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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 헌법 제1조 1항, 조세부담 합의 때 지속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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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 헌법 제1조 1항, 조세부담 합의 때 지속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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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겨울의 정치적 격변(계엄 논란과 탄핵 정국)을 거치며 우리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는 대한민국 헌법 제1조 1항이 단순한 구호가 아니라 현실 제도임을 다시 확인했다. 민주공화국의 틀이 흔들릴 때 경제와 사회가 어떤 대가를 치르는지, 우리 모두 경험하고 있다. 동시에 민주적으로 선출된 권력이 독재로 기울 수 있음을 보며 민주주의의 위기를 실감하고 있다. 이제 우리는 “민주정과 공화정이 결합된 민주공화제의 의미는 무엇인가, 그리고 그 경제적 함의는 무엇인가”라는 근원적 질문을 던질 때다.



민주주의의 기원은 고대 그리스의 아테네다. 플라톤은 ‘국가’에서 민주정이 인기에 영합해 공동체의 장기적 이익을 해칠 수 있다고 경고했다. 평등이 능력과 책임을 무시할 때, 대중의 욕망이 절제를 대신할 때 민주정은 중우정으로 변질된다는 것이다. 윈스턴 처칠이 “민주주의는 지금껏 시도된 다른 모든 형태를 제외하고, 가장 나쁜 형태의 정부”고 말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민주제는 완전무결함을 전제로 하지 않는다. 서로 다른 의견이 공존하고, 각자의 오류를 인정하며, 다수결은 토론과 설득의 마지막 단계일 뿐이라는 인식이 민주정의 핵심이다.



사회적 후생이론으로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케네스 애로우의 ‘불가능성 정리’는 민주적 의사결정이 언제나 모순을 내포함을 보여준다. 그는 “모든 선호를 일관되게 반영할 수 있는 제도는 독재밖에 없다”는 역설로, 처칠의 말을 경제학적으로 증명했다. 민주사회와 시장경제 모두 완벽하지 않음을 인정하고, 피해를 최소화하면서 제도를 점진적으로 개선해 나가야 한다는 교훈을 준다. 하나의 규칙으로 모든 가치를 충족시킬 수 없다는 점에서, 경제정책 역시 단일 해법보다 가치 간 균형을 고민해야 하고 차선을 받아들이는 것 또한 요구되는 것이다.



그러나 시장이 완전하지 않다고 하더라도 정부 개입 또한 만능이 아니다. 부패와 비효율, 정치적 제약, 과잉 규제 등으로 인해 정부 실패(government failure)가 발생하기도 한다. 정부가 민간보다 언제나 유능하다고 믿는 것은 오만이다. 잘못된 개입은 의도와 달리 사회적 비용만 키울 수 있다. 가격 통제는 암시장을 낳고, 보조금은 특정 산업의 경쟁력을 약화시켰다. 관료제 역시 이해관계와 관성에서 자유롭지 않기 때문에 항상 옳은 결정을 내리는 것은 아니다. 정치인과 관료도 자신과 집단의 이익을 추구하기 마련이며, 이를 제어하지 않으면 규모만 크고 비효율적인 관료제가 될 위험이 초래된다. 규제 포획이나 예산 낭비, 정실주의 등이 그것이다.



민주주의도, 시장도, 정부도 인간의 불완전성을 그대로 안고 가는 장치임을 인식하고 “현존하는 제도들 중에서는 최선을 찾고 꾸준히 개선해나갈 수 있다”는 낙관적 현실주의를 통해 지속적인 개선이 요구된다. 시장도 정부도 스스로 오만에 빠지지 않도록 견제하며, 항상 더 나은 균형점을 찾는 노력하면서 불완전함을 인정하는 용기가 더 나은 민주사회와 건강한 시장경제를 만들어가는 원동력이다.



민주와 공화는 동일하지 않다. 민주가 공동체의 방향을 토론과 설득으로 결정하는 과정이라면, 공화는 그 결정을 실행하고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한 시민의 의무를 의미한다. 공화는 라틴어 ‘res publica’, 즉 “모두의 일”을 뜻한다. 공화제의 핵심은 공동체를 사적 소유물이 아닌 공적 자산으로 보는 관점이며, 시민과 정부가 상호 의무를 통해 정의와 공동선을 유지하는 제도다. 공화는 시민과 정부가 상호 의무를 통해 정의와 공동선을 추구하는 정치공동체를 유지하는 문제가 된다. 결국 공화의 경제적 의미는 공동체 유지에 필요한 비용을 어떻게 분담할 것인가의 문제, 곧 조세의 문제로 이어진다. 국가가 사회간접자본, 교육, 국방, 치안 등 공공재를 제공하기 위해서는 지속가능한 재원을 확보하는 것이 전제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결국 조세는 공공재와 서비스를 제공하는 밑바탕일 뿐만 아니라, 시민들간 사회계약의 기초라 할 것이다.



참여연대를 비롯한 시민단체 회원들이 28일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열린 보유세 강화 외면하는 거대양당의 부동산 정치 규탄 기자회견에서 구호를 외치고 있다. 연합뉴스

참여연대를 비롯한 시민단체 회원들이 28일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열린 보유세 강화 외면하는 거대양당의 부동산 정치 규탄 기자회견에서 구호를 외치고 있다. 연합뉴스


공공재는 도로·학교·국방처럼 모두가 이용하되 누구도 배제되지 않는 재화다. 이런 특성 때문에 ‘무임승차’ 문제가 발생한다. 세금을 내지 않아도 혜택을 누릴 수 있기에, 자발적 납세가 약화된다. 그러나 모두가 회피하면 공공재는 사라지고 사회는 유지될 수 없다. 조세는 결국 공화국을 존속시키기 위한 공동의 비용 분담 행위다.



로마 공화제의 핵심 개념인 ‘비지배 자유(freedom as non-domination)’는, 간섭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자유라 할 수 없음을 말한다. 타인의 자의적 권력 아래 놓이지 않는 상태야말로 진정한 자유다. 이 관점에서 공화적 조세 원리는 “법이 시민의 자유를 지키는 한, 세금은 정당하다”는 데 있다. 세금은 단순한 재원 조달이 아니라 권력 관계를 평등하게 조정하고 시민의 존엄을 보장하는 장치다. 따라서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도덕적 미화가 아니라 공화국 유지의 안정 비용이며, 누진세의 정당성을 뒷받침한다. 빌 게이츠, 워렌 버핏 등 세계의 부자들이 ‘기꺼이 더 내겠다(Proud to Pay)’며 증세를 요구한 것은, 세금을 공동선의 실현으로 보는 공화주의적 태도의 표현이다. 세금이 벌칙이나 착취가 아니라 사회 구성원 모두의 자유와 번영을 위한 필수 투자라는 입장이다. 따라서 공화적 조세는 넓은 과세 기반(과세의 보편성) 아래 부담을 최소화함과 동시에 시장권력 등이 공동체 위에 군림하지 않도록 하는 것으로 설계되어야 한다. 물론 그 과세와 그 사용에 대한 시민의 민주적 통제는 필수다.



민주주의와 공화적 조세제도는 상호 보완적임과 동시에 긴장관계다. 다수파가 자신들과 이해관계가 다른 집단(부유층, 특정 지역이나 산업 등)에게 지나치게 과중한 조세 부담을 일방적으로 부과하면, 해당 소수는 민주적 절차를 거쳤다 하더라도 부당한 지배에 해당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수결 민주주의의 한계를 공화주의의 비지배 자유로써 보완할 수 있다. 결국 민주공화국의 조세는 다수의 민의를 반영하되, 헌법적 원칙과 숙의 과정을 통해 정당화됨으로써 다수와 소수 모두의 자유를 지키는 방향으로 설계되어야 함을 보여준다. 그렇게 함으로써 조세제도는 “모두가 스스로 부과했다고 여길 수 있는 법”이 되어 시민의 자유를 보장하는 역할을 수행하게 될 것이다.



민주공화국의 경제적 의미는, 공동체의 지속을 위해 구성원이 민주적 절차를 거쳐 조세 부담에 동의하는 제도를 마련해야 한다는 데 있다. 저출산, 고령화, 에너지 전환 등 거대한 전환기에 사회적 비용 수요는 매우 커지고 있다. 누구도 부담하기 싫은 이 비용에 대해 우리는 지속가능한 사회를 위한 비용 분담의 합의를 새로 세워야 한다. 진정한 민주공화국은 시민이 기꺼이 그 부담을 나누는 나라다. 권한이 큰 자일수록 더 큰 책임을 지는 조세 정의, 그것이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민주공화국의 자세다.



모두가 기꺼이 부담을 질 수 있는 세금제도를 만드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어렵다고 회피하는 것이 능사는 아니다. 비용분담을 회피하면 민주공화국은 지속되지 못한다.





이용우 전 민주당 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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