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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박해' 탈레반 기자회견 맨 앞에 여성 기자들만…왜? [지구촌 TM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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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박해' 탈레반 기자회견 맨 앞에 여성 기자들만…왜? [지구촌 TM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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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간 외무장관, 탈레반 재집권 후 첫 인도 방문
대사관 주재 기자회견서 여성 기자들 참석 불허
탈레반 정권 '여성 차별적 정책' 비판 한목소리


인도의 여성 기자들이 12일 인도 뉴델리에서 열린 아프가니스탄 탈레반 외무장관의 기자회견장 가장 앞자리에 참석해 있다. 뉴델리=로이터 연합뉴스

인도의 여성 기자들이 12일 인도 뉴델리에서 열린 아프가니스탄 탈레반 외무장관의 기자회견장 가장 앞자리에 참석해 있다. 뉴델리=로이터 연합뉴스


13일(현지시간) 아침 배달된 인도의 조간신문에선 모두 같은 사진이 1면을 장식했습니다. 바로 전날 인도 뉴델리 주재 아프가니스탄 대사관에서 열린 아미르 칸 무타키 아프간 외무장관의 기자회견 모습입니다.

그런데 이 사진의 구도가 조금 특이합니다. 기자회견을 연 당사자 무타키 장관이 아닌, 취재하기 위해 참석한 현장 기자들의 모습이 담긴 겁니다. 게다가 취재석 맨 앞줄에는 여성 기자들만 앉아 있습니다. 마치 이 회견의 진짜 주인공은 무타키 장관이 아닌 여성 기자들인 것처럼 보입니다.

대사관 앞에서 쫓겨난 女기자들


14일 영국 BBC방송, 미국 CNN방송 등에 따르면 사실 이 기자회견이 열리기까지엔 우여곡절이 있었습니다. 당초 기자회견은 이틀 전인 10일 열릴 예정이었는데, 여성 기자들은 제외된 채 소수의 남성 기자만 취재를 허용받은 겁니다.

해당 회견은 인도 정부가 이슬람 무장 조직인 탈레반이 아프간에서 재집권한 이후 폐쇄했던 주아프가니스탄 자국 대사관을 4년 만에 다시 개설하면서 마련됐습니다. 고위직으로는 처음으로 인도를 방문한 무타키 장관을 만나기 위해 인도의 여러 매체가 취재하러 왔습니다.

그러나 인도의 남성 기자 16명만이 기자회견장에 입장했을 뿐 여성 기자들은 대사관 정문 앞에서 문전박대를 당했습니다. 초대 명단에 포함되지 않았다는 것이 이유였습니다. 인도 매체 '타임스오브인디아'는 소식통을 인용해 "어떤 기자를 초대할 것인지에 대한 결정은 무타키 장관과 탈레반 관리들이 내렸다"며 "탈레반 정권하에서 오랫동안 비판받아온 '성별 제한' 정책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고 보도했습니다.

인도 정치권과 언론계는 즉각 반발했습니다. 인도기자협회, 인도여성언론인협회, 인도여성언론네트워크 등은 여성 기자 배제 조치를 강력히 비난하며 인도 정부에 "어떤 외국 세력도 인도 언론에 (취재 차별) 조건을 제시하지 못하도록 보장하라"고 촉구했습니다. 힌두 신문의 수하시니 하이더 기자는 "우리의 첫 반응은 당연히 분노였다"면서 "인도에서 인정하지도 않는 정부인 탈레반 대표가 뉴델리에 와서 여성 없이 기자 회견을 열겠다는 것은 좋은 선례가 되지 못할 것"이라고 비판했습니다.


인도의 야당 지도자 라훌 간디도 "이 행사를 허용한 것은 나렌드라 모디 총리가 모든 인도 여성에게 '당신은 너무 약하다'고 말한 것과 같다"고 꼬집었습니다. 인도 외무부는 "회견은 아프간 대사관에서 주최한 것이며, 인도 정부는 관여하지 않았다"고 밝혔으나 논란은 사그라지지 않았습니다.

아미르 칸 무타키 아프가니스탄 탈레반 외무장관의 기자회견이 열린 12일 인도 뉴델리의 아프가니스탄 대사관에 기자들이 모여 있다. 뉴델리=로이터 연합뉴스

아미르 칸 무타키 아프가니스탄 탈레반 외무장관의 기자회견이 열린 12일 인도 뉴델리의 아프가니스탄 대사관에 기자들이 모여 있다. 뉴델리=로이터 연합뉴스


여성 기자 뺀 회견에 비판 직면


비판이 거세지자 무타키 장관 측은 새로운 초청장을 배포하며 이틀 만에 두 번째 기자회견을 마련했습니다. 초청장엔 '모든 언론인에게 개방된 포용적 행사'라고 공지됐습니다. 회견장 가장 앞줄에는 여성 기자들이 앉았습니다. 2021년 이후 오직 남성만으로 이뤄진 정부를 구성한 탈레반이 이처럼 다수 여성을 정면으로 마주한 것은 매우 드문 일이라고 CNN은 평가했습니다.

이날 기자회견 첫 질문은 여성 기자들이 배제된 이유와 아프간 여성이 학교와 직장을 다닐 권리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무타키 장관은 "기술적인 문제가 있었다"며 "특정 명단에 있는 기자들에게 초대장을 보냈을 뿐 그 외 다른 의도는 없었다"고 석연치 않은 해명을 내놨습니다. 아프간 여성들과 관련해선 "현재 1,000만 명의 아프간 학생 중 약 280만 명이 여성과 소녀"라며 "일부 제한은 있지만 여성 교육을 종교적으로 금지한 적은 없다. 다만 추후 명령이 있을 때까지 잠정적으로 보류된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수브라마냠 자이샨카르(오른쪽) 인도 외교장관과 아미르 칸 무타키 아프가니스탄 외무장관이 10일 인도 뉴델리에서 양자 회담을 갖고 악수하고 있다. 아프가니스탄에서 탈레반이 집권한 이후 최고위급 지도자가 인도를 방문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뉴델리=AFP 연합뉴스

수브라마냠 자이샨카르(오른쪽) 인도 외교장관과 아미르 칸 무타키 아프가니스탄 외무장관이 10일 인도 뉴델리에서 양자 회담을 갖고 악수하고 있다. 아프가니스탄에서 탈레반이 집권한 이후 최고위급 지도자가 인도를 방문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뉴델리=AFP 연합뉴스


아프간은 이슬람 율법을 이유로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어린 소녀들의 중등 및 고등 교육을 금지하고 있습니다. 공원, 체육관, 모스크, 시장, 미용실 등 공공장소에 다닐 때도 여성들은 반드시 남성 보호자와 동행해야 합니다. 유엔은 현재 탈레반 치하의 아프간을 "성별 아파르트헤이트(인종차별 정책)"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지난 4년간 아프간 정부를 자처해온 탈레반은 최근 국제 무대 복귀를 시도하고 있습니다. 무타키 장관의 이번 인도 방문 또한 이런 노력의 일환이었습니다. 그러나 탈레반의 성차별적 정책이 개선되지 않는 한 국제 사회의 인정을 받기는 쉽지 않아 보입니다. 현재 전 세계에서 탈레반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있는 외국 정부는 러시아가 유일합니다. 국제 사회는 한목소리로 "탈레반의 여성 권리에 대한 입장 변화가 있어야 할 것"이라고 촉구하고 있습니다.

나주예 기자 juye@hankook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