국과 희토류 문제를 포함한 합의에 성공했고, 마지막까지 버텨 좋은 결과를 얻어낸 가장 거친 무역 상대였던 한국과도 무역협상에 합의했다.
# 하지만 유럽은 미국의 성장동력인 서비스를 걸고넘어졌다. 프랑스는 미국의 서비스 무역 흑자를 주도하는 구글·애플·페이스북·아마존·마이크로소프트를 정조준한 디지털세 증세에 나섰다. 이탈리아도 디지털세 부과 범위를 크게 넓혔다. 제2차 무역전쟁은 상품이 아닌 서비스에서 시작될까.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 6월 27일(현지시간) 영국 스코틀랜드 턴베리에서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 위원장과 EU에 대한 상호관세 및 자동차 관세를 15%로 낮추기로 한 무역 협상에 합의한 후 악수하고 있다. [사진 | 뉴시스] |
미국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취임 이후 전세계를 상대로 벌여온 제1차 무역전쟁이 10월 마지막주 우리나라 경주에서 사실상 종결됐다. 지난 1일 폐막한 경주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에서 미국이 한국·중국과 무역협상에 합의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프랑스의 움직임이 미국과 전세계의 제2차 무역전쟁을 불러올 가능성이 높아졌다. 미국이 아시아 무역협상을 마무리하느라 분주했던 지난 10월 28일(현지시간), 프랑스 의회가 디지털서비스 세금 세율을 2026년 1월부터 기존 3%에서 6%로 인상하는 내용의 세법 개정안을 통과시켰기 때문이다.
디지털서비스세稅(DST·Digital Service Tax)는 유럽연합(EU) 소속 국가들이 2020년 1월 1일부터 부과하고 있는 세금이다. 소비자는 크게 보면 3가지에 돈을 쓴다. 1년 이상 오래 쓸 수 있는 자동차와 같은 내구재, 1년 이내 소비하는 쌀과 같은 비내구재, 그리고 의료나 운송처럼 실체가 없는 서비스다.
물리적 형태가 없지만 돈을 주고 구매하는 구글의 유튜브 프리미엄, 케이팝 데몬 헌터(케데헌) 등 영화가 대표적인 서비스고, 이 서비스 매출의 일정 비율에 부과하는 게 디지털서비스 세금이다.
그런데 왜 프랑스의 디지털세 인상이 미국과의 제2차 무역전쟁을 예고하는 걸까. 디지털세 과세 대상 기업은 연간 글로벌 총매출이 7억5000만 유로를 넘고, 해당 국가에서 5000만 유로 이상 매출을 올리는 곳들이기 때문이다. 정확하게 미국의 빅테크 기업들을 정조준하고 있다.
프랑스에서는 디지털세를 GAFAM 세금으로 부를 정도다. 구글(G), 애플(A), 페이스북(F), 아마존(A), 마이크로소프트(M)에만 적용하는 특별한 세금이라는 뜻이다. 프랑스는 지난해 미국 5개 빅테크로부터 디지털세 7억5600만 유로(약 1조2439억원)를 징수했다.
영국은 올해 들어서만 디지털세로 10억3200만 유로(약 1조6981억원)를 미국 빅테크로부터 거둬들였다. 디지털세는 이익이 아닌 매출에 과세하는 세금이라서 피할 길이 없다.
미국 빅테크의 세금 회피 기술은 우리나라 사례를 보면 이해하기 쉽다. 구글이 운영하는 유튜브의 프리미엄 구독자는 지난해 전세계 기준으로 1억명을 넘어섰다. 국내에는 월 구독료로 1만4900원을 내는 유료 구독자가 600만명이 넘는 것으로 추산된다. 할인을 고려하지 않으면, 구글은 유튜브 프리미엄 매출로만 매년 1조728억원을 올리고 있다는 얘기다.
구글은 유튜브에서만 구독료보다 훨씬 많은 광고 매출을 올린다. 검색 광고, 플레이스토어, 클라우드 서비스까지 합치면 천문학적인 매출이다. 하지만 항구나 공항의 세관을 통과하지 않는 무형의 서비스라는 특징은 세금 회피에 최적화돼 있다.
[자료 | 미국 조세재단, 사진 | 게티이미지뱅크] |
전성민 가천대 교수가 추산한 구글코리아 매출은 최대 11조3020억원이다. 법인세율을 네이버 수준인 5.9%에 맞춘다고 해도 구글이 실제로 납부했어야 하는 법인세는 6762억원 수준이다.
하지만 구글코리아가 지난해 우리 정부에 신고한 매출은 3869억원이고, 법인세로 172억원을 납부했다. 우리가 구글, 애플, 페이스북, 아마존의 국내 매출에 3% 정도의 디지털세를 부과한다면, 영국과 프랑스의 중간쯤인 1조5000억원 수준의 세금을 더 걷을 수 있다.
프랑스의 디지털세 증세는 두가지 측면에서 봐야 한다. 첫째, 미국과의 과세 주도권 경쟁이다. 미국은 EU 등을 압박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심으로 올해부터 본격적으로 시행하는 글로벌 최저한세를 무력화했다.
글로벌 최저한세는 다국적기업의 실효세율이 최저 15%가 되지 않으면, 모기업이 그만큼의 차액을 소재지가 등록된 나라에 납부해야 하는 내용이다. EU는 미국과 무역협상 타결 때문에 이 압박에 굴복했지만, 프랑스는 디지털세 세율을 두배로 올리면서 서비스 공정 무역 문제를 제기했다.
둘째, 디지털세 증세는 프랑스가 추진하던 부유세가 좌초한 결과이기도 하다. 프랑스 국가부채 비율은 올해 2분기 기준 국내총생산(GDP)의 115.6%를 넘어섰다. 신용평가사 피치는 지난 9월 프랑스의 국가신용등급을 하향 조정했다.
프랑스 국민들의 반발로 긴축에도 실패했다. 프랑스 정부는 순자산이 1억 유로(약 1645억원) 이상인 부유층 1800가구를 대상으로 실효세율이 순자산의 2%를 넘지 않으면 추가로 세금을 더 내야 하는 부유세 신설을 추진했다.
OECD 초부자세의 기초를 만든 경제학자 가브리엘 주크만의 이론을 따랐다. 여러 여론조사 결과가 80~90% 이상 찬성이었다. 하지만 어느 나라에서나 국회의원들은 민심과 상관없이 자신들의 이익을 좇는다. 프랑스 하원 의원들은 지난 10월 31일 거의 만장일치에 가까운 여론을 업은 부유세를 부결시켰다. 그 대신 디지털세 세율을 두배로 높였다.
이에 따른 미국의 반발은 빅테크 기업들이 소속된 컴퓨터·통신산업협회(CCIA)로부터 나왔다. CCIA는 10월 28일 프랑스의 디지털세 개정안이 통과되자 "미국 기업을 겨냥한 조치"라며 즉시 성명을 냈다. 협회는 개정안에 미국과의 무역전쟁으로 번질 수 있는 표현이 들어있는 데 주목했다. "개정안에 '미국이 부과한 관세에 대한 대응'이라거나 '디지털 주권'이라는 표현이 언급됐다. 이는 미국의 경쟁력을 저해하고, 미국의 세수 기반을 약화하려는 조치다."
미국과의 제2차 서비스 무역전쟁은 프랑스만의 도발이 아니다. 이탈리아도 지난 10월 23일 2025년 예산에서 디지털세의 두 가지 조건 중 하나인 '국내 매출 550만 유로 이상' 부분을 폐지하는 방식으로 디지털세 부과 범위를 넓혔다. 글로벌 매출이 7억5000만 유로를 넘으면, 이탈리아의 매출을 고려하지 않고 어느 빅테크 기업이든 매출에 3%의 세율로 디지털세를 과세하겠다는 얘기다.
프랑스가 디지털세 개정에서 글로벌 매출 7억5000만 유로를 20억 유로로 상향 조정해 미국 GAFAM 기업을 정조준 한 것과는 대조적이지만, 미국 빅테크 기업들로부터 더 많은 세금을 걷겠다는 목표는 동일하다.
지금까지 미국의 관세 압박은 상품과 같은 '사물의 경제'에 국한돼 있었다. 하지만 미국이 비교우위를 지닌 무형의 상품인 지식 등 '사고의 경제'가 다음 무역전쟁의 격전지가 될 수 있다. 한국은 제2차 무역전쟁 전선에 얼마나 가까울까. 한국의 서비스 무역과 미국의 압박은 '사물의 경제에서 사고의 경제로' 2편에서 자세히 다룬다.
한정연 더스쿠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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