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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철 “미술이 문학에 빚져”…김정환 “더 좋은 문학으로 보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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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철 “미술이 문학에 빚져”…김정환 “더 좋은 문학으로 보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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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작가회의(작가회의)가 화가 30여명의 작품 지원을 받아 오는 22~28일 마련하는 ‘작가회의 예술동행’ 전시를 앞두고 시인 김정환(왼쪽)과 신학철 화백이 9월29일 오후 서울 마포구 망원동 작가회의 사무실에서 대담을 나누고 있다. 정용일 선임기자 yongil@hani.co.kr

한국작가회의(작가회의)가 화가 30여명의 작품 지원을 받아 오는 22~28일 마련하는 ‘작가회의 예술동행’ 전시를 앞두고 시인 김정환(왼쪽)과 신학철 화백이 9월29일 오후 서울 마포구 망원동 작가회의 사무실에서 대담을 나누고 있다. 정용일 선임기자 yongil@hani.co.kr


진보적 문인 단체인 한국작가회의(작가회의)는 1974년 11월18일 자유실천문인협의회라는 이름으로 출범했다. 김지하를 비롯한 구속 문인 석방과 언론·출판·표현의 자유 등을 요구하며 활동을 시작한 이 단체는 6월항쟁 뒤인 1987년 9월 민족문학작가회의로 확대 개편했고, 2007년 지금의 이름으로 바꾸었다. ‘자유’에서 ‘민족’을 거쳐 ‘한국’으로 지향과 정체성을 담은 단체명에는 변화가 있었지만, 진보적 가치를 옹호하며 사회적 연대를 표방하는 성격에는 변함이 없다. 또 다른 일관성이라면 창립 반세기가 넘는 연혁에도 불구하고 그때나 지금이나 누추한 셋방살이를 면치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들어야 할 것이다. 작가회의가 ‘작가회의 예술행동’이라는 이름으로 ‘한국문학의 집’ 기금 마련 우정전(기획·진행 김준기 전 광주시립미술관장)을 준비하는 까닭이다.



오는 22~28일 서울 종로구 인사동 토포하우스 1층에서 여는 이 전시에는 신학철, 이종구, 홍성담, 이철수 등 화가 30여명이 참가한다. 대부분이 민족미술인협회(민미협) 소속 미술인들로, 작가회의 문인들과는 민주화운동 전선에서 함께 싸웠던 예술적 동료들이기도 하다. 전시 이름에 ‘우정’이 들어간 이유다. ‘사노라면’이라는 노래 가사처럼 여전히 비가 새는 허름한 셋방을 사무실로 쓰고 있는 작가회의 문인들이 ‘한국문학의 집’이라는 든든한 보금자리를 꾸리는 데에 미술계 동료들이 발 벗고 나선 것이다.



신학철 화백. 정용일 선임기자 yongil@hani.co.kr

신학철 화백. 정용일 선임기자 yongil@hani.co.kr


이번 전시에 ‘작은 연못’이라는 유화 작품을 출품하는 신학철 화백과 작가회의 사무총장을 지낸 김정환 시인이 지난달 29일 서울 마포구 망원동 작가회의 사무실에서 만났다. 두 사람은 2014년 신 화백의 대작 ‘한국현대사―갑순이와 갑돌이’(130×200㎜ 8폭, 120×200㎜ 8폭)에 김 시인이 글을 써서 단행본으로 출간하는 등 장르와 연배를 넘나드는 교유를 이어오고 있다. 각각 민미협과 작가회의의 산 증인인 두 예술인은 이번 기금 마련전의 의미와 함께 문인들과 미술인들의 오랜 우정에 관해서도 따뜻하고 흥미로운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김정환(이하 김)=제가 1989년 9월에 노동자문화예술운동연합(노문연)이라는 단체를 만들 때 신학철 선생님이 느닷없이 거금 500만원을 보내오셨어요. 받을 수 없다고 돌려드렸더니, ‘노동자 운동을 하려거든 방이라도 얻어야지’라며 그 돈을 다시 보내시더군요. 저는 ‘노동자 운동이니 노동자들이 돈을 내야지 왜 선생님이 내시냐’며 다시 돌려보냈죠. 그로부터 7~8년쯤 뒤에 노문연의 문을 닫게 되어 빚을 정리하려고 보니 딱 500만원이 모자라는 거예요. 할 수 없이 신 선생님께 연락드렸더니, ‘한달만 기다려 달라’고 하시고는 그림 하나를 그려서 판 돈 500만원을 주시더군요. 오늘 신학철 선생님과 마주 앉아 있자니 그때 일이 먼저 떠오릅니다.



신학철(이하 신)=사실 그때는 급하게 그리느라 그림이 마음에 들지 않았어요. 결국 나중에 다른 그림을 그려서 원래 그림과 바꿔 소장자께 드렸죠.(웃음) 제가 전교조나 작가회의 같은 단체들의 기금 마련전에 수십번 참여했는데, 처음에는 똥 그림을 많이 냈어요. 똥이 거름이 되어서 땅을 소생시키는 것처럼 민주화운동하는 사람들이 우리 사회 민주화의 거름이라는 뜻을 담은 거였죠. 생태적 의미도 담았고요. 처음엔 더럽다며 사가는 사람이 없다가 나중엔 인기작이 되었죠.



김정환 시인. 정용일 선임기자 yongil@hani.co.kr

김정환 시인. 정용일 선임기자 yongil@hani.co.kr


김=신 선생님은 민중미술의 질을 담보해 오신 분이자 기금 마련전에 누구보다 많은 작품을 기증해 주신 분입니다. 작고한 백기완 선생님이 하시던 통일문제연구소는 거의 정기적으로 화가들의 지원을 받았던 것으로 압니다.



신=백 선생님이 자전적 회고록 ‘부심이의 엄마생각’을 내면서 표지를 그려 달라고 해서 어린 백 선생이 고추를 내놓고 엄마를 부르며 우는 모습을 그렸어요. 백 선생이 그걸 보고 웃으셨죠. 고맙다고 밥과 술을 사는데, 제가 술김에 ‘헛소리’를 했어요. 책 안에 삽화가 있으면 좋겠다는 거였죠. 결국 재판을 낼 때 삽화를 그리겠다고 약속했는데, 막상 그리자니 단색화로는 성이 안 차서 유화로 그려서 드렸죠. 나중에 백 선생이 그걸로 전시를 한다기에 큰 그림을 보태서 30여점으로 전시를 했습니다.



김=우리나라 화가들의 기금 마련전 참여 역사는 혁혁하고 의미가 있습니다. 저도 작가회의 기금 마련전 기획을 몇번 한 적이 있는데, 그림은 무얼 소재로 하든 간에 그 자체가 현대화된 형태로 오기 때문에 ‘배워야겠다’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서로에게 긍정적 영향을 줄 수 있는 장르와 장르의 만남이 필요합니다.



신=제가 개인적으로 문학과 만나게 된 건 87년 무렵입니다. 당시 제가 주재환 선생과 민미협 공동대표로 있었는데, 6월항쟁 전부터 작고한 채광석 시인이 문화 6단체 대표들을 모았어요. 문학, 미술, 음악, 출판, 연행, 언론 등이었죠. 특히 문학은, 여러 예술 장르 중에서도 70년대에 가장 치열하게 싸운 장르입니다. 저는 70년대를 생각하면 칠흑 같은 어둠의 이미지가 떠오릅니다. 그런 시기에 문학이 앞서서 싸우며 고초도 많이 겪었고, 80년대엔 우리 미술도 문학에서 많이 배웠습니다. 그래서 2014년 작가회의 40주년 행사에서 제가 ‘작가의 벗’ 11인에 선정되었을 때에도 ‘우리 미술은 문학에 많은 빚을 졌다’는 발언을 하기도 했죠.



김=그런데 수난의 민주화도 필요합니다.(웃음) 사실은 여러 예술 장르 중에서도 미술이 탄압을 가장 많이 받습니다. 가시적이기 때문이죠. 그렇기 때문에 위축될 수밖에 없지만, 폭발할 때에는 또 그만큼 위력이 있습니다.



신=이런 기금전에 참여해 온 지도 벌써 40여년이 되는데, 갈수록 기금전이 잘 안 되는 것 같아 걱정입니다.



김=작가회의는 30주년 때도 기금전을 했고 40주년 때도 했죠. 30주년 당시에는 개막 당일에 그림을 다 팔 정도로 반응이 좋았습니다. 그런데 40주년 때에는 상황이 좋질 않아서 살 사람을 미리 확보해 놓고 그림을 받느라 몇점 못 팔았죠. 올해는 화가들도 대대적으로 참여하고 작가회의 안에도 기금위원회를 구성해 체계적으로 판매 구상을 세우고 있다니 잘되기를 기대합니다.



신=돌이켜보면 저는 지난 엄혹한 시대를 제 성질대로, 거짓말 안 하고 살아온 것 같습니다. 앞으로도 그냥 제 성질대로 살다 보면 바른 길로 가지 않을까 싶어요. 한강 작가의 소설을 보면 거의 그림에 가깝더군요. 문장이 사물 속으로 들어가는 것 같습니다. 어떻게 글을 그렇게 쓸 수 있나 싶어요.



신학철, ‘작은 연못’, 45.3×53㎝, 캔버스에 유화, 2025.

신학철, ‘작은 연못’, 45.3×53㎝, 캔버스에 유화, 2025.


김=신 선생님은 제가 아는 화가 중에 문학을 가장 역동적으로 이해하는 분인 것 같습니다. 황지우 시 ‘활엽수림에서’에 “그 세상이, 먼저 건드렸어, 우리를”이라는 구절이 있는데, 선생님이나 저의 지난 삶이 그런 것 아니었나 싶습니다. 다만, 무슨 일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라도 ‘빠지지’ 않는 게 중요하다고 봅니다. 민중이든 여성이든 (지나치게) 빠져서 소재가 되면 망한다는 걸 후배들에게 전하고 싶어요.



신=제가 이번 기금 마련전에 출품한 작품은 ‘작은 연못’이라는 10호짜리 유화입니다. 제가 전에도 그렸던 질경이 옆에 작은 연못을 그려 넣은 거죠. 김민기의 노래도 있습니다만, 작은 연못이 썩어도 질경이는 튼튼하게 자란다는 의미를 담았습니다. 질경이는 곧 민중의 상징이죠. 김정환 선생은 서울 정서라서 질경이 그림을 안 좋아할 수도 있겠습니다만.(웃음)



김=아닙니다! 신 선생님에게도 서울 정서가 있어요. 식물을 그려도 강렬하잖아요!



신=우리 진보 쪽 사람들은 물질에 대해 너무 무지하고 무심한 게 아닌가 싶어요. 유물론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 아닙니까. 작가회의도 그렇고 민미협도 그렇고, 중요한 시민·사회단체가 번듯한 사무실 하나 없다는 게 말이 되나요? 엉터리 보수단체의 사무실은 곳곳에 넘쳐 나는데 말입니다. 이런 일과 관련해서는 우리가 정부를 압박해야 해요.



김=이번 기금 마련전은 말하자면 작가회의가 또 민미협에 빚을 지는 셈인데, 부디 좋은 성과가 있기를 바랍니다. 문학 하는 이들이 대오각성해서 미술로부터 배울 건 배워서 앞으로 더 좋은 문학으로 보답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이번 기금 마련전에는 값비싼 작품들뿐만 아니라 작가회의 회원들을 비롯해 주머니가 가벼운 이들을 위한 한정판 판화 작품 등도 나올 예정이다. 22일 오후 3시 개막식이 열리며 매일 오후 4시에는 ‘시·서·화·음 콘서트―시와 그림과 노래가 있는 예술의 낮’이라는 이름으로 부대행사가 열려 민중가수 이지상, 손병휘, 손현숙 등의 공연과 이야기 마당도 펼쳐진다.



김정환 시인(왼쪽)과 신학철 화백이 9월29일 한국작가회의 사무실에서 대담을 나누기에 앞서 손을 맞잡고 사진을 찍고 있다. 정용일 선임기자 yongil@hani.co.kr

김정환 시인(왼쪽)과 신학철 화백이 9월29일 한국작가회의 사무실에서 대담을 나누기에 앞서 손을 맞잡고 사진을 찍고 있다. 정용일 선임기자 yongil@hani.co.kr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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