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가을 하늘 아래 팜파스그라스의 모습. 천리포수목원 제공 |
황금비 | 천리포수목원 나무의사
천리포수목원이 있는 충남 태안군은 없는 게 많은 동네다. 일단 올해 초 인구 6만명 선이 붕괴했고, 인구 소멸 지역 중에서도 심각성이 가장 높은 고위험 지역에 속한다. 버스를 타면 할머니 할아버지 승객들이 대부분이고, 수목원의 젊은 직원들 가운데 출산을 앞둔 직원들은 대부분 인근 서산시나 당진시의 산부인과에 원정 진료를 다닌다. 상업 영화관은 없고, 군에서 운영하는 ‘태안 작은영화관’에서 매주 신작 영화를 틀어준다. 개인적으로 ‘도시’의 기준이라고 생각하는 프랜차이즈인 맥도날드와 스타벅스도 없다. 가끔 친구들이 스타벅스 기프티콘을 선물해주면 수목원에서 40㎞ 정도 떨어진 서산 시내에 나가서 써야 한다.
천리포수목원 어린이정원에 가득 핀 팜파스그라스 사이를 탐방객이 거닐고 있다. 천리포수목원 제공 |
없는 것이 많은 이곳에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최대 규모의 식물 분류군을 관리하는 수목원이 있다는 것은 우연스러우면서도 신기한 일이다. 수목원이 50년 넘는 시간 동안 자리를 잡은 덕분인지 태안군 곳곳을 다니다 보면 잘 꾸며진 정원과 가로수가 가득한 풍경을 찾아볼 수 있다. 서해를 찾는 관광객 덕분에 여름이 성수기라고는 하지만 지역 곳곳에서 꽃축제가 열려 탐방객이 몰리는 시기는 봄이고, 올해 태안 방문의 해를 맞아 내건 군의 캐치프레이즈는 ‘대한민국의 정원’일 정도다. 사람은 없는데 식물과 자연환경은 가득한, 도시와 완벽하게 반전된 이 진귀한 광경이라니.
서해와 팜파스그라스가 어우러지는 어린이정원의 모습. 천리포수목원 제공 |
늦여름 해수욕장이 폐장하는 시기에 맞춰 태안군의 정원을 가득 채우는 식물이 있다. 바로 이 시기 꽃이 피기 시작하는 팜파스그라스다. 벼과 코르타데리아속에 속하는 여러해살이풀 팜파스그라스는 남아메리카의 온대 초원 지대를 일컫는 팜파스 지역에서 자생해 이런 이름이 붙었다. 이삭을 포함한 줄기가 높이 2~3m까지 크게 자라는데, 바람이 불면 부드럽게 휘어지는 모습과 마치 강아지 꼬리 같은 풍성한 꽃차례가 인상적이다.
팜파스그라스 꽃차례를 가까이에서 바라본 모습. 천리포수목원 제공 |
천리포수목원은 한국에서 팜파스그라스를 가장 처음 들여온 곳이다. 수목원 조성 초기인 1973년 영국의 한 양묘장에서 팜파스그라스를 들여왔고 이듬해 뉴질랜드에서도 도입했다는 기록을 찾아볼 수 있다. 팜파스그라스는 19세기에 정원용 식물로 북미 대륙과 유럽으로 퍼져 나갔는데, 척박한 환경에서도 잘 자라고 씨앗이 잘 퍼지는 특성 탓에 지금은 미국, 오스트레일리아 등의 국가에서 해로운 외래종 잡초로 취급되기도 한다.
천리포수목원 어린이정원에 가득 핀 팜파스그라스 사이에서 탐방객이 쉬고 있다. 천리포수목원 제공 |
하지만 잘 관리해 주면 건조하고 척박한 토양에서도 잘 자라고, 무더운 한여름 더위도 잘 견딘다. 천리포수목원에 심은 팜파스그라스는 씨앗을 파종해 키운 것들인데, 다행히 주변에 씨앗이 떨어져도 싹이 나지 않아 관리에 어려움이 없다. 이삭을 떨군 후 황갈색으로 마르는 잎과 줄기의 모습은 눈 내리는 풍경과 어울려 겨우내 감상하기도 좋다. 팜파스그라스는 가을 태풍이나 큰 비바람이 오기 전 줄기를 묶어 바람에 쓰러지는 것을 방지해 주고, 이듬해 새로운 싹이 나기 전인 입춘 전후에 줄기와 잎을 잘라준다. 다만 잎 가장자리가 날카로운 편이기 때문에 손을 다치지 않도록 원예용 장갑을 꼭 껴야 한다.
참억새, 카필라리스 쥐꼬리새 등 다양한 벼과 식물이 어우러진 천리포수목원 어린이정원의 가을 풍경. 천리포수목원 제공 |
팜파스그라스와 같은 외떡잎 벼과 또는 사초과 식물을 중심으로 조성한 정원을 ‘그라스 가든’(Grass Garden)이라고 부른다. 개울가나 강변에서 흔히 볼 수 있고, 화려한 꽃을 피우지도 않아 잡초로 여겨진 식물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공간인 셈이다. 수목원에서는 유리온실 앞 억새원과 어린이정원이 그라스 가든으로 조성되어 있다. 특히 어린이정원에서는 팜파스그라스를 비롯해 바람이 부는 곳에 심으면 역동적인 모습을 연출할 수 있는 참억새, 포실한 꽃차례가 인상적인 수크령, 부스스한 질감이 독특한 큰개기장 등 다양한 벼과 식물이 매력적인 모습을 뽐낸다.
천리포수목원의 논에서 가을날 추수를 하는 모습. 천리포수목원 제공 |
이 시기엔 무거운 이삭에 고개를 푹 숙인 벼도 수목원을 찾은 탐방객들을 반긴다. 논밭이었던 초기 수목원 터 가운데 일부를 논으로 남겨둔 공간인데, 매년 인근 초등학교 학생들을 초대해 전통 방식의 손 모내기와 벼 베기를 함께한다. 곡식 수확뿐만 아니라 마음의 양식도 쌓을 수 있다. 10월에는 국내에서는 유일하게 수목원에서 열리는 북페어인 ‘책바슴’이 열린다. 충청도 사투리로 추수를 의미하는 ‘바슴’이라는 단어를 넣어 가을날 곡식도 얻고 마음의 양식인 책도 수확하자는 의미를 담았다. 억새가 핀 연못가를 따라 전국의 1인 출판사, 제작자, 작가 등이 지은 다양한 책을 살펴볼 수 있고, 어린이정원에 가득 핀 팜파스그라스 사이에서는 작가와 만날 수 있는 북콘서트도 진행된다. 스타벅스와 맥도날드는 없지만, 벼과 식물들이 계절의 정취를 한껏 드러내는 풍성한 가을날이 태안의 수목원에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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