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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VIBE] 김수미의 'K-씨어터'…끈기와 성실로 일군 연극인생, 심재찬-②

연합뉴스 이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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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VIBE] 김수미의 'K-씨어터'…끈기와 성실로 일군 연극인생, 심재찬-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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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집자 주 = 한국국제교류재단(KF)의 지난해 발표에 따르면 세계 한류 팬은 약 2억2천500만명에 육박한다고 합니다. 또한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초월해 지구 반대편과 동시에 소통하는 '디지털 실크로드' 시대도 열리고 있습니다. 바야흐로 '한류 4.0'의 시대입니다. 연합뉴스 동포·다문화부 K컬처팀은 독자 여러분께 새로운 시선으로 한국 문화를 바라보는 데 도움이 되고자 전문가 칼럼 시리즈를 준비했습니다. 시리즈는 매주 게재하며 영문 한류 뉴스 사이트 K 바이브에서도 영문으로 보실 수 있습니다.]

심재찬 연출[연합뉴스 자료 사진]

심재찬 연출
[연합뉴스 자료 사진]



심재찬은 1990년에 드디어 자신만의 극단인 전망을 창단했다. 이후, 심재찬은 '표류하는 너를 위하여'로 백상예술상 신인 연출상(1991)을 받는다. 1993년에는 영희연극상을, 1997년에는 히서연극상 제1회 수상자로 선정되기도 했다.

그러나 극단 운영은 생각보다 어려웠다. '첼로'와 '여시아문'으로 잠깐씩 숨통이 트였지만, 수상 이력이 늘어도 공연은 매번 적자였다. 근근이 극단을 꾸리던 중에 심재찬은 1995년 문예진흥원에서 보내주는 6개월간의 해외 연수를 경험하게 된다.

"아마 그때가, 제 인생의 전환점이었던 것 같아요. 미국하고 유럽에서 공연을 상당히 많이 봤는데, 페스티벌에 가면 공연만 보는 게 아니라 사무국을 열심히 찾아갔어요. 이것저것 물어보고 알아봤죠. 그 덕분이었는지 나중에 연극제 일을 정말 신나게 한 것 같아요."

서울연극제 개막 거리행진[연합뉴스 자료 사진]

서울연극제 개막 거리행진
[연합뉴스 자료 사진]



심재찬이 관여했던 2000년도 서울연극제는 연극계에 선풍적인 화제를 몰고 왔다. 세계적인 연출가였던 로버트 윌슨의 개막작을 시작으로, 극단 마부마인의 리 브루어, 프랑스의 조셥나쥬, 일본의 오카쇼고와 리투아니아 극단의 아이문타스 니크로시우까지, 그 어느 때보다도 수준 높은 세계적인 무대가 서울에서 펼쳐졌다.

이 행사의 성공 비결은, 사람에게 있었다. 당시 한국연극협회 부이사장을 맡았던 심재찬은 예술감독 손진책 외에 축제감독으로 강준혁을 내세웠다.


"2000년도 서울연극제 얘기를 하라면 한 시간 정도 걸려요(웃음). 24회째였는데, 연극제 최초로 예술감독과 축제감독을 나눴죠. 그게 핵심이었어요. 강준혁 씨를 축제감독으로 세우니까 차범석 선생님부터 해서 연극계에서는 난리였어요. 연극인이 아닌 사람에게 연극제 감독을 맡겼다는 거죠. 그래서 축제는 전문가가 해야 된다, 강준혁 씨가 대한민국 문화 전문가 1호다, 축제는 강준혁이 최고다, 그렇게 어른들을 설득했어요. 그 행사는 손진책, 강준혁 그 두 사람이 만든 거예요."

심재찬과 이야기를 나눌 때 가장 많이 듣게 되는 소리가, '그 사람 덕분'이란 말이다. 어디에서 누굴 만나서 무슨 일을 해도, 그는 늘 저만치 바깥으로 비켜 나 있다. 중앙에는 그가 밀어 넣은 사람들이 서 있다.

매의 눈처럼 사람의 능력을 읽어내고, 중심에 세우고 나면 그가 빛나도록 물심양면 돕는다. 심재찬이 가장 잘하는 일이다. 연극인들이 그를 의지하고 신뢰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당시 문화체육관광부는 성대한 연극 축제의 한복판에서 그림자처럼 조용히 뒤에 서 있던 심재찬을 제대로 알아봤다.


"그때 정말 기막힌 일이 많았어요. 로버트 윌슨이 원래는 전년도에 오기로 했는데, 공연장 조건이 안 된다고 공연을 취소했잖아요. 아르코극장(현 아르코예술극장)의 대극장 무대 뒤편을 열어야 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그때 그 무대 뒤편을 뚫었다는 거 아닙니까?(웃음) 예술의전당에서는 호리전트도 뜯어왔어요. 윌슨이 그 회사 거 아니면 안 된다는데, 우리나라에는 그게 예당에 딱 한 대 있었거든요. 그걸 누가 떼어줘요? 노조를 꼬시고, 담당부장을 설득하고, 하여튼 남의 극장에 붙박이로 있는 걸 뜯어온 거죠. 그 얘기 하려면 시간이 모자라요. 그땐 그런 짓을 했어요(웃음)."

행사나 축제를 기획하고 행정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 훨씬 많은 에너지가 나오는 것 같지만, 사실상 심재찬은 연출가로서의 자신을 가장 자랑스러워한다.

"연출은 솔직히 즐거운 작업은 아니에요. 매번 나를 의심해야 하거든요. 할 때마다 내가 이것밖에 안 되나 싶고, 배우가 나를 믿기는 하나 걱정도 되고(웃음). 원래 내가 잘났다고 착각하면서 살아야 즐거운 건데, 매번 욕먹을 각오를 하니 도통 즐겁지 않죠. 많은 사람은 이 어려운 일을 어떻게 1년에 대여섯 번씩이나 하는지, 어휴, 저는 두 번이 딱 이에요."


심재찬이 행정가로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 시기는 2005년부터다. 그는 3년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사무처장을 맡으면서 동시에 한국연극인복지재단 부이사장으로도 활동했다. 2008년까지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사무처장을 끝낸 후에 2011부터는 2년간 국립극단 사무국장도 맡았지만, 그 사이에 한국연극인복지재단 일만큼은 계속 이어갔다. 할 일과 책임만 있는 직책에 실익을 따지지 않고 이름을 내줄 만한 이는 많지 않았다.

문화예술위-예술인복지재단 업무협약    (서울=연합뉴스) 한국문화예술위원회와 한국예술인복지재단이 11일 문화예술후원 활성화를 위한 업무협약을 체결했다. 서울 종로구 혜화동 예술가의 집에서 열린 협약식에서 권영빈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위원장(오른쪽)과 심재찬 한국예술인복지재단 상임이사가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2013.7.12 <<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제공 >>     photo@yna.co.kr (끝)

문화예술위-예술인복지재단 업무협약
(서울=연합뉴스) 한국문화예술위원회와 한국예술인복지재단이 11일 문화예술후원 활성화를 위한 업무협약을 체결했다. 서울 종로구 혜화동 예술가의 집에서 열린 협약식에서 권영빈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위원장(오른쪽)과 심재찬 한국예술인복지재단 상임이사가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2013.7.12 <<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제공 >> photo@yna.co.kr (끝)



"처음에는 사무실 운영비도 없었어요. 월급 받는 데가 있어서 제가 공과금을 낼 수 있었죠. 연극인복지재단은, 필요한 일이었어요. 채승훈 연출가가 서울연극협회 초대 회장이 되면서 의미 있는 일을 함께 찾아보자 하다가 연극인의 복지를 위한 재단을 만들자고 생각한 거죠. 박정자 선생님을 찾아가 설득하면서 이사장님으로 모시게 되었어요. 여기저기 부탁할 일이 많았는데, 박정자 선생님이 정말 헌신적으로 열심히 해주셨어요. 지금의 복지재단을 있게 한 분이시죠."

한국연극인복지재단은 2005년에 예술계 처음으로 연극 장르에서 시작된 민간 복지재단이라는 데 의미가 있다. 무엇보다도 이 재단의 가장 큰 성과는 점차 전 장르의 예술인을 대상으로 하는 복지재단의 필요성을 느끼게 했다는 점이다.

2011년 예술인복지법 제정, 2012년 한국예술인복지재단 출범에 연극인복지재단은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2013년에 심재찬은 한국예술인복지재단의 초대 대표를 맡았다.

2015년에 심재찬은 대구에 있었다. 대구문화재단의 대표이사를 지내면서 그가 가장 잘했다고 생각하는 일은 독일에 한국의 예술가를 보내주는 레지던스를 만든 일이다. 대구가 독일과 한국의 예술가들을 이어주는 글로벌 플랫폼이 될 기회였다.

"하루는 재독 교포가 찾아왔어요. 베를린에 갤러리를 가진 분인데, 한국 예술계에도 도움이 될만한 일을 고민하고 계셨죠. 그래서 베를린을 거점으로 유럽 전역에 대구의 아티스트를 보내는 건 어떨까 생각했어요. 대구가 한국 예술의 글로벌과 세계화의 중심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죠. 역량 있는 예술가들을 보내주고, 목적은 그들을 매개로 국제교류를 하는 거였어요. 그들의 미션은 '잘 놀면서 사교하는 것'에 있었죠. 자리를 잘 잡아야 나중에 가는 예술가들의 언덕이 될 수 있으니까. 매년 2명씩 보내주는 계획이었죠."

대구의 근대산업 유산인 대구 연초제조장을 지역재생 공간으로 탈바꿈시킨 '대구예술발전소'는 10여 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환경과 상황에 따라 사업의 형태는 조금씩 변하고 있지만, 예술가들의 교류 공간으로서의 설립 의미만큼은 유지되고 있다.

대구예술발전소[연합뉴스 자료 사진]

대구예술발전소
[연합뉴스 자료 사진]



"누군가는 제가 예술 행정의 달인이라고 하던데, 뭘 특별하게 알고 한 일은 없어요.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 있을 때, 제가 너무 아는 게 없어서 '예술 행정이란 무엇인가'라는 책을 찾아봤어요. 그런데 제가 현장에서 겪은 게 그대로 적혀있어서 좀 놀랐죠. 스무 페이지쯤 읽다가 더는 안 봤어요. 저는 공부가 제일 어렵거든요(웃음). 행정은 '관계'가 제일 중요한 것 같아요. 공무원, 동네 사람, 예술계 커뮤니티, 예술가와의 관계. 그것들을 서로 어떻게 이어주고 묶느냐에 답이 있어요. 할 수 있다면, 술을 잘 마셔야 합니다. 절대 취하지는 말고요(웃음)."

심재찬이 '관계'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상대방의 장점을 진심으로 믿는 마음과 어떤 상황에서도 솔직한 삶의 태도다. 상대를 믿어주면 그가 자연스럽게 일의 주도권을 갖고 주체적으로 움직인다. 그것만으로도 갈등하는 지점을 지적하고 대립할 때보다 훨씬 더 나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여러 번 경험했다.

그와 함께 일해본 공무원이나 연극계 선배들은 그의 장점을 사심 없는 행동에서 발견한다. 자기 안위와 이익을 먼저 살피고 손실을 따져 야무지게 판단하는 게 당연한 세상에서 그는 그만의 독특한 셈법으로 살아간다. 적어도 그의 계산으로 따져보자면, 연극에 대해서만큼은 그가 세상에서 가장 사심(?)이 많은 사람이다.

"저는 연극과 관련된 일을 하면서 한 번도 내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 적이 없어요. 주변과 둘레에서 서성거린다고 하지만, 제 마음은 늘 중앙에 있었어요. 세상에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은 없습니다. 그중에서도 연극은 특히 그래요."

그래서 우리 모두는 심재찬의 다음 행보가 늘 기대된다.

선연(禪蓮) 김수미. 연극 평론가

▲ 전 월간 '객석' 연극전문 기자. 현 중랑문화재단 문화정책사업팀장

<정리 : 이세영 기자>

seva@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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