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8일 서울 영등포구 한국노총 앞에서 ‘임금체불 근절! 전국 캠페인 선포식! 한국노총 기자회견’이 열리고 있다. 연합뉴스 |
김주찬 | 신부·이웃살이 이주노동자센터
지난해 우리나라 임금체불액이 사상 최초로 2조원을 넘어섰다. 28만명 이상이 피해를 입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상위권의 경제 규모를 자랑하지만, 산업재해율과 임금체불 규모에서는 최악의 수준이다. ‘임금체불 공화국'이라는 표현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이제 우리는 멈춰 서서 물어야 한다.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임금은 단순한 금전 채권이 아니다. 헌법 제32조가 보장하는 근로권과 제34조의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를 가능케 하는 실질적 기반이다. 노동의 대가로 받는 임금은 근로자와 가족의 생존권 그 자체다. 대부분의 노동자는 임금으로 생계를 유지하고, 사회적 관계를 형성하며,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지키고 자아를 실현한다.
그럼에도 국내 임금체불 해결 관행은 근로기준법의 형식적 수준에 그쳐 사인 간 채무불이행 차원으로 환원된다. 실제로 대부분의 사건이 조정·화해 중심으로 종결된다. 기소율은 20% 수준이고, 그중 실제 형사처벌을 받는 경우는 2%에 불과하다. 의도적이고 상습적인 체불을 막을 실효적 제재가 없다. 임금은 헌법적 권리이지만, 현실에서는 단순 채무로 축소되고 만다.
더 큰 문제는 사회적 인식이다. “경영상 어려움은 불가피하다” “회사가 잘 돼야 노동자도 먹고 산다”는 식의 낡은 논리가 여전히 횡행한다. 이러한 담론은 임금체불을 마치 경영상 선택의 문제로 포장한다. 하지만 임금체불은 헌법을 거스르는 명백한 불법이자 비윤리적 범죄 행위다.
해외 선진국은 이미 임금체불을 ‘절도'로 규정하고 있다. 미국 뉴욕주와 캘리포니아주를 비롯해 호주, 노르웨이 등 여러 나라가 고의적, 상습적 체불을 ‘임금 절도'(Wage Theft)로 명문화했다. 호주는 2023년 ‘허점 봉쇄법'을 통과시켜 임금을 고의로 체불한 고용주에게 최대 10년 징역형과 780만달러 벌금형을 부과할 수 있도록 했다. 체불액이 이를 초과하면 벌금은 체불액의 3배로 가중된다. 토니 버크 호주 내무부 장관의 말은 상징적이다. “근로자가 계산대에서 도둑질을 하면 당연히 범죄지만, 고용주가 근로자의 임금 봉투를 훔쳐도 범죄가 아니다. 이런 이중 잣대를 끝내야 할 때다.”
우리 정부도 올해 10월부터 시행되는 ‘상습 체불 근절법'을 통해 징벌적 손해배상, 지연이자 확대, 명단 공개 등을 도입했다. 에스크로 제도와 이주노동자 지원체계 강화 등 범정부 대책도 발표했다. 분명 진전이다. 하지만 이러한 조치는 여전히 사후적 처벌과 제한적 예방에 머물러 있다.
간과하지 말아야 할 점은 임금이 헌법적 가치라는 것이다. 임금체불은 국가가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할 공적 사안이며, 여타 금전 채권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따라서 헌법적 기본권 침해에 걸맞은 형사처벌이 이루어져야 한다.
이제 한국 사회도 ‘임금 절도 처벌법'을 제정해야 한다. 법률의 이름이 바뀌면 인식이 바뀌고, 인식이 바뀌면 사회의 방향이 바뀐다. ‘임금체불'이라는 표현은 범죄 행위의 본질을 드러내지 못한다. 반면 ‘임금 절도'는 그 행위의 본질을 정확히 특정한다. 이미 제공한 노동의 대가를, 근로자에게 귀속된 재산을 고의적으로 지급하지 않는 것은 체불이 아니라 절도다.
법제화는 단지 처벌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헌법의 근본 이념이자 궁극적인 지향점인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회복하는 길이며, 우리 사회가 진정으로 노동 존중 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출발점이다. 더 이상 ‘임금 도둑'이 활개 치는 사회가 용인되어서는 안 된다. 임금은 한 사람의 삶이며, 그 가족의 생계와 존엄을 지키는 사회적 약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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