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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대치동 ‘표치동’에 몰려드는 외지인…밀려나는 현지 학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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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대치동 ‘표치동’에 몰려드는 외지인…밀려나는 현지 학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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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선고 누리집 갈무리

표선고 누리집 갈무리


“표선고를 너무 가고 싶은데, 포기했어요. 세화고에 가려고요.”



제주 서귀포시 표선면에 있는 표선중에 다니는 3학년 선우(가명·15살)는 2일 전화 통화에서 3년 동안 간절히 원하던 표선고 입학을 최근에 단념했다고 했다. “지금 성적으론 입학이 힘들고, 들어가더라도 우수한 친구들과 경쟁할 자신이 없다”고 판단했단다.



해마다 입학생이 정원을 밑돌던 ‘제주시외(읍·면 지역) 일반고’인 표선고의 인기가 치솟은 건 불과 3년 전부터다. 표선고는 2022년 ‘국제 바칼로레아’(IB: 스위스 비영리 교육재단이 운영하는 국제 공인 교육프로그램) 고교과정을 운영하면서부터 ‘전국구 학교’로 떠올랐다. 국제고·국제학교가 아닌 공립 일반고의 모든 학급이 아이비(IB)를 도입한 건 표선고가 전국 최초다. 제주에선 아이비를 운영하는 ‘제주형 자율학교’로 11개 초등학교와 5개 중학교가 지정됐지만, 고등학교는 표선고가 유일하다.



토론과 탐구 중심의 수업을 받는 표선고 학생들이 수시모집 학생부종합전형을 통해 이른바 ‘스카이’(서울대·고려대·연세대)에도 들어갔다는 입소문은 삽시간에 퍼졌다. 제주시내와 육지에서 학생들이 표선고 입학을 목표로 같은 지역 아이비 학교인 표선초·중으로 몰려들었다. 선우는 “우리 반 24명 중 표선 친구는 절반이 안 된다”고 했다.



실제 늘 정원 미달이던 표선고의 신입생 입학 경쟁률은 2024학년도에 ‘1.12 대 1’로 뛰어오르더니, 2025학년도엔 ‘1.39 대 1’을 기록했다. 덩달아 중학교 내신 석차 백분율을 기준으로 하는 합격선은 같은 기간 약 79%에서 약 49%로 크게 올랐다. 한 학교 학생이 100명이라면 49등 안에 들어야 입학할 수 있다는 뜻이다. 학업 성적이 좋은 학생들이 주로 진학하는 ‘제주시내 일반고’의 합격선(약 67%)보다 높다.



서귀포시 표선면 표선리에 있는 표선고. 제주도교육청 유튜브 갈무리

서귀포시 표선면 표선리에 있는 표선고. 제주도교육청 유튜브 갈무리


결국 높은 입학 문턱을 넘지 못하는 표선 지역 학생들은 집에서 버스로 1시간 넘는 거리에 있는 고교에 진학해야 하는 상황에 내몰렸다. 읍면 지역의 교육 격차를 줄이고 학교 소멸에 대응하려는 목적으로 도입된 아이비 학교가 지역 학생을 지역 밖으로 내모는 꼴이다. 선우는 “올해 합격선이 30%까지 올라, 반에서 7등까지만 표선고에 간다는 말도 나온다”며 “12월에 원서 낼 때 버스 타고 1시간30분 가야 하는 세화고를 쓸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시험을 잘 치는 학생이 아니라 창의적·비판적 사고력을 가진 평생학습자를 길러내겠다는 아이비 학교가 오히려 사교육을 부추긴다는 비판도 나온다. 표선중 학생은 표선고에, 표선고 학생은 명문대에 가기 위한 사교육이 성행하는 표선에선 ‘표치동’(표선의 대치동)이라는 우스개도 나오는 상황이다. 표선중 학부모 ㄱ씨는 “시골 학교이던 표선고가 지금은 외지 학생이 몇년 다니다가 좋은 대학에 합격하면 떠나버리는 학원 같은 곳이 돼 버렸다”고 지적했다.



학부모들은 원하는 학생 누구나 제대로 된 아이비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길을 열어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학부모 ㄴ씨는 “아이비 학교는 교사들이 교과서로 수업하지 않고, 학생을 주체로 만드는 수업을 해서 아이가 즐거워한다”며 “아이비 고교가 한두 곳은 더 필요하다”고 했다.



제주도교육청 관계자는 “아이비 학교가 되겠다고 신청한 고등학교가 아직은 없다”며 “내년엔 표선고 신입생 정원을 125명에서 150명으로 늘릴 계획”이라고 밝혔다.



서보미 기자 spri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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