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 최고 빌딩인 신이구의 타이페이 101 타워. 대만증권거래소를 비롯해 여러 금융회사가 입주해 있다. |
대만에서 가장 높은 빌딩인 타이페이 101타워로 이어지는 신이구의 지하철역은 지난달 26일 아침 출근 인파로 붐볐다.그 와중에도 플랫폼에 그어진 흰색선 뒤로 기다렸다 천천히 차에 오르는 모습은 규정과 절차에 대한 대만인들의 존중 또는 ‘순응’을 거듭 생각게 했다. 역을 나오니 대만증권거래소와 금융회사들이 입주해 있는 101타워는 가파르게 우상향하는 대만 경제와 증시를 상징하듯 푸른 하늘로 500여 미터 솟아 있었다.
대만 경제는 요즘 “더 이상 좋을 수 없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대만 정부는 8월 중순에 올해 국내총생산(GDP) 성장률 전망치를 3.1%에서 4.45%로 상향 조정했다. 전년 대비 8% 성장한 2분기의 호조가 이어진다고 본 것이다. 한국은행이 전망한 우리나라의 올 성장률 0.9%가 더 왜소해 보인다. 1인당 지디피는 대만이 우리보다 8년 늦은 2021년에 3만 달러대에 진입했지만, 내년에는 한국과 일본보다 먼저 4만 달러에 올라설 전망이다. 코로나 팬데믹 시기의 전자제품 특수와 2~3년 전부터 시작된 인공지능(AI) 반도체 붐이 정보기술(IT)에 특화한 대만 경제에는 ‘축복의 비’ 였다. 물론 대만 경제도 ‘윗목과 아랫목’의 온도 차가 있어 “엔지니어들은 좋아졌지만 일반인들의 삶이 크게 나아진 것은 아니며, 중국에서 철수해 동남아로 옮겨가는 의류, 신발 같은 전통산업은 여전히 힘들다”고 32년차 경제 전문기자 린훙원은 말한다.
이런 성적은 주가에 반영돼 대만 대표 주가지수인 자취안지수가 지난달 27일 24,519.90 포인트에 마감해 사상 최고치에 이르렀다. 2020년에 1만1천~1만2천선이던 지수는 5년간 2배 넘게 올랐다. 지난해에만 29% 상승해 아시아태평양 지역 11개 주요 주가지수 중 가장 많이 올랐다. 올해도 10%대 상승하며 견조한 흐름을 이어가고 있다.
대만 경제의 약진은 인공지능 반도체 붐을 빼고 설명하기 어렵다. 하지만 그런 기회를 성과로 만들 수 있는 경제체질을 만들어 왔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우리의 평균 주가순자산비율(PBR)은 최근 주가가 올라 간신히 1.0 수준에 턱걸이 했지만 대만은 2.4로 우리를 훌쩍 앞선다. 그만큼 대만 기업이 자본을 효율적으로 사용하고, 투자자들이 기업의 미래 전망에 ‘프리미엄’을 붙여준다는 뜻이다. 외국인이 보유한 주식이 전체 시가총액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44% (2024년 12월)에 이르러 우리의 27% (2025년 7월) 보다 훨씬 높다. 이는 대만이 기업지배구조를 개선하고 자본시장을 활성화하는 노력을 20년 이상 꾸준히 한 덕분이다. 자본시장의 활력이 실물경제로 이어져 성장을 촉진하는 선순환을 끌어낸 것이다.
타이페이 101 타워 2층의 대만증권거래소 사무실 앞을 지난달 26일 행인이 지나고 있다. |
대만이 처음부터 잘한 것은 아니다. 한국처럼 가족 기업이 많아 복잡한 지배구조 문제가 빚어졌다. 전환의 계기는 1990년대 말 아시아 외환위기. 한국, 타이 등 소용돌이에 빠진 나라들을 보며 작은 나라 대만이 개방된 국제 자본시장을 활용해 발전하기 위해서는 투명하고 공정한 지배구조가 필수임을 깨닫게 된다. 대만 정부는 2000년 대 초부터 기업지배구조 전담 조직을 두고 가족기업의 소유·경영분리, 순환출자 금지, 독립(사외)이사 선임 등 지배구조 개혁 정책을 밀고 나갔다. 우리가 7월 초 상법개정으로 반영한 ‘이사의 주주 충실의무’ 규정을 대만은 2006년에 이미 증권거래법에 넣었다. 우리가 8월의 2차 상법개정에서 의무화한 집중투표제를 대만은 2011년 의무화했다.
2013년 부터는 금융감독관리위원회(FSC)와 대만증권거래소가 중심이 돼 지배구조 개선 로드맵을 만들어 한층 체계적으로 추진했다. 그간 이사회 운영의 책임성, 투명성에 초점을 맞췄으나 이제는 세계적 흐름인 환경·사회·지배구조(ESG)를 강조해 기업의 지속가능성을 높이는 쪽으로 나아가고 있다. 올해 8월까지 모든 상장기업은 지속가능 보고서를 제출하도록 의무화했다. 이런 노력을 통해 타이완 기업경영의 투명성과 책임성은 크게 높아졌다. 주주 참여율 확대, 외국인 자본 유입 증가 등 증시의 체질도 개선됐다. 이런 변화는 외부 평가에서도 드러나는데 아시아기업지배구조협회(ACGA)가 2년마다 아시아 12개국의 지배구조를 평가하는 순위에서 대만은 2010년 초반에는 6-7위 권에 있었으나 최근에는 3~4위권으로 올랐다.
한국과 대만은 비슷한 점이 많다. 정보기술(IT) 비중이 높은 산업구조, 가족기업이 많다는 점, 긴장이 감도는 안보상황이 그렇다. 그런데 대만은 꾸준한 노력을 통해 기업경영의 투명성, 책임성을 높이고 기업가치를 키운 반면 한국은 여전히 지배구조 후진성과 증시 디스카운트를 이야기 하고 있다. 대만은 어떻게 여기까지 올라올 수 있었을까?
대만의 성공 비결은 금융 당국과 증권거래소가 컨트롤타워가 돼 기업과 기관투자자, 일반투자자에게 예측 가능한 제도 개선책을 내놓아 신뢰를 얻은데 있다. 어느 제도가 시행되는 시점을 예고하고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가서 그 시점이 되면 반드시 시행했다. 기업이 “어차피 시행될 제도니까 미리 준비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특징적인 것은 법규로 강제하는 하향식 접근 보다는 상장기업, 정부, 증권 관련기관, 언론 등 다양한 주체가 대화를 거듭해 “기업이 건전한 지배구조의 내재적 가치를 알게 되는 문화”를 만들려 노력한 것이다. (대만증권거래소 2023 기업지배구조 보고서)
타이페이 금융, 비지니스 중심지인 신이구. 대만 최고층인 타이페이 101 타워에는 대만증권거래소를 비롯해 여러 금융회사가가 입주해 있다. |
대만국립정치대학의 주더팡 교수는 장기적이고 점진적 접근, 생태계 조성, 인센티브와 패널티의 3가지를 방법론으로 들었다. 그는 “지배구조 개선은 하루 아침에 이뤄지지 않기에 5년, 3년 단위의 점진적인 로드맵을 세우고 큰 기업에서 작은 기업으로 단계적으로 확신해 갔다”고 정리했다. 홍보하고 권고하다 어느 정도 따라온다 싶으면 의무화했다. 주총 전자투표도 2014년에 지배구조평가의 한 가점 항목으로 도입한 뒤 기업이 채택하는 비율이 4년차에 71.4%로 오르자 2018년에 의무화 했다. 이 밖에 독립이사, 감사위원회, 회사지배구조 담당자 설치, 이사회 내 성별 다양성, 독립이사 연임제한 같은 제도 역시 초반에 권고한 뒤 단계적으로 의무화해 자리잡도록 했다.
바람직한 규범의 확산을 위해 큰 기업이 모범을 보이도록 유도했다. 대만 최대 기업이자 세계 최대 반도체 파운드리 회사인 티에스엠시(TSMC)의 투명하고 합리적인 지배구조는 본보기가 되기에 충분했다. 창업자 모리스 창은 1대~3대까지 최고경영자를 외국인으로 임명하고 미국식 기업관리 시스템을 대만 문화에 접목했다. 이사회를 독립성과 투명성을 지니도록 조직하고 운영했는데, 대만에 사외이사 제도가 생기기 전에 티에스엠시는 사외이사를 두었을 정도였다. 모리스 창이 보유한 지분이 적더라도 회사를 키운 카리스마로 가족 승계를 시도할 수 있었겠지만, 딸에게 경영권을 물려줄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다. 한국에서도 출판된 ‘티에스엠시 세계 1위의 비밀’을 쓴 린훙원 ‘비지니스 투데이’ 고문은 인터뷰에서 “모든 기업이 티에스엠시를 닮으려 한다. 건강식품을 파는 업체도 그 분야의 티에스엠시가 되겠다고 한다”고 말했다. 우리나라는 손에 꼽을 만한 대기업 집단에서 지배구조와 관련된 위법과 탈법 사례가 주로 나오는 걸 생각하면 부러운 말이 아닐 수 없다.
평가하고 관여하는 지배구조의 생태계를 짜는 것도 중요한 전략이었다. 금융감독 기구, 증권거래소, 기관투자가, 투자자 보호기구, 일반투자자가 촘촘히 엮여서 자기일을 함으로써 기업이 제시된 과제를 이행하지 않을 수 없도록 했다. 지배구조 모범 규범을 바탕으로 지표를 만들고, 기업을 평가해 그 결과를 공개했다. 대만증권거래소와 타이페이거래소 상장기업의 지배구조 평가는 2014년에 시작했다. 80여개의 지표를 놓고 충족하면 각각 1점을 얻는 식으로 해서 매년 평가를 한다. 상위 5%, 상위 20% 등 7개 등급으로 발표하는데 상위 20% 기업은 ‘타이완기업지배구조100 지수’라는 별도 지수로 관리해 시장의 주목을 받도록 했다. 익명을 원한 타이페이 국제컨설팅 업체의 임원은 “지배구조 평가에서 상위권에 들어가려는 기업들의 경쟁이 무척 치열하다”고 말했다. 기업 지배구조의 핵심인 이사회 평가도 3년에 한번 외부 기관의 평가를 받으면 추가점수를 받는다.
대만 최고 빌딩인 신이구의 타이페이 101 타워의 야경. 대만증권거래소를 비롯해 여러 금융회사가가 입주해 있다. |
기관투자가가 주총 등에서 적극적인 역할을 하도록 장려했다. 은행, 보험, 증권사는 ‘기관투자자의 수탁원칙’을 채택하고 자신이 투자한 회사 가운데 70% 업체의 주주총회에 참석해서 의견을 내거나 질문하도록 권장했다. 이.선(玉山 위산) 증권의 황메이샤 부사장은 “투자하고 마는 게 아니라 기업을 늘 면밀히 관찰하고 있어야 한다” 고 말했다. 기관투자자의 수탁원칙 이행을 대만증권거래소가 평가하는데, 이는 별다는 평가가 없이 기관에 맡겨져 실효성이 부족하다는 한국과는 다른 모습이다.
이사와 독립이사가 제 역할을 하도록 지속적으로 교육하고 소통했다. 증권거래소나 민간협회에서 교육프로그램을 다양하게 만들어 운영했다. 기업에 최고지배구조 담당자(CGO)를 두고 교육과 소통을 조율하도록 했다. 대만기업지배구조협회(TCGA) 주주위안 부회장은 “처음 독립이사가 되면 12시간의 교육을 의무적으로 받아야 한다”며 “증권거래법, 이사의 권리, 이사회 진행 방법 등을 배운다” 고 말했다.
상속세나 배당소득세를 인하해 기업의 숨통을 틔워주는 한편, 주주 보호를 위해 강력한 규제를 시행하는 강온 양면의 전략도 눈에 띈다. 타이완은 50%이던 상속세를 두번에 걸쳐 10%∼20%로 내렸다. 최고 50%이던 배당소득세율도 2018년 종합소득에 합산한 뒤 8.5% 세액공제를 받는 방식 또는 단일세율 28%로 분리과세하는 방안으로 개편됐다. 상속세 인하에 대해 우리의 금융위원회 및 금융감독원 기능을 하는 금융감독관리위원회(FSC) 천샹인 부국장은 “세금 부담이 낮아져 가족기업이 세대교체를 계획할 때 공개시장을 통해 기업가치 체고 및 지배구조 개선에 적극적으로 임하게 됐다”고 평가했다. 배당소득세 조정에 대해서도 “자본시장 관점에서 세제 유인이 기업들이 주주배당에 더 신경쓰게 만들었고, 현금배당률이 매년 상승하”는 효과를 냈다고 진단했다.
그 한편에서는 당해연도 흑자 중에 배당하지 않고 유보해 둔 자금에 대해 법인세와 별도로 10%의 유보소득세 (현재는 5%)를 메기는 강력한 배당 촉진책을 쓰기도 했다. 또 법에 의해 설립되고 기금을 활용하는 증권선물투자자보호센터(SFIPC) 같은 공공기관이 투자자를 대신해 대표소송을 하는 등 다른 나라에서 보기 드믄 투자자 보호 정책을 두고 있기도 하다.
대만의 지배구조 개혁은 이렇게 규제와 문화형성을 병행하고 시장의 압력을 활용한 점이 특징이다. 천샹인 부국장은 “법규가 기본이 되지만 평가, 순위 공개, 포상 등 소포트 툴이 변화를 한층 촉진한다”며 “정보공개와 투자자의 감시가 법적 처벌보다 지속적 효과를 낼 수 있다”고 말했다. 타이완이 기업지배구조 로드맵을 시행한 2013년 이후 집권당이 국민당에서 민진당으로 바뀌었지만 기업지배구조 개선정책은 초당적 합의로 시행됐다. ‘지배구조 선진화와 외자 유치’가 핵심 국가이익이라는 공감대가 있었던 것이다. 주더팡 교수는 “정치 변화와 크게 관련 없었다. 제도가 잘 마련돼 있으면 누가 반대하겠느냐”고 말했다.
타이페이/글·사진 이봉현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연구위원 bhlee@hani.co.kr
▶▶[한겨레 후원하기] 시민과 함께 민주주의를!
▶▶민주주의, 필사적으로 지키는 방법 [책 보러가기]
▶▶한겨레 뉴스레터 모아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