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7년 9월 23일
장제스(왼쪽)와 마오쩌둥. (출처: 傑克 威克爾斯, 1945, Public domain, via Wikimedia Commons) |
(서울=뉴스1) 김정한 기자 = 1937년 9월 23일, 중국 국민당 총통 장제스(蔣介石)가 공산당과의 제2차 국공합작을 공식적으로 인정하며, 일본 제국주의에 맞서는 항일 통일전선이 마침내 구축됐다.
1927년, 장제스는 공산당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을 시작하며 제1차 국공합작을 파기했다. 이후 10년간 국민당과 공산당은 피비린내 나는 내전을 이어갔다. 그러나 1931년 만주사변 이후 일본의 침략이 본격화되자 중국 내에서는 '선외멸치(先外滅恥), 후내안정(後內安定)'이라는 구호 아래 항일 민족주의가 고조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시대적 요구 속에서 공산당은 1935년 '8.1 선언'을 통해 "내전을 중단하고 일본 제국주의에 공동으로 항전하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장제스는 "선공산당 멸망 후 항일" 입장을 고수했다.
내전 종식의 결정적 계기는 바로 시안 사건이었다. 1936년 12월, 장제스는 대공산당 작전을 독려하기 위해 시안을 찾았으나, 동북군동북군 사령관 장쉐량(張學良)과 서북군 사령관 양후청(楊虎城)에게 감금당했다. 이들은 장제스에게 내전을 중단하고 항일전에 나설 것을 강력히 촉구했다. 결국 저우언라이(周恩來)의 협상 중재 끝에 장제스는 공산당과의 합작에 동의하며 풀려났다.
시안 사건 이후 장제스는 국공합작에 소극적인 모습을 보였다. 1937년 7월 7일 루거우차오(蘆溝橋) 사건을 기점으로 중일전쟁이 전면전으로 확대되자, 장제스는 더 이상 합작을 미룰 수 없다고 판단했다. 일본의 공세에 밀려 수도 난징(南京)마저 위협받는 절박한 상황에서 그는 마침내 공산당과의 협력을 공식화했다.
이번 국공합작은 중국의 항일 저항을 한층 강화하는 동시에, 향후 중국 근현대사의 흐름을 완전히 바꾸는 변곡점이 됐다. 하지만 제2차 국공합작은 1945년 8월 일본이 패망하면서 결렬됐다. 특히 공산당은 만주를 포함한 중국 북부 지역에서 세력을 빠르게 확장했고, 국민당은 대만으로 쫓겨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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