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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임 50일’ 외교장관의 세 번째 방미 [김태훈의 의미 또는 재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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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임 50일’ 외교장관의 세 번째 방미 [김태훈의 의미 또는 재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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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공화국 초반인 1983년 2월의 일이다. 로널드 레이건 당시 미국 대통령의 신임이 두터운 조지 슐츠 국무부 장관이 취임 후 처음으로 한국을 찾았다. 그로부터 2개월 뒤인 1983년 4월에는 이범석 외무부(현 외교부) 장관이 답방 형식으로 미국에 갔다. 당시 이 장관이 워싱턴에서 미국 조야 인사들을 상대로 행한 연설이 흥미롭다. “전두환 대통령에게 워싱턴에 다녀와야 한다고 말씀을 드렸더니 전 대통령께서 ‘슐츠 장관이 서울을 다녀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 무슨 일로 또 미국에 가려느냐’고 물으셨습니다.” 한국의 경제력이나 국제적 위상이 지금과 비교도 안 되던 시절이다. 전 대통령 얘기는 ‘장관의 해외 출장에 드는 경비가 얼마인데, 외화를 아껴 써야 하지 않느냐’는 지적이었을 것이다.

조현 외교부 장관(오른쪽)이 8일 미국 조지아주에서 체포 및 구금된 우리 국민 300여명의 석방 교섭을 위해 미국으로 출국하며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연합뉴스

조현 외교부 장관(오른쪽)이 8일 미국 조지아주에서 체포 및 구금된 우리 국민 300여명의 석방 교섭을 위해 미국으로 출국하며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연합뉴스


그러자 이 장관은 “미국인은 부부 사이라도 서로 ‘아이 러브 유’(I love you)라는 말로 날마다 사랑을 확인한다”라는 비유를 들어 전 대통령을 설득했다. “국가 간에도 애정을 표현하며 지내야 한다”는 이 장관의 주장에 전 대통령은 의구심을 풀고 그의 방미를 흔쾌히 승낙했다. 이런 재미난 에피소드를 들려준 뒤 미국 유력 인사들에게 “한국 국민은 미국과 여러분을 사랑한다”고 외친 이 장관을 향해 청중은 열띤 박수와 환호로 호응했다. 낯선 상대방의 마음을 열고 호감을 이끌어내는 것이 바로 외교의 본질이란 점을 제대로 보여준 장면이 아닐까 싶다. 외교장관과 대사, 총영사는 물론 일선 외교관까지 유념해야 할 덕목이라고 하겠다.

최근 미국 조지아주(州)의 한국 공장에서 일하는 우리 국민 300여명이 불법 체류 등 혐의로 미 이민 당국에 체포 및 구금되는 일이 벌어졌다. 한국과 미국은 서로 동맹이고 미국인들의 일자리 창출을 위해 국내 대기업이 큰마음 먹고 투자를 한 것인데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느냐’ 하며 충격과 배신감을 토로하는 이가 많다. 일각에선 이재명정부 들어 미국 내 주요 재외 공관장들이 후임자 없이 본국으로 소환되거나 물러난 점을 문제로 지적한다. 당장 국무부 등 미 연방정부를 상대하는 워싱턴 주미 대사와 조지아주를 관할하는 주애틀랜타 총영사가 모두 공석이다. ‘재외 국민 보호’라고 하는 외교부의 가장 중요한 임무가 일선에서 실행에 옮겨지지 어려운 여건인 셈이다.

8일 오후 서울 종로구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앞에서 시민들이 미국 이민 당국의 한국인 300여명 체포·구금에 항의하며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규탄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연합뉴스

8일 오후 서울 종로구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앞에서 시민들이 미국 이민 당국의 한국인 300여명 체포·구금에 항의하며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규탄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연합뉴스


결국 조현 외교부 장관이 체포 및 구금된 우리 국민 석방을 위해 8일 황급히 미국으로 떠났다. 명색이 ‘주요 7개국(G7)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나라’의 외교 수장이 워싱턴으로 가는 직항을 못 구해 경유편을 타고 출국했다니 기가 찰 노릇이다. 지난 7월21일 취임한 조 장관으로선 이날까지 약 50일의 짧은 기간 동안 벌써 세 번째 미국 출장이다. 주미 대사관에 노련한 대사, 아니 든든한 ‘미국통(通)’ 중견 외교관이라도 한 명 있었으면 이런 호들갑을 떨 필요가 있었을까. 이재명 대통령에 의해 외교장관 후보자로 지명된 직후 “(외교장관이) 취임하면 미국부터 가야 한다는 고정 관념에서 벗어나야 한다”며 짐짓 여유를 부렸던 조 장관의 지금 심경은 어떨지 궁금하다.

김태훈 논설위원 af103@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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