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남준의 텍스트 악보 |
(서울=연합뉴스) 박의래 기자 = '외딴 기차역의 소리(소음과 안내방송)', 'TV 뉴스', '하와이 말', '흥분해 정신나간 내 목소리'.
의미를 파악하기 어려운 이들 문장은 사실 악보다. 비디오 아트 선구자 백남준(1932∼2006)이 1961년 쾰른에서 작성한 한 장짜리 악보 '20개의 방을 위한 교향곡'이다. 방으로 추정되는 사각형 모양의 선 위로 음계나 음표의 기능을 대신하는 그림과 글이 암호처럼 나열돼 있다.
백남준은 이 작업에 대해 "만지기, 놀기, 듣기, 발차기, 채찍질까지 모두 포함한 토털 매체"라며 "관객이 저마다 방을 마음대로 옮겨 다니며 다른 소리를 택할 수 있다"고 설명한 바 있다.
백남준의 텍스트 악보 |
서울시 관악구 서울대학교미술관에서 1일 개막한 기획전 '차원확장자: 시·이미지·악보·코드'는 시각으로 보여주는 미술 작품을 통해 청각이나 시간의 흐름 등 다른 차원으로 확대되는 작품들을 선보인다.
이상과 백남준, 구자명, 김호남, 김은형, 정수정, 윤향로, 기민정, 전소정 등 작가 9명의 작품 약 60점이 소개된다.
전시에서 선보인 백남준의 '20개의 방을 위한 교향곡'은 악보를 소리로 구현하는 대신 악보 자체를 공개하고 전시 공간에 펼쳐놔 관람객이 지휘자처럼 전체를 조망할 수 있도록 했다.
이상의 시 '오 마가쟁 드 누보테'(AU MAGASIN DE NOUVEAUTES) |
전시는 '사각안의사각안의사각안의사각 안의 사각.'으로 시작하는 이상의 시 '오 마가쟁 드 누보테'(AU MAGASIN DE NOUVEAUTES)로 시작한다.
'오 마가쟁 드 누보테'는 프랑스어로 새로운 상품이 있는 상점이라는 뜻이다. 후대 평론가들은 당시 경성 미쓰코시 백화점을 상징하고, 그 안에 진열된 상품과 그 속을 오가는 사람들을 표현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조선건축회 기관지 '조선과 건축'(朝鮮と建築)에 실린 일본어 작품으로 현재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에 소장돼 있다.
전시를 기획한 오진이 학예사는 "당대의 기술적 과학적 사고를 예술 언어로 번역한 대표적인 사례"라며 "근대와 현대, 문학과 미술, 아날로그와 디지털을 가로지르는 작품이어서 전시의 첫 작품으로 배치했다"고 설명했다.
기획전 '차원확장자' 간담회 |
작가 구자명의 조각 작품들은 컴퓨터 프로그램 소스코드를 시각화한 것이다. 컴퓨터라는 하드웨어를 작동시키는 운영체제 프로그램 소스코드와 이를 방해하는 컴퓨터 바이러스 소스코드를 시각화해 함께 배치했다.
프로그램과 바이러스 이름이 각각 '구름'이나 '토끼' 같은 자연을 상징하는 단어라는 점은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 자연과 인간이 서로 얽혀 있음을 상징한다.
김호남의 '해저 광케이블을 위한 에코챔버 시스템'은 영상 작품이다. 9대의 모니터는 각각 전 세계 9개 도시 서버와 연결됐다. 가깝게는 일본 도쿄, 멀게는 브라질 상파울루에 있는 서버와 이어져 있다.
전시장 컴퓨터에서 내보낸 영상들은 각 도시의 서버를 거쳐 다시 전시장에 있는 모니터에 표출된다. 도시마다 거리 차이가 있어 같은 영상이지만 가까운 도시 서버와 연결된 모니터부터 순차적으로 영상이 재생되도록 했다. 디지털 정보가 실제로는 해저 광케이블이라는 물리적인 공간을 통해 이동한다는 점을 직관적으로 보여준다.
깊은 바다에 들어온 듯 |
이 밖에도 철학적 개념과 신화를 엮어낸 김은형의 페인트 벽화나 종이와 유리로 회화적 공간을 확장한 기민정의 회화 등 다양한 작가들의 작품을 관람할 수 있다.
심상용 서울대미술관장은 "현대 미술은 보이지 않는 것을 포착해 보이는 세계로 가져와 우리의 시각과 의식의 차원을 확장하는 작업이라고 생각한다"며 "많은 관객이 전시를 통해 생각의 차원을 넓히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전시는 11월 23일까지.
기획전 '차원확장자' 개최 |
laecorp@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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