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정착·공생 주제로… 우경화 日에 울림
"차별 극복한 우토로, 일본과 세계의 희망"
"전시 통해 일본 내 차별 인식 바뀌길 기대"
일본 교토부 우지시 소재 우토로평화기념관 외관에 12일 생명평화미술행동 작가들이 재일조선인 우토로 주민들의 저항의 역사와 삶에 대해 그린 대형 걸개그림 '피어라! 민들레'가 걸려 있다. 우지=류호 특파원 |
약 60세대, 100명의 재일조선인이 사는 일본 교토부 우지시 우토로 마을이 대중에 각인된 건 2015년 9월 당시 인기 예능 프로그램이었던 '무한도전 배달의 무도' 편이 방영되면서다. 각국에 사는 동포들에게 그리운 한국 음식을 배달한다는 내용으로, 방송인 유재석과 하하가 우토로를 찾았다. 유재석이 재일동포 1세이자 우토로의 산증인 강경남 할머니(2020년 11월 별세)에게 "저희가 너무 늦게 왔습니다. 죄송합니다"라고 말한 장면은 많은 이의 눈시울을 붉히게 했다. 이후 우토로를 찾는 많은 한국인이 "이제서야 우토로를 알게 돼 죄송하다"며 말하고 돌아갔다고 한다.
하지만 지난 12일 우토로에서 만난 김수환 우토로평화기념관 부관장은 "주민들은 어둡고 안타까운 시선으로만 바라보는 건 부담스러워한다"며 "강제 퇴거 위기에서도 꿋꿋이 살아온 동포들의 상징이라는 자신감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김 부관장의 당부처럼, 우토로평화기념관 외관에 걸린 대형 미술작품 '피어라! 민들레'는 차별 속에서 마을을 지켜낸 주민들의 자부심을 보여준다. 한국 '생명평화미술행동' 작가들의 작품으로, 일제강점기 열악한 환경 속에서 혹독한 노동을 견디며 동고동락한 주민들의 희로애락을 담았다.
'우리는 우토로에서 살아왔고 우토로에서 죽으리라'고 적힌 깃발이 12일 일본 교토부 우지시 우토로평화기념관에 설치된 함바 앞에 흔들리고 있다. 당시 비행장 건설에 강제 동원된 재일 조선인들은 우토로 내 지어진 가설 숙소인 함바에 모여 살았다. 우지=류호 특파원 |
우토로평화기념관에 주민들의 애환을 담은 대형 걸개그림이 걸린 건 우토로를 거점으로 한 '제1회 우토로 아트 페스티벌 2025(UAF 2025)'가 개최돼서다. 이번 페스티벌은 '이주, 정착, 공생'을 주제로 지난 10일부터 다음 달 10일까지 한 달간 우토로와 교토 도시샤대, 괴테 인스티투트 빌라카모가와(교토에 위치한 독일문화원 거점) 등 세 곳에서 동시에 개최되며, '차별에 맞선 공생과 평화'라는 메시지를 담은 여러 작품을 만나볼 수 있다.
우토로를 아트 페스티벌을 관통하는 키워드로 삼은 건 이주민들에 대한 차별에 맞선 우토로의 상징성 때문이다. 우토로는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0년 4월 일본군 교토 비행장 건설을 위해 강제 동원된 조선인 노동자들의 가설 숙소인 '함바'가 집중 설치되며 생긴 마을이다. 이들은 1945년 8월 일본의 패전으로 아무런 보상 없이 외롭게 이곳에 남겨지게 됐다. 조선인을 향한 차가운 시선과 차별 속에서도 삶의 터전을 일궈왔다.
일본 교토부 우지시 소재 우토로평화기념관에 12일 우토로 주민들을 촬영한 사진이 전시돼 있다. 우지=류호 특파원 |
그러다 1987년 3월 주민들 모르게 일본 부동산 회사로 토지가 전매됐고, 주민들은 강제 퇴거 위기에 몰렸다. 주민들은 일본 시민단체와 함께 마을을 지키고자 30년 넘게 강력히 저항했고, 뒤늦게 찾아온 한국 시민사회의 지원, 국제사회의 관심이 더해져 양국 정부를 움직였다. 2018년 1월 주민들은 시영 주택으로 입주하며 자신들의 삶의 터전을 이어갈 수 있게 됐다. 4년 뒤인 2022년 4월 이들의 치열한 투쟁으로 얻어낸 평화에 대해 기록한 우토로평화기념관이 세워졌다.
일본 교토부 교토시 소재 도시샤대 이마데카와캠퍼스 내 후소칸 외관에 12일 생명평화미술행동 작가들이 재일조선인 우토로 마을 주민들을 주제로 그린 걸개그림 '피어라! 민들레'가 걸려 있다. 교토=류호 특파원 |
한국과 독일, 슬로베니아 등 유럽 예술가·지식인들은 이러한 '우토로의 정신'을 전 세계에 알리고자 이번 아트페스티벌을 기획하게 됐다. 일본 작가들도 작품 전시에 동참했다. '예술을 통한 연대'를 보여주려 한일 정부나 민간 기업 지원 없이 오롯이 예술가와 지식인들의 힘으로 개최했다. 유재현 우토로 아트 페스티벌 예술감독은 "재일조선인은 일본 사회에서 고립된 고난의 역사를 거쳤는데, 지금도 이들에 대한 차별이 존재하는 데 대해 많은 일본인이 죄책감을 가질 것"이라며 "우토로라는 곳을 예술을 통해 세계에 알리고, 이곳이 차별의 지역이 아닌 평화와 공생의 상징인 곳으로 만들고 싶어 기획했다"고 말했다.
유재현(오른쪽) 우토로 아트 페스티벌 2025 예술감독과 정현주 수석큐레이터가 12일 일본 교토부 교토시 소재 도시샤대에 설치된 페스티벌 포스터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교토=류호 특파원 |
페스티벌위원회는 이번 전시를 계기로 많은 일본인이 우토로에 대해 인식할 수 있기를 기대하고 있다. 대형 걸개그림 '피어라! 민들레'를 우토로는 물론 도시샤대 이마데가와캠퍼스에도 설치한 이유다. 도시샤대 후소칸 외관에 걸린 그림은 대학 인근 이마데가와역 출구 앞에서도 보일 정도로 눈에 띈다. 후소칸은 일제강점기 저항 시인 윤동주의 시비 옆에 있는 건물이다. 도시샤대는 윤동주가 일본에서 유학하며 다닌 두 번째 대학으로, 1995년 시비를 건립했다. 유 감독은 "올해 창립 150주년을 맞은 도시샤대가 창립 이래 교내에 걸개그림을 건 건 이번이 처음"이라고 전했다.
최지목 작가의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라는 제목의 작품이 12일 '우토로 아트 페스티벌 2025' 전시관인 일본 교토부 교토시 소재 도시샤대 이마데가와캠퍼스에 전시돼 있다. 재일조선인의 저항과 공존이라는 메시지를 표현한 작품이다. 교토=류호 특파원 |
많은 일본인이 차별과 공생을 생각하는 기회가 됐으면 하는 바람은 최근 일본 사회의 우경화 분위기와 맞물려 있다. 일본은 지난 7월 참의원(상원) 선거에서 '일본인 퍼스트'와 배외주의를 외친 우익 정당인 참정당이 약진하며 적잖은 충격을 안겼다. 지난 4일 실시된 집권 자민당 총재 선거에선 예상을 깨고 우익 성향의 다카이치 사나에 총재가 선출됐다.
유 감독은 "재일조선인이나 이주민이 아닌 일본인들이 먼저 변해야 일본 사회가 바뀔 수 있다"며 "일본 사람들이 우토로와 작품들을 보며 인식을 바꾸는 기회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우토로 주민들이 차별을 극복한 과정이 세계 이주민들에게도 큰 힘이 되면 좋겠다"는 희망을 비쳤다. 미국에선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가 강도 높은 이민자 추방 정책을 실시하고 있고 유럽에선 배외주의를 앞세운 극우 정당이 큰 지지를 얻고 있으며, 한국에서도 혐중 시위가 열리는 등 이주민 배척 흐름은 일본 밖에서도 커지고 있다.
시인 윤동주와 일본인 시인 이바라키 노리코의 생전 모습을 합성한 사진과 티 테이블이 12일 '우토로 아트 페스티벌 2025' 전시관인 일본 교토부 교토시 소재 도시샤대 이마데가와캠퍼스 안에 놓여 있다. 이 작품은 기슬기 작가가 '전쟁이 없었다면 윤동주와 이바라키가 만나 커피를 마시며 문학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을까'를 가정해 만들었다. 교토=류호 특파원 |
일본의 2차 세계대전 패전 80주년, 한일 국교 정상화 60주년이라는 의미 있는 해인 만큼, 역사를 생각해 볼 수 있는 작품도 곳곳에 전시했다. 도시샤대에는 윤동주를 주제로 한 '내가 가장 예뻤을 때'라는 작품이 전시돼 있다.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윤동주와 일본에 윤동주를 알린 시인 이바라키 노리코가 만나 커피를 마시며 문학을 논하지 않았을까'라고 가정해 만든 작품이다. 두 개의 커피잔이 놓인 탁자에는 윤동주의 시가, 탁자 앞에는 윤동주와 이바라키가 함께 찍은 듯한 사진이 놓여 있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는 일본의 침략 전쟁을 비판한 이바라키의 대표 시 제목이기도 하다. 정현주 수석큐레이터는 "군국주의 같은 이념의 전쟁이 우리의 삶과 미래를 파괴한다는 메시지를 작품들을 통해 보여주려 노력했다"고 말했다.
교토·우지= 류호 특파원 ho@hankookilbo.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