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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때문에 퇴사했는데"… 구독자만 9만 명 된 20대 '시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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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때문에 퇴사했는데"… 구독자만 9만 명 된 20대 '시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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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람의 서재]
포엠매거진 운영하는 배동훈씨

편집자주

로마시대 철학자 키케로는 "책 없는 방은 영혼 없는 몸과 같다"고 했습니다. 도대체 책이 뭐길래, 어떤 사람들은 집의 방 한 칸을 통째로 책에 내어주는 걸까요. 서재가 품은 한 사람의 우주에 빠져 들어가 봅니다.


인스타그램 계정 포엠매거진(Poem Magazine)을 운영하는 배동훈씨가 12일 경기 수원에 있는 시 전문 독립서점 시요에서 시를 읽고 있다. 왕태석 선임기자

인스타그램 계정 포엠매거진(Poem Magazine)을 운영하는 배동훈씨가 12일 경기 수원에 있는 시 전문 독립서점 시요에서 시를 읽고 있다. 왕태석 선임기자


"아 걔? 시 좋아해."

대학 시절 그를 본 이들은 누구나 이렇게 답했을 것이다. 수업을 듣는 대신 캠퍼스 벤치에 누워 줄곧 시집을 읽었다고 한다. 멀쩡한 직장까지 그만두고 시의 매력을 알리기 위해 사회관계망서비스(SNS) 인스타그램 계정 '포엠매거진(poemmag)'을 지난해 초 개설한 배동훈(28)씨 얘기다. 포엠매거진은 단순한 SNS 채널이 아니다. 배씨가 지난 10년간 사랑한 시집 수장고이자 디지털 아카이브다. 이곳에서 시로 연결된 구독자는 벌써 9만 명에 이른다. 그의 친구들은 이제 이렇게 말한다. "와, 너 진짜 시만 읽더니, 맨날 시 가지고 뭐 하더니… 진짜 잘 됐네."

시와 10년째 연애 중


최근 한국일보와 만난 배씨는 시와 사랑에 빠진 지 10년이라고 했다. 특별한 계기랄 건 없었다. 19세 때 서점 베스트셀러 매대에 놓여 있던 류시화 시집 '사랑하라 한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을 집어든 게 시작이었다. "고등학교 때까지만 해도 1년에 책 한 권이나 읽었을까요. 살면서 시집이라는 걸 처음 읽는데 번개 맞은 것처럼 온몸에 소름이 돋더라고요. 너무 재미있다, 이런 게 세상에 있었구나, 내가 왜 여태 이걸 모르고 살았지 싶었죠."

10년째 시와 연애 중이라는 배동훈씨는 '시를 왜 좋아하느냐'는 질문에 그냥 좋다고 했다. 왕태석 선임기자

10년째 시와 연애 중이라는 배동훈씨는 '시를 왜 좋아하느냐'는 질문에 그냥 좋다고 했다. 왕태석 선임기자


그날 이후 시에 푹 빠졌다. 학업을 제쳐두고 시를 읽다 F 학점을 여럿 받고 낙제할 뻔도 했다. 패션디자인을 전공한 그의 주변에는 책을 읽거나 문학을 좋아하는 사람이 전무했다. 그것도 시를 좋아한다니, 배씨는 외계인 취급을 받곤 했다. "시가 좋은 이유요? 그냥 좋아요."

시에 대한 그의 사랑은 점차 구체적인 형태를 갖춰 갔다. 시를 쓰고 싶다는 마음도 솟구쳤다. 자작시를 써서 지인들에게 보이고, 인스타그램에 올렸다. 그렇게 쓴 시를 엮은 시집만 4권. 시집은 디자인부터 편집, 제본 등 그가 손수 만들었다. 좋은 시를 메일로 나누는 뉴스레터도 1년 반 정도 연재했는데, 포엠매거진의 초기 모델이었던 셈이다. "저는 뭔가를 좋아하면 주변에 꼭 보여주고 싶거든요. 왜냐하면 너무 즐거우니까."

시로 밥벌이를 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대학 졸업 후 식품 대기업에 취업해 브랜딩 업무를 하던 배씨는 길을 잃고 만다. 그때도 왕복 3시간 출퇴근길 지하철 안에서 고집스레 시집을 읽었다. 마침 그의 눈에 들어온 문정희 시인의 시 '도착'. "아무것도 아니면 어때/ 지는 것도 괜찮아/ 지는 법을 알았잖아" 그는 퇴사를 결심했다. 입사 7개월 만. "혼자 겉돌던 내가 잘못된 게 아니야. 회사에서 나오는 게 지는 거라 해도 그럼 어때. 나는 질 수 있는 방법을 터득한 건데. 이렇게 마음이 강해져서 회사를 그만둘 수 있었어요."

포엠매거진이 제작한 굿즈인 시집사 외계인 키링 뒤로 배동훈씨가 황인찬 시집 '희지의 세계'를 들어보이고 있다. 왕태석 선임기자

포엠매거진이 제작한 굿즈인 시집사 외계인 키링 뒤로 배동훈씨가 황인찬 시집 '희지의 세계'를 들어보이고 있다. 왕태석 선임기자


'9만 명 구독'… "시가 나를 도왔으니 빚 갚을래"


퇴사 후 일주일 만인 2024년 2월 포엠매거진을 만들었다. 그에게 시를 알리는 건 일이 아니라 즐거움이자 쉼의 일부다. "지난 10년간 시가 나를 도왔던 순간들이 무수했거든요. 시가 나한테 준 기쁨에 대해 빚을 갚는다는 생각으로 포엠매거진을 하고 있고, 계속할 거예요." 그의 진심이 통했는지 계정을 만든 지 3주 만에 1,000명의 구독자가 모였다.


초기 전략은 인터넷 밈을 통해 시를 재미있게 소개해보자는 것이었다. 기존 밈을 살짝 변형한 '외계인 침공 시 시 안 읽는 사람이 먼저 잡아먹힌다'는 문구가 대표적. 텍스트힙을 상징하는 이 문구를 새긴 티셔츠도 덩달아 인기를 끌어 1,500장 넘게 팔렸다. 배씨는 "인플루언서나 온라인 콘텐츠가 대부분 대중의 수요나 유행을 따르는 반면 나는 내가 좋아하는 걸 하고 있다는 게 다르다"고 했다. 이런 자부심은 그가 10년간 읽고 쌓아온 시 데이터베이스에서 나온다.

배동훈씨가 기존 인터넷 밈을 변형한 '외계인 침공 시 시 안 읽는 사람이 먼저 잡아먹힌다'라는 문구를 새겨 만든 티셔츠는 큰 인기를 끌었다. 포엠매거진 인스타그램

배동훈씨가 기존 인터넷 밈을 변형한 '외계인 침공 시 시 안 읽는 사람이 먼저 잡아먹힌다'라는 문구를 새겨 만든 티셔츠는 큰 인기를 끌었다. 포엠매거진 인스타그램


포엠매거진은 인터넷 밈과 굿즈를 통해 시를 재미있게 소개하고 있다. 포엠매거진 인스타그램

포엠매거진은 인터넷 밈과 굿즈를 통해 시를 재미있게 소개하고 있다. 포엠매거진 인스타그램


시를 활용한 콘텐츠들이 인기가 높다. 예컨대 '블로그 제목이 고민될 때 시를 읽어보세요'는 고선경 시집 '샤워젤과 소다수'를 읽다 얻은 아이디어에서 출발했다. '잘 지내고 계세요? 저는 춤을 추겠어요'(김복희 시집 '스미기에 좋지'), '나는 뒤끝 짱 있음'(김민정 시집 '너의 거기는 작고 나의 여기는 커서 우리들은 헤어지는 중입니다'), '우리가 가까이 산다면 수박을 반 덩이씩 나눠 가질 수 있을 텐데'(봉주연 시집 '우리는 모두 이불에서 태어난 걸요') 같은 시를 소개하면서 최근 블로그를 열심히 하는 10대부터 20대 초반 연령층 사이에서 큰 호응을 얻었다.

배씨는 "평소 시를 읽다 그런 아이템이 먼저 떠오르고, 거기에 어울리는 다른 시를 붙여 나가는 식으로 콘텐츠를 만들고 있다"며 "반대로 콘텐츠를 만들기 위해 시를 찾으면 좋은 반응을 얻기 어려울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기 위해서 그는 즐겁게 사는 걸 1순위로 둔다. "내가 재미있어야 좋은 콘텐츠가 나온다는 생각"으로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만 일하는 게 원칙. 시집은 손 뻗으면 가장 먼저 닿는 곳에 두고 탐독한다. 시집을 산처럼 쌓아 두고 종일 시만 읽기도 한다. 시 읽기엔 따로 퇴근이 없다.

시 읽기 어렵지 않아요… "표지 예쁜 시집부터"


그는 교보문고 강남점과 경기 수원에 있는 시 전문 독립서점 시요를 즐겨 찾는다. 교보문고에는 다양한 시집이 양적으로 많이 구비돼 있고, 김고요 시인이 운영하는 시요는 시집 큐레이션이 돋보인다. 배씨는 주로 서점에서 시집을 다 읽고 계속 생각나면 구매를 한다. 최근에는 장승리 시집 '반과거'를 샀다. "아저씨들이 편의점 가서 '야, 담배 그림 예쁜 거 줘 봐' 하듯 표지 예쁜 시집, 제목에 꽂히는 시집이 있다면 일단 집어 들고 읽어보세요. 어려워할 필요 없어요."

배동훈씨가 추천하는 시집들. 입문용으로 제격인 청소년시집 '도넛을 나누는 기분'과 진은영의 '우리는 매일매일', 황인숙의 '자명한 산책'.

배동훈씨가 추천하는 시집들. 입문용으로 제격인 청소년시집 '도넛을 나누는 기분'과 진은영의 '우리는 매일매일', 황인숙의 '자명한 산책'.


초심자에게는 "성인이 읽어도 좋은데다 술술 읽히고 표지도 예쁜" 청소년 시집 '도넛을 나누는 기분'을 추천한다. 공군 복무 시절 처음 접한 이래 "사실상 현대시 입문"을 도운 황인찬 시집 '희지의 세계'와 '구관조 씻기기', "국어로 쓸 수 있는 최고의 시"라는 진은영 시집 '우리는 매일매일'은 그가 첫손에 꼽는 책들이다. 황인숙의 '자명한 산책'도 "문장이 점프하듯 솔직하고 귀여운 감성이 좋아" 주변에 자주 권한다.


시인선을 따라 읽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그가 요즘 자주 찾는 시집 시리즈는 한국 현대시의 반세기 흐름을 짚어내는 '문학과지성 시인선'이다. 그는 "결국 손이 많이 가는 건 클래식이더라"고 했다. "하나의 미술 작품" 같은 '봄날의 책 시인선', 비등단 시인의 작품도 소개하는 '아침달 시집' 역시 그가 특별히 아끼는 시인선이다.

배동훈씨는 개인적인 취향으로는 '봄날의 책 시인선'을 좋아한다고 했다. 왼쪽부터 강성은 시집 '슬로우 슬로우', 김복희 시집 '스미기에 좋지', ' 차도하 시집 '미래의 손'.

배동훈씨는 개인적인 취향으로는 '봄날의 책 시인선'을 좋아한다고 했다. 왼쪽부터 강성은 시집 '슬로우 슬로우', 김복희 시집 '스미기에 좋지', ' 차도하 시집 '미래의 손'.


"시의 재미를 아는 순간 삶은 좋은 쪽으로 기울어요"


그는 머지않아 '시의 시대'가 올 것이라 믿는다. "10년 후엔 책을 읽고 즐기는 게 너무 당연해져서, 텍스트힙이라는 말 자체가 필요 없어질지도 몰라요." 시를 즐기는 1020 세대의 증가세가 뚜렷이 감지되는 데서 그 근거를 찾는다. 시가 쇼트폼과 비슷한 것도 인기 요인이다. 그는 "시는 쇼트폼처럼 짧고, 언제 어디서나 어떤 페이지를 펼쳐 읽을 수 있다는 특징이 있다"며 "SNS에 올리면 멋있어 보여 지적 허영심까지 채워준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시 읽기를 강요하고 싶지는 않다고 강조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시를 꼭 읽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어렵고 별로예요' '아무 느낌이 없어요'라고 말하는 분들도 전혀 이상한 게 아니에요. 시가 아니더라도 러닝이나 요리에서 즐거움을 찾을 수 있겠죠." 다만 그는 '시 한번 읽어보실래요?' 제안하는 사람이고 싶다고 했다. 약속시간에 일찍 도착했을 때 '서점에 들러 시집 한번 읽어볼까'라는 생각까지만 이끌고 싶다는 것. 그다음은 각자에게 달렸다. "그래도 하나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건요. 시의 재미를 알아버린 순간부터 삶은 분명 좋은 쪽으로 기울 거라는 거예요. 그건 제가 자신 있게 보장해요!"

권영은 기자 you@hankook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