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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가 극우와 불장난?... 나치 트라우마 독일서 극우 AfD 선전, 왜 [숨은유럽찾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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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가 극우와 불장난?... 나치 트라우마 독일서 극우 AfD 선전, 왜 [숨은유럽찾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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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극우 AfD 지지율 1위의 이면
독일 내 '반이민정서 공략' 주효했지만
'방화벽 원칙' 흔들고 극우에 손 내민
보수당이 극우 키워... 결국 자충수 돼
독일 학자들, 한국 유사 사례에도 주목
"극우와 불장난하지 마라" 교훈 새겨야

편집자주

혹시 여행으로만 유럽을 경험하셨나요. 매월 연재하는 '숨은유럽찾기'에선 평온한 관광지에선 볼 수 없는 유럽 각국의 숨은 이야기를 찾아 드립니다. 드러난 뉴스의 이면도 들여다봅니다. 때론 불편한 진실이 우리에게 피와 근육이 됩니다.





독일 연방 총선이 치러진 지난 2월 23일, 극우 성향 정당 '독일을 위한 대안(AfD)의 공동대표 알리스 바이델(가운데)이 베를린 당사에서 출구조사 결과를 보고 환호하며 독일 국기를 흔들고 있다. 베를린=AP 연합뉴스

독일 연방 총선이 치러진 지난 2월 23일, 극우 성향 정당 '독일을 위한 대안(AfD)의 공동대표 알리스 바이델(가운데)이 베를린 당사에서 출구조사 결과를 보고 환호하며 독일 국기를 흔들고 있다. 베를린=AP 연합뉴스


“이 건물에 ‘독일을 위한 대안(AfD)’이 입주해 있는 게 맞나요?”

지난달 26일 독일 베를린 북서쪽 외곽에 위치한 비테나우. 주거밀집지역인 이곳에 올 2월 총선에서 152석을 얻어(총 630석) 제2당으로 부상한 극우 성향 AfD 중앙당사가 있다. 그러나 현장에서 한참을 헤맸다. AfD 홈페이지에 명시된 주소지의 5층짜리 사무용 건물에 정당 로고나 간판이 전무했기 때문. 입주사 명단이 적힌 게시판에도 AfD는 없었다. 주변을 서성이길 20분째, 마침 배달음식을 받기 위해 건물 밖으로 나온 여성과 마주쳤다.

기자 질문에 이 여성은 고개를 끄덕이며 건물 안으로 안내했다. 그가 가리킨 건 출입구 바로 옆 사무실. 분명 건물 밖 게시판엔 지상층(EG∙한국 기준 1층)이 공실이었지만 내부에는 AfD 정식 명칭 'Alternative für Deutschland'가 버젓이 적혀 있었다. 그러나 사무실은 굳게 닫혔고 ‘폐쇄회로(CC)TV 작동 중’이라는 경고문만 보였다.

지난달 26일 독일 베를린 외곽에 위치한 극우 성향 AfD 당사. 5층짜리 건물 1층에 입주했지만 건물 외벽에 당사 로고는 없었다. 베를린=정승임 특파원

지난달 26일 독일 베를린 외곽에 위치한 극우 성향 AfD 당사. 5층짜리 건물 1층에 입주했지만 건물 외벽에 당사 로고는 없었다. 베를린=정승임 특파원


원내 2당으로의 격상이 무색하게 이곳에서 AfD는 은둔정당과 흡사했다. 이유가 있었다. 총선 당일 자축파티를 열면서 바베큐를 굽고 건물 외벽에 당 로고를 투사하자 건물주가 계약을 해지하고 퇴거 소송을 건 것이다. 건물주는 2022년 계약 당시부터 AfD 정당 로고 게시를 금지했다. 이에 “퇴거가 부당하다”며 맞대응 중인 AfD는 도심에 새 당사도 물색하고 있다. 연방의회, 정부청사가 밀집한 티어가르텐에 당사를 마련한 다른 정당과 달리 도심에서 차로 30분 거리(대중교통 1시간)에 외딴섬처럼 동떨어져 있어서다.

그러나 도심에 극우 정당이 설 자리는 없어 보였다. 반대집회 등을 우려해 AfD와 거래하려는 건물주가 없기 때문. 특히 AfD는 올 5월 △인종주의적 배타성 △나치 과거 미화 등을 이유로 우리 국가정보원에 해당하는 연방헌법수호청에 의해 우익극단주의세력으로 지정됐다. AfD의 가처분신청이 받아들여 지긴 했지만 건물주 입장에선 여전히 부담스럽다. 독일 일간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차이퉁(FAZ)은 “AfD는 다른 정당과 달리 당사 찾기가 어려울 것”이라고 전망했다. 2당 자리까지 올랐지만 변변한 당사가 없는 상황이 지속될 수 있다는 의미다.

극우 AfD 지지율 선두에 독일 사회 '충격'



지난달 26일 독일 베를린 외곽에 위치한 극우 성향 AfD 당사. 출입구는 굳게 잠겨 있고 오른쪽에 AfD 풀네임이 명시돼 있다. 베를린=정승임 특파원

지난달 26일 독일 베를린 외곽에 위치한 극우 성향 AfD 당사. 출입구는 굳게 잠겨 있고 오른쪽에 AfD 풀네임이 명시돼 있다. 베를린=정승임 특파원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AfD 지지율은 상승 중이다. 지난달 12일 공개된 여론조사에서 26%를 차지, 24%에 그친 집권당 ‘기독민주당(CDU)∙기독사회당(CSU)연합’을 제치고 1위를 기록했다(바이에른 기반의 CSU와 나머지 15개 주에서 활동하는 CDU는 항상 선거에서 연합). 엄밀히 따지면 오차범위 내로 앞선 것이지만 CDU 당수인 프리드리히 메르츠 총리가 야밤 비상회의를 소집할 정도로 여당의 충격은 컸다. 현지 매체는 취임 100일을 넘긴 메르츠 총리의 가장 큰 정치적 위협으로 ‘AfD 지지율’을 꼽았다.


독일 사회도 충격에 빠졌다. 프랑스, 이탈리아 등 유럽에서 극우의 선전은 흔한 일이 됐지만 2차대전 전범국으로 ‘나치 트라우마’를 겪은 독일은 상황이 다르다. 나치 범죄를 반성하는 문화가 깊게 박혀 극단주의를 금기시해왔기 때문이다. ‘보수=나치협력자’라는 인식에 CDU를 비롯, 보수 정당들도 당명에 ‘보수’ 대신 ‘기독(교)’을 넣을 정도다. 그런 독일에서 2차대전 이후 처음으로 극우정당이 2당이 된 데 이어 지지율 1위까지 기록한 것이다.


그래픽=박종범 기자

그래픽=박종범 기자


울프 보흐만 케미츠공과대학 사회학연구소 교수는 전화인터뷰에서 “지난 수년간 선거에서 AfD가 득표율을 조금씩 늘려왔기에 갑작스러운 일은 아니다”라면서도 극우 정당이 여론조사에서 선두를 차지한 건 민주주의, 특히 독일엔 재앙과도 같다”고 평가했다. 하네스 모슬러 뒤스부르크-에센대 정치학과 교수도 “AfD가 국민 4분의 1로부터 지지를 받는 것은 독일 정치지형에 근본적 전환이 일어나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했다.

독일 정치학자들은 특히 AfD가 점차 ‘정상적인 정당으로 보이는’ 점을 가장 우려했다. 장기간 AfD를 연구한 카이 아르츠하이머 마인츠대 정치학과 교수는 한국일보에 “AfD가 부분적으로 정상화(normalised)되고 있다는 신호”라며 “특히 총선에서 선전은 유권자들에게 AfD를 뽑는 일이 더이상 비정상적인 일이 아니라는 점을 보여줬다”고 진단했다. AfD 지지 의사를 숨겼던 ‘샤이(shy) 극우’가 앞으로 더 적극적 지지를 표할 수 있다는 뜻이다.

’방화벽 원칙’ 무너뜨린 보수의 자업자득



올 7월 20일 공영방송 ARD가 베를린 연방정부 청사 밖에서 알리스 바이델 AfD 공동대표 인터뷰를 하는 도중 시위대가 '빌어먹을 AfD'라는 가사를 무한 반복하는 노래를 틀며 방해하고 있다. 이 인터뷰는 ARD가 휴가철을 앞두고 원내 정당 대표를 차례로 만나는 연례행사였다. 베를린=로이터 연합뉴스

올 7월 20일 공영방송 ARD가 베를린 연방정부 청사 밖에서 알리스 바이델 AfD 공동대표 인터뷰를 하는 도중 시위대가 '빌어먹을 AfD'라는 가사를 무한 반복하는 노래를 틀며 방해하고 있다. 이 인터뷰는 ARD가 휴가철을 앞두고 원내 정당 대표를 차례로 만나는 연례행사였다. 베를린=로이터 연합뉴스


유로존 부채위기가 절정에 달한 2013년 우익 경제학자들이 창당한 AfD는 애초 유로존 탈퇴 등을 표방한 우파 포퓰리즘 정당이었다. 그러나 2015년 시리아 난민이 대거 유입되면서 ‘반이민’을 외치는 당내 민족주의 강경파가 급부상, 당의 노선도 180도 달라졌다. 이는 장기간 누적된 독일인들의 반이민정서를 자극했고, AfD는 2017년 연방의회 입성에 이어 올해 총선에선 의석수가 2배 가까이 늘며 2당 자리까지 꿰차게 됐다. ”홀로코스트 기념관은 수치 기념물”, ”독일계 아닌 시민은 추방하자”는 당내 인사들의 위험 발언도, 친러시아 선전매체에서 돈을 받았다는 스캔들 의혹도 AfD에 걸림돌이 되지 않았다. 오히려 텃밭인 옛 동독을 넘어 서독 지역까지 세를 확장 중이다.


주목할 것은 AfD 부상에 보수당인 CDU가 적잖게 기여했다는 점이다. 2023년 지방선거 당시 야당인 CDU 대표였던 메르츠 총리가 “기초지자체에서 AfD 후보가 당선되면 협력할 수 있다”고 발언한 것이 대표적. 동독 약세지역에서 한 표라도 더 얻기 위한 계산이었지만 “극우 세력과 절대 협력하지 않는다”는 독일 정계의 ‘방화벽(Brandmauer∙브란트마우어) 원칙’을 무너뜨렸다는 비판이 거셌다. CDU 소속 마이클 크레츨머 작센주총리가 AfD 지지자들을 “대화가 필요한 사람들”로 규정하며 포섭을 시도한 것도 마찬가지. 더구나 메르츠 총리는 올 1월 ‘반이민법’ 처리 과정에서 “누가 지지하든 상관없다”며 사실상 AfD의 힘을 빌렸다.

보흐만 교수는 “CDU가 AfD와의 협력 가능성을 조금이라도 내비치면 유권자들은 AfD를 정상 정당처럼 본다. 실제 그런 분위기가 AfD 지지율 급등으로 나타난 것이라며 “’방화벽’은 조금이라도 흔들리면 의미가 없다”고 지적했다. 아르츠하이머 교수도 “과거 ‘방화벽’은 극우 정당 억제에 효과적이었지만 CDU는 이 원칙을 일관되게 유지하지 못했고 젊은 유권자들에게 AfD는 이미 익숙한 존재가 됐다”고 말했다.

스텝 꼬인 보수당... SPD는 "AfD 정당 해산"



3일 프리드리히 메르츠 독일 총리가 베를린 총리관저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안경을 고쳐쓰고 있다.베를린=AFP 연합뉴스

3일 프리드리히 메르츠 독일 총리가 베를린 총리관저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안경을 고쳐쓰고 있다.베를린=AFP 연합뉴스


방화벽을 흔든 대가는 컸다. AfD 약진은 ‘메르츠 내각’의 수명을 걱정해야 할 정도로 그 자신에게 자충수가 됐다. ‘중도 정책을 펼치되 이민 정책은 더 강하게 나가 AfD 표를 가져온다’는 이중전략은 전혀 먹히지 않고 있다. 오히려 AfD 의제에 힘을 실어줬고 중도층 지지를 잃었다.


연방 의회는 대혼란이다. 2당인 AfD 몫이어야 할 상임위원장이 4개월 넘게 공석이다. ‘극우와 협력할 수 없다’며 대다수 의원들이 위원장 표결에서 반대표를 행사한 것. CDU의 연립정부 파트너인 사회민주당(SPD)은 6월 전당대회에서 ‘AfD 정당 해산’을 당론으로 채택했다. 그러나 헌법재판소가 해산 결정을 내릴 가능성은 낮다. 모슬러 교수는 “AfD가 의회에 입성한 2017년에는 세력이 미미해 해산을 시도하지 않았지만 지금은 너무 커져서 해산이 불가능해졌다”고 꼬집었다. 국민 4분의 1이 지지하는 정당 해산은 정치적 부담이 크다.

한국도 유사... “극우와 불장난하지 마라”



한국사 강사 출신 극우 유튜버 전한길씨가 지난달 8일 대구 북구 엑스코에서 열린 국민의힘 전당대회 대구·경북 합동연설회에서 특정 후보를 지지하며 찬탄(탄핵 찬성)파 후보가 등장할 때마다 ‘배신자’란 구호를 외치고 있다. 대구=뉴시스

한국사 강사 출신 극우 유튜버 전한길씨가 지난달 8일 대구 북구 엑스코에서 열린 국민의힘 전당대회 대구·경북 합동연설회에서 특정 후보를 지지하며 찬탄(탄핵 찬성)파 후보가 등장할 때마다 ‘배신자’란 구호를 외치고 있다. 대구=뉴시스


이는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다. 정치 구조는 근본적으로 다르지만 최근 지도부가 반탄파(윤석열 탄핵 반대) 위주로 채워진 국민의힘 전당대회 결과는 보수당 내 극우 세력의 영향력이 막강해진 사실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전당대회장을 아수라장으로 만들고도 제대로 된 징계를 받지 않은 극우 유튜버 전한길씨가 “내년 지방선거 공천 청탁이 들어왔다”고 발언하자 국민의힘이 보수와 멀어지고 극우로 가고 있다는 우려까지 나왔다.

과거 중도층 공략을 위해 ‘극우와 거리두기’를 했던 국민의힘은 박근혜 대통령 탄핵 이후, CDU가 ‘방화벽’ 원칙을 흔든 것처럼 태극기 세력과 손잡으며 이 금기를 깼다. 당내 선거만 바라본 지도부가 극우 유튜브에 적극 출연하는 등 태극기 세력의 당내 영향력을 키워준 것이다. 그 결과 1987년 민주화 이후 5명의 대통령을 배출한 보수 정당은 극우화 기로에 서게 됐다.

왼쪽부터. 울프 보흐만 케미츠공과대학 사회학연구소 교수, 하네스 모슬러 뒤스부르크-에센대 정치학과 교수, 카이 아르츠하이머 마인츠대 정치학과 교수. 본인 제공 및 학교 홈페이지

왼쪽부터. 울프 보흐만 케미츠공과대학 사회학연구소 교수, 하네스 모슬러 뒤스부르크-에센대 정치학과 교수, 카이 아르츠하이머 마인츠대 정치학과 교수. 본인 제공 및 학교 홈페이지


서울대 정치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아 한국 정치에 정통한 모슬러 교수는 “독일 AfD는 반민주적 본색을 숨기려 하지만 서울서부지법 테러 사건에서 보여주듯 한국 극우는 대놓고 민주주의를 공격했다”며 “가장 큰 우려는 극우가 (보수에 침투해) 민주주의 질서를 뒤엎을 만큼 힘을 갖게 된다는 점”이라고 했다.

보흐만 교수는 “독일과 한국의 보수 모두 ‘극우와 불장난하지 말라’는 교훈에 주목해야 한다”고 했다. 이어 극우를 제도권에 끌어들이면 길들여질 거라는 기대는 착각에 불과하다”며 “극우 세력은 기회를 주면 더 큰 권력을 추구할 뿐”이라고 강조했다. 당장 눈앞에 작은 이익을 위해 극우와 밀착했다간 결국 부메랑을 맞게 된다는 의미다.

베를린= 정승임 특파원 choni@hankook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