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동찬 경계인의몫소리연구소장(맨 오른쪽)이 지난 25일 서울 영등포구 대림역 5번 출구 앞에서 극우 세력의 ‘혐중 집회’를 규탄하는 기자회견을 준비하고 있다. 정인선 기자 |
“짱× 아웃!” “화교 혜택, 자국민 역차별!”
지난 25일 저녁 서울 구로구 대림역 앞에선 논리도 맥락도 없이 그저 상처를 내려는 혐오의 말들이 허공을 갈랐다. 같은 시각 같은 장소에서 이주민과 원주민, 활동가 150여명이 모였다. 혐오의 언어를 듣다못해 부르르 떠는 한 주민을 박동찬(29) 경계인의몫소리연구소장이 어루만졌다. “그래도 우리는 거칠게 하면 안 돼요.” 이윽고 박 소장이 부드럽고 단호한 소리로 외쳤다. “오늘 대림동이 그들의 표적이라면, 내일은 또 다른 동네, 또 다른 사람이 그 화살을 맞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습니다. 혐오의 사슬을 지금 여기서 끊어내야 합니다.” 외침에도 아랑곳없이 민초결사대 등 혐중 단체는 이날 저녁 대림동을 과시하듯 행진했다.
혐오, 상처, 다짐이 한데 엉킨 소란이 동네를 휩쓸고 간 밤, 한겨레는 박 소장을 만났다. 중국 출신 이주민 인권운동가인 그에게 ‘2025년 대림동’은 어떤 의미인지 듣고 싶었다. 그는 지난 7월 대림동에서 처음 혐중 집회가 열린 뒤 주민들과 소통하며 맞불 기자회견, 지역사회 간담회 등을 주도했다.
민초결사대 등 극단적 보수 성향 단체 관계자들이 25일 저녁 서울 영등포구 대림역 4번 출구 앞에서 연 반중 시위 참가자가 ‘화교 혜택 들어봤어? 자국민 역차별’이라고 적은 손팻말을 들고 있다. 정인선 기자 |
박 소장이 나고 자란 중국 선양에서 한국에 온 건 2015년, 19살 때 연세대 국문학과에 입학하면서다. 그의 가족은 일제강점기에 그곳으로 이주한 중국동포였다. 그는 만주와 조선, 일본을 횡단하며 경계인으로 산 윤동주 같은 시인이 되고 싶었다. 유학까지 와서 문학의 꿈을 놓고 인권운동에 나선 계기는 “딱 짚지 못하겠다”고 했다. “2016년 사드 사태, 2020년 코로나19 등 국면마다 중국 출신으로서 체감하는 차별들이 있었어요. 그럴 때 이주민 개인 자격으로 ‘인정투쟁’을 한 거였어요.” 3년 전 비로소 연구소이자 인권단체인 ‘경계인의몫소리연구소’를 만들며 소속 단체가 생겼다.
그렇게 맞닥뜨린 2025년 대림동을, 박 소장은 “혐오의 어떤 정점”이라고 했다. “심지어 탄핵 당한 대통령이 계엄의 명분을 노골적으로 이주민에게서 찾았습니다. 지금 고삐 풀린 혐오를 바로잡지 않으면 진짜 물리적인 가해로 진화할 위험도 있다고 생각해요.” 주류 정치인부터 아스팔트 단체에 이르기까지 조직적으로 ‘중국의 위협’을 선동하고, 그 분노를 쏟을 표적을 이주민으로 삼았다. 그는 다시금 “지금 혐오를 방임하면 끊임없이 재생산돼 다른 지역, 다른 소수자로 향하게 된다”고 걱정했다. 중국동포인 그는, 자신이 생각하는 ‘마지막 방어선’이었다.
박동찬 경계인의몫소리연구소 소장이 지난 7월11일 서울 영등포구 대림역 9번 출구 앞에서 열린 ‘민주주의 파괴하고 혐오 선동 일삼는 극우세력 물러가라’ 긴급 기자회견에서 발언하고 있다. 민주노동당 제공 |
이날 혐중 시위에 맞선 기자회견에 참여한 시민 상당 수는 중국동포 출신 이주민이었다. 전에 없던 모습이다. 박 소장은 “주민들이 원래 정치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중국에는 시민운동이 거의 없어 익숙하지도 않고, 정치활동에 참여했다가 강제 출국을 당할 수 있다는 공포도 있다”며 “이렇게 많은 당사자가 거리에 나온 것은 대림동에서도 처음 있는 일”이라고 했다. 정점에 이른 혐오에 대한 이주민들의 위기감 또한 공포를 이겨낼 만큼 커진 셈이다.
그나마 새 정부가 혐중 시위의 위협 행위에 엄단 의지를 밝힌 것을 두고 박 소장은 “가뭄에 단비 같은 것”이라며 반색했다. 다만 이렇게 덧붙였다. “혐오 시위를 인권침해로 규정하고 제재할 법이 없어, 정부가 당장 무엇을 할 수는 없을 거예요. 오늘 혐중 시위도 그대로 진행됐잖아요. 그래서 입법이 필요합니다.” 경계인의몫소리연구소는 특정 집단을 대상으로 한 혐오·폭력 집회를 규제할 법이 필요하다며 법률 제정을 위한 서명운동을 진행하고 있다.
정인선 기자 ren@hani.co.kr
▶▶[한겨레 후원하기] 시민과 함께 민주주의를!
▶▶민주주의, 필사적으로 지키는 방법 [책 보러가기]
▶▶한겨레 뉴스레터 모아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