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70>의 철준(조유현)과 탈북민 친구들. 엣나인필름 제공 |
처음은 누구나 서툴다. 새 환경, 공간, 상황에 들어설 때 쭈뼛거리는 몸과 흔들리는 시선을 숨겨보려 해도 이미 적응하다 못해 상황의 일부가 되어버린 터줏대감들 사이에서 신입은 어설픈 티가 날 수밖에 없다. 오는 3일 개봉하는 두 편의 독립영화 <3670>(박준호 감독)과 <3학년 2학기>(이란희 감독)는 낯선 사회에 발을 디디는 주인공의 처음을 따라간다.
<3670>, 낯선 커뮤니티 속 보편적인 우정과 사랑
<3670> 속 철준(조유현)이 남한 게이 커뮤니티의 ‘술번개’에 나가 러브샷을 하고 있다. 엣나인필름 제공 |
함경북도 청진에서 태어난 철준(조유현)은 수 년 전 남한으로 넘어왔다. 형제와도 같은 새터민 교육터 친구들에게도 말하지 못하는 건 남자를 좋아하는 자신의 성 정체성이다. <3670>은 철준이 용기 내 찾은 ‘술번개’에서 알게 된 영준(김현목)과 친해지며 생기는 일을 그린다. 게이 커뮤니티가 낯선 철준의 시각으로 그 안에서 친구들을 사귀었다가 다투고, 연애 감정을 느끼거나 고독함을 견디는 과정을 담는다.
동갑인 영준은 철준을 ‘97년생 모임’에 데려간다. 게이 친구들은 그를 자연스레 무리에 끼워준다. 남한 노래를 듣거나 불러본 일이 적은 철준은 쾅쾅- 음악이 울리는 서울 이태원의 클럽과 합석이 빈번한 서울 종로의 주점을 휩쓸려 다닌다.
뻣뻣한 자세에 말수도 적던 그는 음악에 조심스레 몸을 맡기기 시작한다. 집단에서 적응하려 한 적 없는 행동을 해봤다가 후회하기도 하고, 관심 있는 상대가 냉담하게 굴 때 풀이 죽는 모습은 누구나 경험해 봤을 일이다. 영화는 성소수자이자 북한이탈주민이라는 겹겹이 소수자 정체성을 가진 인물을 주인공으로 보편적인 사랑과 우정 이야기를 풀어낸다.
<3670> 속 철준(조유현)과 영준(김현목)이 97년생 동갑모임 친구들과 사진을 찍고 있따. 엣나인필름 제공 |
박준호 감독은 지난 27일 시사회에서 “커뮤니티가 주인공인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고 했다. 북한이탈주민을 대상으로 영어·자기소개서 교육 자원봉사를 한 적 있는 그는 영화에 경험을 녹였다. 철준은 구글 지도에 자신이 살던 곳을 저장해 놓고 이따금 위성 지도를 바라본다. 실제 가르쳤던 학생이 박 감독에게 “집을 보여주겠다”며 구글 지도를 보여줬던 적이 있다고 한다.
게이 커뮤니티의 재현을 위해선 서울 이태원·종로에서 실제 영업 중인 게이 바와 클럽을 섭외해 촬영 장소로 썼다. 제목 ‘3670’은 ‘종로3가 6번출구 오후 7시에 0명이 모이자’는 친구들끼리의 은어다. 박 감독은 “매년 개발 등으로 풍경이 빠르게 변하는 종로의 2024년 2월 풍경을, 공동체의 기억을 영화에 담았다”고 했다. 술번개나 동갑 모임 등 한국 게이 커뮤니티만의 문화를 녹여 현실성을 높였다.
박 감독은 <3670>이 ‘다음 세대의 퀴어 영화’라고 했다. 주인공이 성적 정체성을 고민하는 모습이나 정체성을 부정하는 사람과의 갈등, 혹은 정체성에 대한 혐오 표현 등 퀴어 영화에서 자주 보이던 소재는 이 작품에 쓰이지 않는다. 박 감독은 “혐오를 제 영화 안에서 재현하고 싶지 않았다”며 “억지로 미화하거나 연민을 지어내려 하지 않았다. 현실적으로, 있는 그대로 보여주면 모두가 이해할 것이라 생각했다”고 했다. <3670>은 지난 5월 전주국제영화제에서 한국경쟁 CGV상 등 4관왕을 받았다.
<3학년 2학기>, 기계 소리만 나도 불안한 공장에서
<3학년 2학기>의 주인공 창우(유이하)가 현장실습을 나간 공장에서 일하고 있다. 작업장 봄 제공 |
<3670>이 20대의 사랑과 불안을 그린다면, <3학년 2학기>는 10대 끝자락 고등학교 3학년 2학기를 학교가 아닌 낯선 공장에서 보내게 된 중소기업 현장 실습생 창우(유이하)의 이야기다.
창우는 성실하지만 느리다. 용접 불꽃이 튀고 지게차가 오고가는 공장에서 그는 ‘나 처음 사회에 나온 학생이예요’ 꼬리표를 단 듯 어리숙하다.
공장은 아주 좋지도, 아주 나쁘지도 않은 일터다. 안전을 신경쓰는 듯하면서도 시간을 단축하기 위해 2층에 난간이 설치되어 있지 않다. 사수는 “왜 이렇게 느리냐”고 창우를 타박하다가도 실습생들의 안전장비 구입을 회사에 요청한다.
명확한 악역은 없지만 관객은 창우와 현장실습생들의 매일을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지켜보게 된다. 영화 자체보다는 현장 실습 현장에서 죽음이 반복된 현실 때문에 드는 불안이다. 현장실습생 중 일부만 고용될 수 있기에 창우가 ‘더 열심히’ 적응하려고 애쓸수록 관객들은 불안해진다. 더 나아져야 한다는 조급함이 자칫 그를 위험에 내몰까봐서다.
<3학년 2학기>의 창우(유이하)와 우재(양지운)가 공장에서 쪽잠을 자고 있다. 작업장 봄 제공 |
이란희 감독은 직업계고 졸업생과 재학생, 교사, 교육청 관계자, 청년 노동운동 활동가, 용접사 등을 두루 인터뷰하고 시나리오를 썼다. 이 감독은 “현장실습생과 청년 노동자들의 죽음에 관한 기록을 찾아보면서 죽은 이의 친구였을, 혹은 후배였을 청소년들의 삶을 그려보고 싶었다”고 한다.
영화는 구조적인 문제를 소리 높여 이야기 하기보다 창우의 매일의 애씀에 집중한다. 이 감독은 “영화에서 기계소리만 나도 관객들은 누군가 다치거나 죽을까봐 걱정한다”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일터에서 죽어가는지, 극장 밖 관객들은 현실을 이미 알고 있다. 구조적인 문제가 직설적으로 읽히지 않게 도처에만 심어놓은 이유”라고 했다.
<3학년 2학기>는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4관왕, 지난해 서울독립영화제에서 3관왕 등 유수 독립영화제에서 상을 받으며 작품성을 인정 받았다.
전지현 기자 jhyu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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