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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원, ‘비닐하우스 사망’ 이주노동자에 “국가가 2000만원 배상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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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원, ‘비닐하우스 사망’ 이주노동자에 “국가가 2000만원 배상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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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이주노동자의 날 기념 대회가 열린 2021년 12월19일 서울 보신각 앞에서 시민들이 비닐하우스 숙소에서 사망한 캄보디아 노동자 속헹씨를 추모하고 있다. 김창길 기자

세계 이주노동자의 날 기념 대회가 열린 2021년 12월19일 서울 보신각 앞에서 시민들이 비닐하우스 숙소에서 사망한 캄보디아 노동자 속헹씨를 추모하고 있다. 김창길 기자


이주노동자로 한국에 입국해 비닐하우스 숙소에서 숨진 캄보디아 출신 속헹씨의 유족에게 한국 정부가 배상을 해줘야 한다고 법원이 판결했다. 1심은 국가에 책임을 물을 수 없다고 봤지만 항소심에서 결론이 뒤집혔다.

‘비닐하우스 기숙사’에서 숨진 채 발견…유족 측, 국가 상대 소송


서울중앙지법 민사항소3-2부(재판장 김소영)는 속헹씨의 유족이 한국 정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소송 항소심에서 1심 판결을 취소하고 “한국 정부가 원고들에게 각 1000만원을 지급하라”고 명령했다. 이날 판결에 따라 정부는 소송의 원고인 속헹씨의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총 2000만원을 배상해야 한다.

재판부는 속헹씨가 ‘쾌적한 환경에서 거주할 권리’를 침해당했다고 지적했다. 재판부는 “속헹씨는 적법하게 고용허가를 받아 입국한 근로자로서 인간의 존엄성이 침해되지 않도록 내국인 근로자와 동일하게 건강한 작업환경에서 근로를 제공하고, 적절한 채광과 냉·난방 설비 등이 갖춰진 쾌적한 기숙사에서 거주할 권리가 있다”고 밝혔다.

이어 속헹씨의 사업장이 건강검진을 한 번도 실시하지 않는 등 이주노동자들의 권리를 제대로 보장하지 않았는데도 정부가 이를 제대로 감독하지 않았다며 “공무원의 위법행위와 속헹 씨의 사망이라는 손해 사이에 상당한 인과관계를 인정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속헹씨는 2020년 12월20일 영하 17도 한파에 전기가 공급되지 않는 비닐하우스 숙소에서 잠을 자다 숨졌다. 부검 결과 사인은 간경화 합병증이었다. 일하다 생긴 병을 제때 치료받지 못한 게 원인이었다. 건강이 나빠진 뒤로도 비닐하우스에서 지내다 끝내 목숨을 잃은 속헹씨는 2022년 5월 산재로 인한 사망을 인정받았다. 유족은 같은 해 9월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냈다.


☞ 이주노동자 산재사망 속헹씨 유족이 정부 상대 소송 계속하는 이유는
https://www.khan.co.kr/article/202407011633001


1심은 국가 책임이 인정되지 않는다고 했다. 한국 정부가 책임을 다하지 않아 속헹씨가 죽음에 이르렀다고 볼 만한 증거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이에 유족 측은 “법원이 대한민국 정부에 면죄부를 줬다”며 항소했다.


유족 “국가가 책임 다했다면 피할 수 있었던 죽음”…2심서 인정


2심 재판에서 유족 측은 국가가 의무를 다하지 않았기 때문에 벌어진 사고라는 점을 강조했다. 유족 측은 속헹 씨가 입국할 당시 건강검진에서는 중대한 질환이 발견되지 않았던 점, 그가 속한 사업장이 건강검진을 한 차례도 하지 않았는데도 정부의 관리·감독이 전혀 없었던 점 등으로 볼 때 “국가가 작위의무를 이행했다면 사망이라는 최악의 결과를 피할 수 있었다는 개연성이 충분하다”고 주장했다.

2021년 7월 경기도의 한 농장에서 일하는 바잇차(가명)가 숙소로 사용하는 비닐하우스에 들어가고 있다. 은색 차양막이 쳐진 비닐하우스에는 빛 한 줌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고 통풍도 잘되지 않았다. 권도현 기자

2021년 7월 경기도의 한 농장에서 일하는 바잇차(가명)가 숙소로 사용하는 비닐하우스에 들어가고 있다. 은색 차양막이 쳐진 비닐하우스에는 빛 한 줌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고 통풍도 잘되지 않았다. 권도현 기자


유족 측은 국가가 열악한 이주노동자들의 환경을 알면서도 방치해왔다는 주장도 폈다. 변호인단은 한국 정부가 UN주거특별보고관 등 국내외 단체들로부터 ‘외국인노동자 기숙사 시설이 열악하다’는 지적을 꾸준히 받아왔던 점을 들어 “국가는 비닐하우스 등 부적절한 주거시설이 노동자의 생명과 신체에 심각한 위해를 가할 수 있었음을 명확히 인지하고 있었는데도 속헹 씨가 근무하던 사업장 기숙사에 단 한 차례의 점검도 하지 않는 등 직무를 의도적으로 방기했다”고 했다.

2심 재판부는 이 주장을 대부분 받아들였다. 재판부는 “정부가 사업장에 대한 지도ᆞ점검을 하면서 부속 기숙사가 근로기준법이 정한 요건을 갖추고 있는지 등을 조사했다면 사전에 작업장이 열악한 숙소 환경이 개선될 수 있었고, 일반건강진단을 실시하도록 조치했다면 속헹씨의 간경화 증상이 급속히 악화되기 전에 치료를 받을 수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최혜린 기자 cheri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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