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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 19세 청년 살인범 몰아가려 강제추행 누명 씌워 구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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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 19세 청년 살인범 몰아가려 강제추행 누명 씌워 구속

속보
李대통령 "이혜훈, 차이 조율 과정 필요…국민 검증 통과해야"
친형이 재심 청구해 35년 만에 무죄 선고
법원 "강압 수사 따른 자백에 신빙성 없어"
경찰 가혹행위 불법구금… 26세 세상 떠나
"경찰 별건수사 문제 적나라하게 드러나"
유족 "이제 하늘서 떳떳하게, 홀가분하길"


고 윤동일씨 강제추행치상 사건 재심 선고가 열린 30일 수원지법 앞에서 동생의 무죄 선고를 받아낸 친형 윤동기(가운데)씨가 꽃다발을 든 채 취재진 질문에 답하고 있다. 윤씨는 화성연쇄살인 9차 사건 용의자로 지목돼 별도 사건인 강제추행 사건으로 구속돼 강압 수사를 받았다. 뉴시스

고 윤동일씨 강제추행치상 사건 재심 선고가 열린 30일 수원지법 앞에서 동생의 무죄 선고를 받아낸 친형 윤동기(가운데)씨가 꽃다발을 든 채 취재진 질문에 답하고 있다. 윤씨는 화성연쇄살인 9차 사건 용의자로 지목돼 별도 사건인 강제추행 사건으로 구속돼 강압 수사를 받았다. 뉴시스


"무죄를 선고합니다."

30일 오후 2시 수원지법 301호 법정. 담담한 표정으로 동생 대신 피고인석에 앉은 윤동기(61)씨는 재판장의 주문을 듣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고등학교 3년 내내 모범생 소리를 듣던 동생이 열아홉 나이에 느닷없이 뒤집어쓴 강제추행 혐의를 벗는 순간이었다. 경찰에 연행된 뒤 불법 구금과 구타 등으로 고초를 겪다 세상을 떠난 동생은 35년 만에 명예를 되찾았다. 이날 재판은 경찰의 공권력 남용 사건의 의미를 되짚을 틈도 없이 3분 만에 끝났다.

수원지법 형사합의15부(부장 정윤섭)는 강제추행치상 혐의로 유죄가 확정됐던 고(故) 윤동일씨의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유죄의 핵심 증거로 쓰인 고인의 자백 진술과 피해자의 진술조서는 증거 능력이 없다고 밝혔다. 불법 감금과 강압 수사로 나온 윤씨의 자백 진술은 신빙성이 없고, 경찰이 왜곡한 피해자의 진술조서는 재심 법정에 나온 피해자 진술과 어긋나 증거로 쓰일 수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공소사실을 입증할 증거가 없게 돼 범죄사실의 증명이 없는 경우에 해당한다"며 무죄 근거를 밝혔다. 재판장은 윤동기씨에게 "많이 늦었지만 피고인의 명예를 회복하고 유족에게 조금이나마 위로가 되길 바란다"고 전했다.

그래픽=박종범 기자

그래픽=박종범 기자


윤동일씨는 1990년 11월 9일 경기 화성군 태안읍 소재 진안3리 마을에서 앞서 걸어가던 정모(당시 21세)씨를 뒤따라가 강제로 추행하고 밀쳐 넘어뜨린 혐의를 받았다. 11월 15일 화성 연쇄살인 9차 사건이 발생하자, 경찰은 윤씨를 용의자로 지목해 강간살인 혐의로 수사하려고 전혀 다른 사건에 윤씨를 엮어 연행한 뒤 불법 구금하고 구속했다. 잠을 안 재우며 자백을 강요하고, 포대를 씌워 때리는 등 가혹행위를 일삼았다.

윤씨는 9차 사건 피해자의 교복에서 채취된 체액과 윤씨의 혈액 감정 결과가 일치하지 않는 걸로 나오면서 살인 혐의를 벗었다. 그럼에도 경찰은 별건 수사로 1991년 1월 윤씨에게 강제추행치상죄를 씌워 법정에 세웠다. 그해 4월 1심에서 윤씨는 징역 2년 6개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두 차례 상소했지만 경찰이 만든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1992년 2월 유죄가 확정됐다.

윤씨는 이 사건으로 4개월 옥살이를 하다 집행유예로 석방된 지 10개월 만에 암 판정을 받았다. 수년간 투병하던 윤씨는 1997년 9월 만 26세로 세상을 떠났다.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는 2022년 12월 윤씨에 대한 경찰의 불법 체포와 가혹행위, 자백 강요, 증거 조작 및 은폐 등 갖은 불법 행위가 있었다고 밝혔다.

화성 9차 살인의 진범은 연쇄 살인범 이춘재로 2019년 밝혀졌다. 경찰이 장기 미제 사건을 다시 들여다보며 9차 사건 유류품에서 나온 유전자(DNA) 감정을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 의뢰한 결과, 처제를 살해해 부산교도소에 복역하던 이춘재의 DNA와 일치한다는 결과가 나왔다.

윤동기씨는 이날 동생의 무죄 선고 직후 꽃다발을 한 아름 안고 변호인단이 준비한 '무죄, 고 윤동일의 명예를 되찾다!'는 현수막 뒤에 섰다. 동기씨는 "무죄가 났으니 동생도 이제 떳떳한 마음일 거고, 홀가분할 거라 생각한다"고 기뻐했다. 가족이 없는 동기씨 곁은 화성 8차 살인사건 용의자로 몰려 20년 옥고를 치르고 5년 전 같은 법원에서 재심 무죄 판결을 받은 윤성여씨가 지켰다. 윤성여씨는 "동네 후배인 고인이 하늘에서 기뻐할 것"이라고 말했다. 낙동강 살인사건으로 21년 넘게 복역하다 재심에서 누명을 벗은 장동익씨도 자리를 지켰다.

윤동일씨의 재심 변론을 맡은 박준영 변호사는 "이 사건은 본건 수사를 위한 별건 수사의 문제를 적나라하게 보여줬다"며 "공권력이 실적을 앞세워 약자와 인권을 침해하는 일은 다양한 방식으로 얼마든지 벌어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박 변호사는 화성 연쇄살인 사건과 관련한 강압 수사 피해자가 20여 명에 달한다면서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 등) 권리 행사를 안 하시는 분들이 많은데 부디 꼭 하시면 좋겠다"고 당부했다.







손현성 기자 hshs@hankook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