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초반 비행선에서 영감을 받은 '취약할 의향-메탈라이즈드 벌룬'. 리움미술관 |
리움미술관 블랙박스 입구에 거대한 은빛 비행선이 날고 있다. 17m에 달하는 비행선 '취약할 의향-메탈라이즈드 벌룬'은 지난 세기를 추억한다. 20세기 초 체펠린 비행선은 시민의 사랑을 받았지만 1937년 공중에서 폭발한 힌덴부르크 참사 이후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기술적 진보에 대한 열망과 좌절이 녹아 있는 이 작품이 2016년 시드니 비엔날레 이후 다시 제작돼 서울에 설치됐다. 아름답지만 불안정하고, 거대하지만 취약한 비행선은 끝없이 이상을 향해 나아가는 인간의 운명을 암시하는 이불(61)의 대표작이다.
작년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파사드에 조각 네 점을 설치하며 세계를 누비고 있는 '국가대표 작가' 이불이 성대한 개인전으로 귀환했다. 리움미술관에서 이불의 대규모 서베이 전시 '이불: 1998년 이후'를 이달 4일부터 내년 1월 4일까지 연다.
이불은 1980년대 후반 사회·정치 비판을 담은 급진적 작업과 세계를 놀라게한 퍼포먼스로 '여전사'로 각인돼온 작가다. 1990년대 후반 주요 미술관 전시와 베니스 비엔날레 등을 통해 세계를 무대로 활동하며 신체와 사회, 인간과 기술, 자연과 문명 등을 고찰해왔다. 이번 전시는 제목처럼 1998년 이후 작가가 선보인 조각, 대형 설치, 평면, 드로잉과 모형 등 150여 점을 펼친다.
1일 만난 작가는 "2021년 서울시립미술관 개인전에서 1980년대 후반부터 약 10년간의 초기 작업과 퍼포먼스를 집중적으로 다뤘고, 이후 30년의 작업을 한자리에 모으고 싶었다. 보여주고픈 작품이 너무 많아 고르는 게 힘들었다"고 말했다. 그는 "제 정체성을 스스로를 규정하지 않는다. 여전사란 표현조차 제가 규정하지 않았다"며 웃었다. 전시는 야심만만한 연출을 보여준다. 비행선 아래에는 뉴욕에 설치된 조각 중 한 점인 '롱 테일 헤일로: CTCS #1'을 가까이서 마주할 수 있다. 동굴처럼 어두운 블랙박스 전시장으로 들어서면 바닥은 거울 조각으로 가득하다. 설치 작업 '태양의 도시 Ⅱ'는 거울 조각과 260개 LED 전구로 환영을 만들어낸다. 빛과 어둠이 충돌하고 체계와 구조가 붕괴되는 세계를 은유하는 작품이다.
1990년대 대표작 '사이보그 W6'. 리움미술관 |
거울 조각 위로는 1990년대 대표작 '사이보그 W6'이 걸렸다. 머리와 팔다리가 잘린 불완전한 몸은 사이보그가 현실이 된 21세기를 작가가 일찌감치 예견했는지 알려준다. 곽준영 전시기획실장은 "사이보그는 우리가 꿈꾸는 미래 이상향 역시 결국 기술을 장악한 권력에 의해 결정될 것이라는 냉소적 전망을 드러낸다"고 설명했다.
아래층인 그라운드갤러리에서는 2005년 이후의 대표작인 '몽그랑레시(Mon grand recit)' 연작이 전시의 중심을 이룬다. 개인적 서사도 곳곳에 녹아 있다. '벙커(M. 바흐친)'는 작가가 유년기 비무장지대에서 살면서 목격했던 벙커를 유토피아로 상상했던 추억에서 비롯된 작품이다.
회화처럼 보이는 '퍼듀' 연작은 자개나 돌가루 등을 혼합한 안료를 층층이 쌓고, 표면을 갈아낸 작업이다. 마치 퇴적층을 탐색하는 고고학적 발굴 과정을 연상케 한다. 52점 드로잉과 콘셉트 모형을 높이 17m 벽에 뺴곡히 채워 스튜디오를 재현한 공간은 조각이 어떻게 탄생하는지 엿보게 해준다.
많은 작품이 독일 표현주의 건축가 브루노 타우트, 유토피아 문학, 한국 근현대사 등의 개념을 필요로하는 난해한 전시다. 하지만 동시대 미술의 최전선에서 '혼종의 풍경'을 만들어내는 흥미로운 전시임을 부정할 수 없다. 관람객은 은빛 비행선, 거울 미로, 폐허를 닮은 구조물, 별과 가상의 공간 같은 화려한 볼거리를 통해 인간과 기술의 관계, 유토피아적 이상과 좌절이라는 공통된 질문을 만나게 된다. 떠들썩한 환호 혹은 비판. 어떤 반응도 고국에 돌아온 작가에게는 반가울 것 같다.
[김슬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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