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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남북은 어떻게 ‘통일 지향 특수관계’에 합의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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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남북은 어떻게 ‘통일 지향 특수관계’에 합의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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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991년 12월13일 제5차 남북고위급회담에서 채택된 ‘남북 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남북기본합의서) 서문의 “통일 지향 특수관계”는 긴 분단사에서 남과 북 당국이 문서로 합의한 유일무이한 ‘양자 관계’ 규정이다. 5차 회담에서 남쪽 수석대표 정원식 국무총리(오른쪽)와 북쪽 단장인 연형묵 총리(왼쪽)가 악수를 하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지난 1991년 12월13일 제5차 남북고위급회담에서 채택된 ‘남북 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남북기본합의서) 서문의 “통일 지향 특수관계”는 긴 분단사에서 남과 북 당국이 문서로 합의한 유일무이한 ‘양자 관계’ 규정이다. 5차 회담에서 남쪽 수석대표 정원식 국무총리(오른쪽)와 북쪽 단장인 연형묵 총리(왼쪽)가 악수를 하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지난 1991년 12월13일 제5차 남북고위급회담에서 채택된 ‘남북 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남북기본합의서) 서문의 “통일 지향 특수관계”는 긴 분단사에서 남과 북 당국이 문서로 합의한 유일무이한 ‘양자 관계’ 규정이다.



통일부가 2일 ‘통일지향 특수관계’ 합의에 이르는 남과 북 당국의 길고 복잡한 논의 내용이 담긴 1~8차 고위급회담(1990년 9월~1992년 9월) 사료 3172쪽을 일반에 공개했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가장 적대적인 두 국가 관계’ 선언 이후 남북관계의 새 길을 열어가야 할 과제를 짊어진 한국사회의 고민을 벼리는 데 요긴한 1차 문헌 자료다. 공개된 남북회담 문서 원문은 △통일부 남북관계관리단·북한자료센터 △국회도서관 △국립통일교육원 △목포통일플러스센터 △국회부산도서관에서 열람할 수 있다.



애초 고위급회담에 임한 남북 당국은 ‘양자 관계’ 명문화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1·2차 회담에서 양쪽이 내놓은 합의서 초안엔 ‘통일지향 특수관계’로 이어질 단초가 발견되지 않는다. 역사적 합의의 씨앗은 엉뚱하게도 유엔 가입을 둘러싼 이견 해소를 목적으로 이뤄진 ‘유엔 가입 문제 관련 실무대표 접촉’에서 뿌려졌다. 1차 고위급회담 때 북쪽의 ‘긴급의제’ 제안에 따라 판문점 중립국감독위 회의실에서 세 차례(1990년 9월18일, 10월5일, 11월9일) 열린 접촉에서 북쪽은 ‘단일 의석 유엔 가입’을, 남쪽은 ‘남북 동시 가입’을 고수했다. 북쪽은 남북이 합쳐 ‘하나의 조선’ 이름 아래 한 개의 의석을 갖자고 했고, 남쪽은 남북이 독립된 국가 자격으로 동시에 유엔에 가입하고 각자 별도의 의석을 가진다는 입장이었다.​



평행선을 그은 듯한 외양 속에 진전이 있었다. 1차 실무대표 접촉에서 남쪽 대표인 임동원 당시 ‘외교안보연구원 원장’이 남북 유엔 동시 가입은 북쪽 주장처럼 ‘분단 영구화’가 아니라 “통일이 될 때까지 잠정적 과도조치”이자 “서로 실체를 인정하는 바탕 위에서 통일지향적인 특수관계” 설정이라고 해석·제안한 것이다. 기본합의서 서문의 “통일지향” “잠정적” “특수관계”라는 개념의 등장이다.



남과 북은 우여곡절 끝에 유엔에 동시·분리 가입(1991년 9월17일)한 직후 평양에서 열린 4차 고위급회담(1991년 10월22~25일)에서 ‘양자 관계’와 관련한 각자의 정리된 견해를 문서로 처음 밝혔다. 북쪽 단장(수석대표)인 연형묵 정무원 총리는 첫날 내놓은 ‘북남 불가침과 화해 및 협력, 교류에 관한 선언(초안)’에서 “북과 남은…쌍방 사이의 관계가 나라와 나라 사이의 관계가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고”라고 명시했다. 기본합의서 서문의 “쌍방 사이의 관계가 나라와 나라 사이의 관계가 아닌”이라는 문구의 첫 등장이다.



남쪽 수석대표인 정원식 총리는 기조연설에서 밝힌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간의 화해·불가침과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초안)’를 통해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쌍방 간에 관계가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잠정적으로 형성되는 특수관계라는 점을 인정하고”라는 문구를 제안했다. 애초 임동원이 제안한 ‘통일지향 잠정적 특수관계’를 살리되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명시함으로써 북쪽의 ‘하나의 조선’ 주장을 배척한 것이다. 독일식의 ‘두 주권국가이되 서로에게 외국이 아니다’라는 특수관계론을 펼친 셈이다. 이 회의에서도 남과 북은 ‘양자 관계’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남과 북은 4차 회담 직후인 1991년 11월 판문점 남쪽 ‘평화의 집’과 북쪽 ‘통일각’을 오가며 4차례(11월11일, 11월15일, 11월20일, 11월26일) 진행한 ‘남북기본합의서 내용 조정과 문안 정리를 위한 대표접촉’에서 마침내 ‘양자관계’ 규정에 합의한다. 3차 대표접촉에서 남쪽이 내놓은 새 합의서(안)에서 “남과 북은…쌍방 간의 관계가 나라와 나라 사이의 관계가 아니라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잠정적으로 형성되는 특수관계라는 점을 인정하고”라며 그간의 양쪽 주장을 아우른 ‘절충 문구’를 제안하고, 4차 접촉에서 북쪽이 이를 사실상 그대로 반영한 ‘합의서(초안)’을 내놓음으로써 마침내 양자관계 합의에 이르렀다.



이렇게 남북기본합의서 서문에 명시된 ‘통일지향 특수관계’ 규정은 본질적으로 서로 다른 두개의 영혼을 한 데 품고 있다. 분단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지 않고 ‘통일 지향’을 명시했다는 점에서 미래 지향적이다. 다른 한편, 국제법적으로 서로 다른 두개의 주권국가임을 인정받은 유엔 가입 이후에도 양자 차원에서는 굳이 서로를 ‘주권국가’로 인정하기를 회피했다는 점에서 ‘퇴행적’이다. 실제 노태우 전 대통령은 2011년 펴낸 회고록에서 “북한을 권력 실체로는 인정하지만 국가로는 인정하지 않는다는 뜻이 있었다”고 밝혔다. 합의 이후에도 북쪽은 ‘하나의 조선’을 주장하며 “전국적 범위에서 민족해방과 인민민주주의 혁명과업 완수”(노동당 규약 서문)를 꽤 오래도록 고수했다.



서로를 주적으로 규정한 ‘윤석열-김정은 3년’을 거친 뒤 김 위원장은 남북관계를 ‘적대국 관계’로 재규정했다. 남북기본합의서 서문의 ‘통일지향 특수관계’ 규정에 담긴 어두운 심연을 ‘미래’가 제어하기에 역부족이었음을 깨닫게 한 ‘퇴행’이다. 서로를 인정·존중하는 ‘공존’의 토대 위에 ‘평화번영’을 도모하며 궁극적으로 한 데 어울려 사는 ‘통일’에 이르는 길은 멀고 험하다.



이제훈 선임기자 noma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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