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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 이시바 일본 총리 "일본은 왜 전쟁을 피하지 못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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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 이시바 일본 총리 "일본은 왜 전쟁을 피하지 못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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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일 발표 한국서도 화제
역사인식은 과거 담화 계승
무모한 전쟁 원인 구체적 설명


이시바 시게루 일본 총리가 10일 도쿄 총리 관저에서 기자들과 만나 공명당이 여당인 자민당과의 연정을 탈퇴하기로 결정한 데 대한 반응을 밝히고 있다. 공명당은 26년간 연정을 유지해온 여당 자민당과의 연정을 탈퇴하기로 결정했다. 도쿄=EPA 연합뉴스

이시바 시게루 일본 총리가 10일 도쿄 총리 관저에서 기자들과 만나 공명당이 여당인 자민당과의 연정을 탈퇴하기로 결정한 데 대한 반응을 밝히고 있다. 공명당은 26년간 연정을 유지해온 여당 자민당과의 연정을 탈퇴하기로 결정했다. 도쿄=EPA 연합뉴스


퇴진을 앞둔 이시바 시게루 일본 총리가 패전 80년을 맞아 자국민에게 전하는 메시지를 발표했다. 일본 역대 총리는 패전 50년, 60년, 70년을 맞이할 때마다 각의(국무회의 격)를 거쳐 '담화'를 발표했는데, 이번에는 자민당 내 강경파의 반대를 고려해 패전일을 피하고 담화가 아닌 개인적 소견이라는 형식으로 발표했다.

역사인식에 대해서는 아베 신조 전 총리의 전후 70년 담화를 포함해 '역대 내각의 입장을 계승한다'고 밝혔으며, 대부분의 내용은 일본이 왜 전쟁의 참화로 걸어가는 잘못된 결정을 했는지에 대한 분석에 초점을 맞췄다.

전쟁에 대한 기억이 거의 사라져가는 일본에서 젊은 세대에게 전쟁이 무엇인지 일깨우고 이시바 총리 개인의 전쟁에 대한 철학이 반영된 명문이라는 평가가 한국에서도 나오고 있어 전문을 소개한다. 괄호 안은 독자를 이해를 돕기 위한 역자의 설명. 본문의 '천황'은 일본인의 직접적인 발언이므로 '일왕'으로 수정하지 않았다.

-전후 80년에 부쳐-

[머리말]

지난 대전(제2차 세계대전 또는 태평양전쟁)이 종결된 후 80년이 지났습니다.

이 80년간 우리나라(일본)는 일관되게 평화국가의 길을 걸어왔으며, 세계의 평화와 번영을 위해 힘써왔습니다. 오늘날 우리나라의 평화와 번영은 전쟁에서 숨진 분들을 비롯한 여러분의 귀중한 생명과 고난의 역사 위에 이루어진 것입니다.

저는 3월 이오지마 방문, 4월 필리핀 칼릴라야의 전몰자위령비 방문, 6월 오키나와전 전몰자추도식 참석 및 히메유리평화기념자료관 방문, 8월 히로시마·나가사키 원폭 희생자 위령식 참석, 종전기념일(8월 15일) 전국전몰자추도식 참석을 통해 지난 대전의 반성과 교훈을 다시금 깊이 가슴에 새길 것을 맹세했습니다.


지금까지 전후 50년, 60년, 70년을 맞이할 때마다 내각총리대신(일본 총리) 담화가 발표되어 왔으며, 역사인식에 관한 역대 내각의 입장에 대해서는 저 역시 이를 계승하고 있습니다.

과거 세 차례의 담화에서는 '왜 그 전쟁을 피할 수 없었는가' 하는 점에 대해서는 별로 언급되지 않았습니다. 전후 70년 담화에서도 일본은 "외교적·경제적 교착 상태를 무력 행사로 해결하려고 시도했다. 국내 정치시스템은 이를 저지하지 못했다"라는 구절이 있지만, 그 이상의 상세한 내용은 논의되지 않았습니다.

국내 정치시스템은 왜 이를 저지하지 못했는가.


제1차 세계대전을 거쳐 세계가 총력전 시대로 들어서고 있던 가운데, 개전 전 내각이 설치한 '총력전연구소'나 육군성이 설치한 이른바 '아키마루기관' 등의 예측에 따르면 패전은 필연이었습니다. 많은 전문가들도 전쟁 수행은 어렵다고 느끼고 있었습니다. 정부 및 군 수뇌부도 이를 인식했으나 그러면서도 어째서 전쟁을 회피한다는 결단을 내리지 못한 채 무모한 전쟁으로 돌진하여 국내외의 많은 무고한 생명을 희생시키는 결과가 되고 말았는가. 요나이 미쓰마사 전 총리는 "서서히 가난해지는 것을 피하려다 단번에 가난해지지 않도록 주의해 주길 바란다"고 지적하기도 했는데, 왜 (전쟁하는) 노선을 재검토할 수 없었는가.

전후 80년을 맞이해 국민 여러분과 함께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1945년 9월 27일 일본 도쿄 미국 대사관에서 만난 더글러스 맥아더(왼쪽) 유엔군 사령관과 히로히토 일본 천황. 한국일보 자료사진

1945년 9월 27일 일본 도쿄 미국 대사관에서 만난 더글러스 맥아더(왼쪽) 유엔군 사령관과 히로히토 일본 천황. 한국일보 자료사진


[대일본제국헌법의 문제점]

우선 당시 제도상의 문제를 들 수 있습니다. 전쟁 전 일본에는 정치와 군사를 적절히 통합하는 구조가 없었습니다.


대일본제국헌법 하에서는 군대를 지휘하는 권한인 통수권이 독립된 것으로 되어 있어, 정치와 군사의 관계에 있어 항상 정치 즉 문민이 우위에 있어야 한다는 '문민통제'의 원칙이 제도상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내각총리대신의 권한도 제한적이었습니다. 제국헌법 하에서 내각총리대신을 포함한 각 국무대신은 대등한 관계로 되어 있었고, 내각총리대신은 수반으로 되어 있었으나 내각을 통솔하기 위한 지휘명령권한은 제도상 부여되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러일전쟁 무렵까지는 원로가 외교·군사·재정을 통합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무사로서 군사에 종사했던 경력을 가진 원로들은 군사를 잘 이해하는 바탕에서 이를 통제할 수 있었습니다. 마루야마 마사오의 표현을 빌리자면, "원로·중신 등 초헌법적 존재의 매개"가 국가 의사의 일원화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원로가 차츰 세상을 떠나고 그러한 비공식적 구조가 쇠퇴한 뒤에는 다이쇼 데모크라시(1910~20년대 일본에서 일어난 민주주의, 자유주의적 사조·운동) 하에서 정당이 정치와 군사의 통합을 시도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으로 세계에 격변이 일어나는 가운데 일본은 국제 협력의 주요 당사자 중 하나가 되었고, 국제연맹에서는 상임이사국이 되었습니다. 1920년대 정부의 정책은 시데하라 외교에서 나타난 것처럼 제국주의적 팽창이 억제되어 있었습니다. 1920년대에는 여론이 군에 대해 엄격했고, 정당은 대규모 군축을 주장했습니다. 군인들은 입지가 좁아졌으며, 이에 대한 반발이 쇼와 시대(1926~89년) 군부가 대두한 배경 중 하나였다고 여겨집니다.

이전까지 (군) 통수권은 작전지휘에 관한 군령에 한정되고, 예산과 체제정비에 관한 군정에 대해서는 내각의 일원인 국무대신의 소관 사항으로 해석·운용되었습니다. 문민통제 부재라는 제도상의 문제를 원로, 다음은 정당이 이른바 운용으로 보완했다고 생각합니다.

[정부의 문제]

그러나 점차 통수권의 의미가 확대해석되어, 통수권의 독립이 군의 정책 전반과 예산에 대한 정부 및 의회의 관여·통제를 배제하기 위한 수단으로 군부에 의해 이용돼 갔습니다.

정당 내각 시대(다이쇼 데모크라시의 영향으로 일본에서 정당 내각이 정치의 주축을 이루었던 시대. 1926~30년대 초반. 1931년 만주사변 이후 군부의 영향력이 급속이 커지며 정당 내각의 정치적 입지가 크게 약화했다)에 정당 간에 정권 획득을 위해 스캔들 폭로전이 벌어져, 정당은 국민의 신뢰를 잃어갔습니다. 1930년에는 야당인 입헌정우회가 입헌민정당 내각을 흔들기 위해 해군 일부와 손잡고 런던해군군축조약(1차 세계대전 후 주요 국가들의 군비 경쟁 제한을 위해 1930년 체결된 조약으로, 함선 건조 제한과 잠수함 무장 제한이 주 내용이다. 영국과 미국, 일본이 참여했다) 비준을 둘러싸고 '통수권 간범(干犯·남의 권리를 침범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며 정부를 격렬히 공격했습니다. 정부는 런던해군군축조약을 간신히 비준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1935년 헌법학자이자 귀족원의원인 미노베 다쓰키치의 '천황기관설(일본 제국 헌법 하에서 확립된 일본의 헌법 학설. 통치권(주권)은 법인인 국가에 있으며, 천황은 그러한 국가의 '최고 기관'으로서 다른 기관의 도움을 얻어 통치권을 행사한다는 학설)'에 대해 입헌정우회가 정부 공격 소재로 삼아 이를 비난했고, 군부도 휘말린 정치문제로 발전했습니다. 당시 오카다 게이스케 내각은 학설상의 문제는 "학자에게 맡기는 것 외에 방법이 없다"며 이 문제로부터 정치적으로 거리를 두려 했지만, 결국에는 군부의 요구에 굴복해 이전까지 통설로 여겨졌던 천황기관설을 부정하는 국체명징성명(일본 제국주의가 천황 중심의 국가체제를 분명히 하기 위해 1935년 발표한 성명. 통치권의 주체는 천황임을 강조하고, 천황기관설과 같이 천황이 '기관'에 불과하다는 주장을 부정함)을 두 차례에 걸쳐 발표하고, 미노베의 저작은 발행 금치 처분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해서 정부는 군부에 대한 통제를 잃어갔습니다.

사이토 다카오(1870~1949) 전 일본 중의원 의원. 반군연설을 했다가 의회에서 제명됐다. 위키피디아

사이토 다카오(1870~1949) 전 일본 중의원 의원. 반군연설을 했다가 의회에서 제명됐다. 위키피디아


[의회의 문제]

본래 군에 대한 통제를 담당해야 할 의회도 그 기능을 잃어갔습니다.

그 가장 대표적인 예가 사이토 다카오 중의원 의원 제명 문제였습니다. 사이토 의원은 1940년 2월 2일 중의원 본회의에서 전쟁이 수렁에 빠져든 상황을 비판하고 전쟁의 목적에 대해 정부를 엄하게 추궁했습니다. 이른바 반군연설입니다. 육군은 연설이 육군을 모욕하는 것이라며 격렬히 반발하고 사이토 의원의 사직을 요구했으며, 이에 많은 의원이 동조해 찬성 296표, 반대 7표의 압도적 다수로 사이토 의원은 제명되었습니다. 이는 의회 안에서 의원으로서의 역할을 다하려 한 드문 사례였지만, 당시 의사록은 지금도 그 3분의 2가 삭제된 채로 남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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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회에 의한 군에 대한 통제 기능으로서 극히 중요한 예산심의에서도 당시 의회는 군에 대한 견제 기능을 다했다고는 전혀 말하기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1937년 이후 임시군사비특별회계가 설치되었고, 1942~45년에 걸쳐 군사비의 거의 전부가 이 특별회계로 계상되었습니다. 그 특별회계 심의를 할 때는 예산서에 내역이 제시되지 않았고, 중의원·귀족원 모두 기본적으로 비밀 회의로 심의가 진행되었으며, 심의시간도 극히 짧아 대체로 심의라는 이름에 걸맞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전황이 악화되고 재정이 핍박해지는 가운데에서도 육군과 해군은 조직의 이익과 체면을 걸고 예산 확보를 둘러싸고 격렬히 다퉜습니다.

이에 더해 다이쇼 후기부터 쇼와 초기에 걸쳐 15년간 현역 총리 3명을 포함한 많은 정치인이 국수주의자나 청년장교들에게 암살당한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암살당한 이들은 모두 국제 협력을 중시하고 정치로 군을 통제하려 한 정치가들이었습니다. 5·15사건이나 2·26사건을 포함한 이러한 사건들이 그 이후 의회나 정부 관계자를 포함한 문민이 군의 정책과 예산에 대해 자유롭게 논의하고 행동하는 환경을 크게 저해한 것은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만보산 사건 후 만주사변의 직접적인 계기가된 류타오거우 사건의 진상을 조사하고있는 국제연맹 조사단. 한국일보 자료사진

만보산 사건 후 만주사변의 직접적인 계기가된 류타오거우 사건의 진상을 조사하고있는 국제연맹 조사단. 한국일보 자료사진


[미디어의 문제]

또 하나 경시해서는 안 되는 것이 미디어(언론)의 문제입니다.

1920년대 미디어는 일본의 대외팽창에 비판적이었고, 저널리스트 시절의 이시바시 단잔(언론인 출신 일본 55대 총리)은 식민지를 포기해야 한다는 주장을 폈습니다. 그러나 만주사변이 일어난 무렵부터 미디어의 논조는 적극적인 전쟁 지지로 바뀌었습니다. 전쟁 보도가 "팔렸기" 때문이며, 신문 각사는 크게 발행부수를 늘렸습니다.

1929년 미국의 대공황을 계기로 구미 경제가 크게 타격을 입어 자국 경제 보호를 이유로 고관세정책을 취했기 때문에 일본의 수출은 큰 타격을 받았습니다. 심각한 불황을 배경 중 하나로 민족주의가 고양되어 독일에서는 나치가, 이탈리아에서는 파시스트당이 대두했습니다. 주요국 중 소련만이 발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자 사상계에서도 '자유주의, 민주주의, 자본주의 시대는 끝났고 영미 시대는 끝났다'는 논조가 퍼져 전체주의나 국가사회주의를 받아들이는 토양이 형성되어 갔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관동군 일부가 만주사변을 일으켜 불과 1년 반 남짓 만에 일본 본토의 수 배에 달하는 토지를 점령했습니다. 신문은 이를 대대적으로 보도했고, 많은 국민이 이에 현혹되어 민족주의는 더욱 고조되었습니다.

일본 외교에 대해 요시노 사쿠조는 만주사변에서의 군부 움직임을 비판했고, 기요자와 기요시는 마쓰오카 요스케의 국제연맹 탈퇴를 엄하게 비판하는 등 일부 날카로운 비판도 있었지만, 그 후 1937년 가을 무렵부터 언론통제 강화로 정책에 대한 비판은 봉쇄되고 전쟁을 적극 지지하는 논조만 국민에게 전달되게 되었습니다.

[정보수집·분석의 문제]

당시 정부를 비롯한 우리나라가 국제정세를 올바르게 인식하고 있었는지도 재검토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소련을 대상(적)으로 하는 군사동맹을 독일과 교섭하고 있던 도중에 1939년 8월 독소불가침조약이 체결되자, 당시 히라누마 기이치로 내각은 "유럽의 천지는 복잡괴기한 새 정세를 낳았다"며 총사직합니다. 국제정세, 군사정세에 대해 충분한 정보를 수집할 수 있었는지, 얻어진 정보를 올바르게 분석할 수 있었는지, 적절히 공유할 수 있었는지 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오늘날에 대한 교훈]

전후 일본에서 문민통제는 제도로서는 정비돼 있습니다. 일본국헌법상 내각총리대신과 기타 국무대신(장관)은 문민이어야 한다고 규정되어 있습니다. 또한 자위대는 자위대법상 내각총리대신의 지휘 하에 놓여 있습니다. 내각총리대신이 내각의 수장이라는 것, 내각이 국회에 대해 연대하여 책임을 진다는 것이 일본국헌법에 명기되어 내각의 통일성이 제도상 확보되었습니다. 나아가 국가안전보장회의가 설치돼 외교와 안전보장의 종합조정이 강화되었습니다. 정보수집·분석에 관한 정부 체제도 개선되었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시대에 따라 더욱 진전이 요구됩니다.

정치와 군사를 적절히 통합하는 구조가 없고 통수권 독립의 명분 하에 군부가 독주했다는 과거의 쓰라린 경험을 바탕으로 제도적 조치는 이루어졌습니다. 한편으로는 이것들은 어디까지나 제도일 뿐, 적절히 운용하지 않으면 그 의미를 이루지 못합니다.

정치 측은 자위대를 운용할 능력과 식견을 충분히 갖출 필요가 있습니다. 현재의 문민통제 제도를 올바르게 이해하고 적절히 운용해 가는 부단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무책임한 포퓰리즘에 굴하지 않고, 대세에 휩쓸리지 않는 정치가로서의 긍지와 책임감을 가져야 합니다. 자위대는 우리나라를 둘러싼 국제군사정세나 장비, 부대 운용에 대해 전문가집단으로서의 입장에서 정치에 대해 적극적으로 설명하고 의견을 말하는 것이 요구됩니다.

정치에는 조직의 분열을 극복하고 통합하는 책무가 있습니다. 조직이 할거하고 대립하여 일본의 국익을 잃어버리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육군과 해군이 서로의 조직 논리를 최우선으로 하여 대립하고, 각각의 내부에서조차 군령과 군정이 연계를 결여하여 국가로서의 의사를 일원화하지 못한 채 국가 전체가 전쟁으로 이끌려간 역사를 교훈으로 삼아야 합니다.

정치는 항상 국민 전체의 이익과 복지를 생각하고, 장기적 시점에 선 합리적 판단을 해야 한다는 것을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책임 소재가 명확하지 않고 상황이 막다른 골목에 이를 경우에는 성공 가능성이 낮고 위험이 높다 해도 용맹한 목소리, 대담한 해결책이 받아들여지기 쉽습니다. 해군의 나가노 오사미 군령부총장은 개전을 수술에 비유하며 "상당한 걱정은 있지만 이 큰 병을 치유하려면 큰 결심을 갖고 국난 배제에 결의하는 것 외에 방법이 없습니다", "싸우지 않으면 망국이라고 정부는 판단했지만, 싸우는 것 또한 망국으로 이어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싸우지 않고 나라가 망한 경우는 영혼까지 잃은 진정한 망국이다"라고 말했고, 도조 히데키 육군대신도 고노에 후미마로 총리에게 "인간, 때로는 기요미즈(교토의 사찰) 무대에서 눈을 감고 뛰어내리는 것도 필요하다"고 다그쳤다고 합니다. 이처럼 냉정하고 합리적인 판단보다 정신적·정서적 판단을 중시해 나라가 나아갈 방향을 잘못 잡은 역사를 되풀이해서는 안 됩니다.

정부가 잘못된 판단을 하지 않도록 저지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 의회와 미디어입니다.

국회에는 헌법에 의해 부여된 권능을 행사하는 것을 통해 정부 활동을 적절히 견제하는 역할을 다하는 것이 요구됩니다. 정치는 일시적인 여론에 영합하고 인기영합 정책으로 움직여 국익을 손상시키는 당리당략과 자기 보신으로 치달아서는 결코 안 됩니다.

사명감을 가진 저널리즘을 포함한 건전한 언론 공간이 필요합니다. 지난 대전에서도 미디어가 여론을 선동하여 국민을 무모한 전쟁으로 유도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과도한 상업주의에 빠져서는 안 되며, 편협한 민족주의, 차별이나 배외주의를 허용해서는 안 됩니다.

아베 전 총리가 귀중한 생명을 잃은 사건을 포함해 폭력에 의한 정치의 유린, 자유로운 언론을 위협하는 차별적 언사는 결코 용인할 수 없습니다.

이 모든 것의 기반이 되는 것은 역사에서 배우는 자세입니다. 과거를 직시하는 용기와 성실함, 타자의 주장에도 겸허히 귀 기울이는 관용을 가진 본래의 자유주의, 건전하고 강인한 민주주의가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윈스턴 처칠이 갈파한 대로 민주주의는 결코 완벽한 정치형태가 아닙니다. 민주주의는 비용과 시간을 필요로 하며, 때로 과오를 범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항상 역사 앞에 겸허해야 하며, 교훈을 깊이 가슴에 새겨야 합니다.

자위와 억지에 있어 실력조직(자위대나 군을 의미)을 보유하는 것은 극히 중요합니다. 저는 억지론을 부정하는 입장에 설 수 없습니다. 현재의 안보 환경 하에서 그것은 책임 있는 안보정책을 수행하기 위한 현실입니다. 동시에 그 국가에서 비할 데 없는 힘을 가진 실력조직이 민주적 통제를 넘어 폭주한다면 민주주의는 순식간에 붕괴할 수 있는 취약한 것입니다. 한편 문민 정치인이 판단을 그르쳐 전쟁으로 돌진해 가는 일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 문민통제, 적절한 정·군 관계의 필요성과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정부, 의회, 실력조직, 미디어 모두가 이를 항상 인식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이토 다카오 의원은 반군연설에서 세계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이며, 정의가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강자가 약자를 정복하는 것이 전쟁이라고 논하고, 이를 무시하고 성전의 미명에 숨어 국가백년대계를 그르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며 리얼리즘에 기초한 정책의 중요성을 주장하다가 중의원에서 제명되었습니다. 이듬해 중의원 방공법위원회에서 육군성은 '공습 시 시민이 피난하는 것은 전쟁계속 의지의 파탄이 된다'며 이를 부정했습니다. 둘 다 먼 과거의 일이긴 하지만, 의회 책무의 방기, 정신주의의 횡행과 인명·인권경시의 두려움을 전해주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역사와 정면으로 마주하지 않고서는 밝은 미래를 열 수 없습니다. 역사에서 배우는 중요성은 우리나라가 전후 가장 엄중하고 복잡한 안보 환경에 놓여 있는 지금이야말로 재인식되어야 합니다.

전쟁의 기억을 가진 사람들의 수가 해마다 적어지고 기억의 풍화가 우려되는 지금이기에 젊은 세대도 포함해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지난 대전이나 평화의 양상에 대해 능동적으로 생각하고 장래에 살려나감으로써 평화국가로서의 초석이 한층 강화되리라 믿습니다.

저는 국민 여러분과 함께 지난 대전의 여러 교훈을 바탕으로 두 번 다시 그러한 참화를 되풀이하지 않도록 가능한 한 노력해 나가겠습니다.

레이와 7년(2025년) 10월 10일

내각총리대신

이시바 시게루

한국일보 기자 hankookilbo_com@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