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부고니아’. 씨제이이엔엠(CJ ENM) 제공 |
한국 영화 ‘시월애’ ‘엽기적인 그녀’ ‘올드보이’의 공통점은 할리우드에서 리메이크됐다는 것, 그리고 리메이크작이 원작만큼 좋은 평가를 받진 못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5일 개봉하는 ‘지구를 지켜라!’의 리메이크작 ‘부고니아’는 어떨까? 지금 할리우드에서 가장 중요한 감독 중 하나인 요르고스 란티모스가 연출한 ‘부고니아’는 올해 베네치아국제영화제 경쟁 부문에 진출했고, 내년 3월 아카데미 시상식에도 주요 부문 후보에 올라갈 것으로 점쳐진다. 그러니 앞선 사례를 따르지 않을까 하는 염려는 넣어둬도 좋다.
영화 ‘지구를 지켜라!’. 싸이더스 제공 |
‘부고니아’는 원작과 20년 넘는 시차가 있는데다 미국 외곽 도시로 배경을 옮겼음에도 원작의 내용을 충실히 따라간다. 머리카락으로 외계인과 교신한다는 설정이나 경찰이 찾아왔을 때 모니터를 통해 납치가 발각될 위기에 처하는 등의 디테일까지 ‘지구를 지켜라!’와 매우 흡사한 이야기를 전개한다. 원작이 2003년 개봉 때는 흥행에 참패했지만, 얼마나 새롭고 뛰어난 이야기였는지 새삼 증명하는 리메이크작인 셈이다. 한국 영화 사랑으로 유명한, ‘유전’ ‘미드소마’의 아리 애스터 감독이 리메이크를 기획했고, 에미상을 석권한 미국 드라마 ‘석세션’의 작가 윌 트레이시가 각본을 썼다. 국내 기업 씨제이이엔엠(CJ ENM)이 제작했다.
영화 ‘부고니아’. 씨제이이엔엠(CJ ENM) 제공 |
원작에서 가장 달라진 건 캐릭터다. 원작에서 백윤식이 연기했던 악덕 기업가 만식은 에마 스톤이 연기하는 바이오기업 최고 책임자 미셸로 성별이 바뀌었다. 성별만 바뀐 게 아니다. 두 캐릭터의 차이는 두 작품이 보여주는 시대상과 주제 의식의 변화까지 담고 있다.
외계인의 존재를 굳게 믿는 테디(제시 플레먼스)는 함께 사는 사촌 동생 돈(에이든 델비스)과 함께 미셸을 납치한다. 미셸이 자신의 엄마를 식물인간으로 만든 원흉이며 지구를 멸망시키려는 외계인이라 굳게 믿기 때문이다.
영화 ‘지구를 지켜라!’. 싸이더스 제공 |
원작의 만식이 주가 조작, 노조 탄압 교사, 여성 배우와의 불륜 스캔들로 신문 지면을 장식하는 부패하고 무능한 기업인이라면, 미셸은 실리콘밸리에서 만날 법한 젊고 유능하며 자신만만한 기업인이다. 영화 초반 미셸이 집에서 개인 트레이너와 운동할 때 과하게 공격적인 모습은, 무능하고 권력에 취해 있는 과거의 기업가들보다 일론 머스크처럼 훨씬 더 공격적으로 세상을 지배하려는 현재 기업가들을 반영한 것이다. 테디는 미셸의 기업에서 포장 작업을 하는, 피라미드의 가장 아래에 있는 존재다. 그는 원작의 병구(신하균)처럼 양봉 일도 하는데, 이는 미셸의 회사에서 만드는 살충제와 직접 연결된다. 테디는 벌이 사라지는 ‘군집 붕괴 현상’(CCD)이 이 기업의 살충제 때문이고, 이것은 외계인이 벌뿐 아니라 인간 사회의 군집 붕괴, 즉 멸망까지 유도하기 위한 음모라고 굳게 믿는다.
영화 ‘부고니아’. 씨제이이엔엠(CJ ENM) 제공 |
‘지구를 지켜라!’가 기업과 권력이라는 당면 현실의 타락을 풍자하는 데 비해 ‘부고니아’는 인류 문명의 필연적 오염과 부패를 겨냥한다. 지구에서 전쟁을 단 한순간도 중단해본 적 없는 인간의 공격성, 자연을 도구로만 이용하면서 초래하는 황폐화 등이 절멸의 숙명으로 갈 수밖에 없다는 묵시록적 메시지다. 제목 ‘부고니아’도 소의 주검에서 벌이 생겨난다고 여긴 고대의 잘못된 믿음, 또는 벌을 얻기 위한 의식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한다.
영화의 분위기 또한 비(B)급 유머와 키치적 미장센으로 가득한 원작보다 무겁고 우아하다. 장중하면서도 불길한 기운으로 가득한 음악과 임상시험의 희생자가 된 테디 엄마(얼리샤 실버스톤)가 나오는 장면의 환상적이면서 시적인 연출에서 란티모스의 작가적 매력이 발휘된다. 원작의 비급 정서와 기괴한 유머를 좋아했던 팬이라면 평가가 엇갈릴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부고니아’는 주제가 인물들의 대사를 통해 직설적으로 전달되고, 파멸의 결과를 길게 나열해 보여준다는 점에서 다소 장황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김은형 선임기자 dmsgu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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