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박진영 대중문화교류위원회 공동위원장 임명
대학교 2학년 시절 박진영을 처음 봤다. 개인적으로 만났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학교 축제에 박진영이 초대 가수로 왔다. 기념비적 일이었다. 1995년이었다. 운동권 문화가 남아있던 시절이다. 대학 축제는 상업적인 행사여서는 안 된다는 믿음이 있었다. 전해인 1994년 축제에 온 가수는 남궁옥분이었다. 원래는 양희은이 오기로 했다. 당일 무대에 오른 건 남궁옥분이었다. 실망한 분위기를 읽은 남궁옥분이 말했다. “니네들 나 왔다고 삐졌지?” 우리는 “아니야! 아니야!”를 외쳤다. 그리고 “사랑 사랑 누가 말했나아아” 힘차게 따라 불렀다. 순진한 시절이었다.
박진영이 온다는 소문이 퍼지자 대자보가 붙었다. 학문의 전당에 날라리 가수를 큰돈 주고 부르면 안 된다는 꾸짖음이었다. 94학번인 나와 친구들은 코웃음을 쳤다. 대자보를 쓴 사람은 분명 졸업을 앞둔 89학번 선배일 거라며 웃었다. 당일 박진영이 ‘날 떠나지마’를 부르는 걸 보며 수천 명이 환호했다. 나도 그중 하나였다. 나는 박진영의 팬이었다. 그가 비닐바지를 입고 방송에 나왔을 때 ‘이거다’라고 생각했다. 한국이 다른 리그로 진입하던 시절이다. 가요는 1992년 서태지와 아이들 데뷔와 함께 K팝으로 진화하기 시작했다. 드라마는 1992년 ‘질투’로 트렌디 드라마 시대로 진입했다. 영화는 1997년 ‘접속’과 1999년 ‘쉬리’로 충무로 시대를 끝내며 웰메이드 시대를 열었다. 80년대가 정치적 격동기였다면 90년대는 문화적 격동기였다.
박진영은 그런 시대의 아이콘이었다. 그 시대는 아이콘이 지나치게 많았다. 아직도 아이콘이라고 불린다면 정말 압도적인 아이콘이었다는 의미다. 무엇보다도 그는 속 시원했다. 금기라고 불리는 걸 하나씩 깨뜨렸다. 비닐바지는 그런 아이콘의 아이콘이었다. 언론은 민망하다고 난리가 났다. 룰라 김지현이 엉덩이 때리는 안무를 하자 역시 선정적이라 욕먹던 시절이다. 언제나 그렇지만 한국 언론은 새로운 게 나오면 엄중하게 꾸짖는 걸 참 좋아한다. 박진영은 금기를 깨는 영역에서 요즘보다 더 앞서 나간 부분들이 있다. 1995년 ‘엘리베이터’ 가사를 한번 떠올려보시라. ‘엘리베이터에서 우린 사랑을 나누지 / 지하에서 위층까지 벨이 울릴 때까지’ 지금 나와도 선정적이라고 난리가 날 가사다.
편집자주
김도훈 문화평론가가 요즘 대중문화의 '하입(Hype·과도한 열광이나 관심)' 현상을 예리한 시선으로 분석합니다.가수 박진영이 지난달 26일 경북 경주 우양미술관에서 열린 ‘2025 APEC 문화산업고위급대화 환영만찬 리셉션’에서 세계를 잇는 K팝을 주제로 발표하고 있다. 문화체육관광부 제공 |
대학교 2학년 시절 박진영을 처음 봤다. 개인적으로 만났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학교 축제에 박진영이 초대 가수로 왔다. 기념비적 일이었다. 1995년이었다. 운동권 문화가 남아있던 시절이다. 대학 축제는 상업적인 행사여서는 안 된다는 믿음이 있었다. 전해인 1994년 축제에 온 가수는 남궁옥분이었다. 원래는 양희은이 오기로 했다. 당일 무대에 오른 건 남궁옥분이었다. 실망한 분위기를 읽은 남궁옥분이 말했다. “니네들 나 왔다고 삐졌지?” 우리는 “아니야! 아니야!”를 외쳤다. 그리고 “사랑 사랑 누가 말했나아아” 힘차게 따라 불렀다. 순진한 시절이었다.
박진영이 온다는 소문이 퍼지자 대자보가 붙었다. 학문의 전당에 날라리 가수를 큰돈 주고 부르면 안 된다는 꾸짖음이었다. 94학번인 나와 친구들은 코웃음을 쳤다. 대자보를 쓴 사람은 분명 졸업을 앞둔 89학번 선배일 거라며 웃었다. 당일 박진영이 ‘날 떠나지마’를 부르는 걸 보며 수천 명이 환호했다. 나도 그중 하나였다. 나는 박진영의 팬이었다. 그가 비닐바지를 입고 방송에 나왔을 때 ‘이거다’라고 생각했다. 한국이 다른 리그로 진입하던 시절이다. 가요는 1992년 서태지와 아이들 데뷔와 함께 K팝으로 진화하기 시작했다. 드라마는 1992년 ‘질투’로 트렌디 드라마 시대로 진입했다. 영화는 1997년 ‘접속’과 1999년 ‘쉬리’로 충무로 시대를 끝내며 웰메이드 시대를 열었다. 80년대가 정치적 격동기였다면 90년대는 문화적 격동기였다.
가수 박진영. JYP엔터테인먼트 제공 |
가수 박진영. JYP엔터테인먼트 제공 |
박진영은 그런 시대의 아이콘이었다. 그 시대는 아이콘이 지나치게 많았다. 아직도 아이콘이라고 불린다면 정말 압도적인 아이콘이었다는 의미다. 무엇보다도 그는 속 시원했다. 금기라고 불리는 걸 하나씩 깨뜨렸다. 비닐바지는 그런 아이콘의 아이콘이었다. 언론은 민망하다고 난리가 났다. 룰라 김지현이 엉덩이 때리는 안무를 하자 역시 선정적이라 욕먹던 시절이다. 언제나 그렇지만 한국 언론은 새로운 게 나오면 엄중하게 꾸짖는 걸 참 좋아한다. 박진영은 금기를 깨는 영역에서 요즘보다 더 앞서 나간 부분들이 있다. 1995년 ‘엘리베이터’ 가사를 한번 떠올려보시라. ‘엘리베이터에서 우린 사랑을 나누지 / 지하에서 위층까지 벨이 울릴 때까지’ 지금 나와도 선정적이라고 난리가 날 가사다.
박진영이 대통령 직속 대중문화교류위원회 공동위원장으로 임명됐다. 전에도 비슷한 자리들이 있긴 했다. 박근혜 정부 시절 문화융성위원회장을 맡았던 김동호 전 부산국제영화제 위원장, 이명박 정부 시절 국가브랜드위원장을 맡았던 이배용 전 이화여대 총장이 있다. 좀 고지식한 선택들이다. 박진영 임명 소식을 듣고 무릎을 쳤다. 이보다 나은 선택은 없다. 솔직히 나는 지난 10여 년간 박진영의 열렬한 팬은 아니었다. 팬심은 나이가 들면서 조금씩 사라졌다. 일단 나는 요즘 JYP에 불만이 있다. SM, 하이브에 비해 소속 가수에게 도무지 좋은 노래를 주지 못한다는 불만이다. 이건 K팝 팬으로서의 불만이니 여기서는 그만 이야기하자. 사실 나는 박진영이 자꾸 방송 무대에 나오는 게 좀 민망했다. 2023년 악명 높은 청룡영화제 공연을 보다가는 비명을 질렀다. “형, 이젠 좀 그만해!”
가수 박진영. 한국일보 자료사진 |
나는 반성한다. 그가 아직도 현역이라는 사실을 못마땅하게 생각한 늙은 생각을 반성한다. 사람이 나이가 들면 그렇다. 딴따라는 딴따라라는 이름을 벗어던지고 싶어 한다. 그렇게 현업에서 떠나 뒷자리에 숨는 순간 감을 잃는다. 감은 사라지고 욕망이 자리를 채운다. 배신과 합병과 주식의 세계 속에서 달러와 엔화와 위안화의 위안에 몸을 담근다. 나는 박진영이 아직도 딴따라라 감사하다. 여전히 현역이라 감사하다. 검찰 포토라인 앞에서 볼 일이 없어 감사하다. 이런 걸로 감사할 수 있는 게 좀 서글프긴 하지만 그래도 감사하다. “저 인간이 왜 저 자리에 가냐?”고 불평하는 독자는 있을 수 있다. “저 인간이 저 자리에 있으면 안 되지”라고 불평할 독자는 없을 것이다. K의 시대에 한국 문화가 어떻게 나아가야 할지 누구보다 잘 아는 K팝의 아버지 중 한 명이라도 정부 요직을 맡을 수 있다는 건, 역시 좀 서글프지만 기적적인 일이다. 형은 그만할 필요가 없다. 계속해도 된다. 어차피 형밖에 없다.
대중문화평론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