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로 건너뛰기
검색
매일경제 언론사 이미지

잘나가던 포토그래퍼, 가난을 택하다… 실화로 사유하는 ‘선택’이란 영원의 난제[2025 베네치아영화제]

매일경제 김유태 기자(ink@mk.co.kr)
원문보기

잘나가던 포토그래퍼, 가난을 택하다… 실화로 사유하는 ‘선택’이란 영원의 난제[2025 베네치아영화제]

서울맑음 / -3.9 °
[2025 베네치아영화제] 발레리 돈젤리 ‘앳 워크’


이탈리아 베네치아영화제는 프랑스 칸영화제, 독일 베를린영화제와 함께 세계 3대 영화제로 불리는 영화의 준거점입니다. 제82회 베네치아영화제가 열리는 베네치아 리도섬에서 황금사자상 후보인 ‘경쟁 부문(In Competition)’ 진출작 소식을 빠르게 전해 드리겠습니다.



발레리 돈젤리 감독의 영화 ‘앳 워크’에서 주인공 폴은 포토그래퍼로서의 미래를 접고, 소설 쓰기를 선택합니다. 그는 극도로 가난해지고, 단기 일용직으로 살면서 반지하 독방에서 소설에 전념합니다. 이 영화는 ‘선택’의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IMDb]

발레리 돈젤리 감독의 영화 ‘앳 워크’에서 주인공 폴은 포토그래퍼로서의 미래를 접고, 소설 쓰기를 선택합니다. 그는 극도로 가난해지고, 단기 일용직으로 살면서 반지하 독방에서 소설에 전념합니다. 이 영화는 ‘선택’의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IMDb]


이 남자는 명망 있는 포토그래퍼였습니다. 하지만 어느 날 회심 끝에, 자신의 ‘예술적 무대’를 카메라 피사체가 아닌 백지(白紙) 위로 옮기기로 결심합니다. 사진이 아니라 소설을 쓰겠다는 다짐이었고, “써야만 한다”는 내적 명령이 그의 삶을 뒤흔들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지금까지 이뤘던 모든 걸 폐기하고, 삶의 지하로 내려가 글쓰기의 심연 아래 침잠합니다.

프랑스 작가 프랑크 쿠르테스의 자전소설 ‘À pied d’œuvre’의 내용입니다.

쿠르테스 작가의 실제 삶에 기반한 이 소설은 2023년 프랑스 갈리마르 출판사에서 출간됐고, 평단의 호평을 얻었습니다. 발레리 돈젤리 감독은 이 소설을 영화 ‘앳 워크(At Work)’로 연출했는데, 이 영화가 올해 제82회 베네치아영화제 ‘경쟁 부문’에 올라 황금사자상을 두고 다투는 중입니다.

베네치아영화제가 열리고 있는 ‘팔라초 델 치네마’에서 발레리 돈젤리 감독의 ‘앳 워크’를 살펴봤습니다. ‘인간의 선택’이라는 난제를 예술가의 삶에 투영한 작품으로, 울림이 큰 영화였습니다.

프랑크 쿠르테스의 책 ‘À pied d’œuvre‘의 표지. 갈리마르 출판사 폴리오 시리즈로 출간됐습니다. 제목을 번역하면 ’예술작업의 한복판‘쯤 될 듯합니다. [아마존]

프랑크 쿠르테스의 책 ‘À pied d’œuvre‘의 표지. 갈리마르 출판사 폴리오 시리즈로 출간됐습니다. 제목을 번역하면 ’예술작업의 한복판‘쯤 될 듯합니다. [아마존]

주인공 이름은 폴입니다. 사진작가에서 소설가로 ‘전향’한 예술적인 결심은 ‘지독한 궁핍’으로 이어졌습니다. ‘먹고사니즘’의 관점에서 본다면 그의 선택은 그야말로 ‘몰락으로의 길’이었습니다.

결실을 보지 못한 건 아니었습니다. 세 권의 소설을 출간했습니다. 그러나 독자 반응은 미미했고, 출판사도 그의 예술적인 결심에 크게 동조하지 않습니다.


멀쩡히 잘 지내던 폴이 그야말로 ‘소설에 미쳐’ 이전과 다른 삶의 길을 걷기 시작하자, 가족들조차 폴을 한심한 시선으로 바라봅니다. 폴의 부친은 식탁에서 아들을 못마땅한 얼굴로 쳐다보며 굳은 얼굴로 한숨지으며 말합니다.

“그래, 공쿠르상이라도 받겠다는 거냐?”

영화 ‘앳 워크’의 주인공 폴 역을 맡은 배우 바스티엥 부용(오른쪽)과 상대역인 비르지니 르두아앵이 29일(현지시간) 베니스영화제 레드카펫에 선 모습. [로이터·연합뉴스]

영화 ‘앳 워크’의 주인공 폴 역을 맡은 배우 바스티엥 부용(오른쪽)과 상대역인 비르지니 르두아앵이 29일(현지시간) 베니스영화제 레드카펫에 선 모습. [로이터·연합뉴스]


나이는 42세, 그에게 사진은 ‘본업’이 아닌 ‘생업’에 가까웠고, 사진의 세계에서의 이탈을 선택한 그는 아예 사진기까지 중고품으로 내다 팝니다.


그러고는 ‘자빙(JOBBING)’이라는 어플에 가입해 호출을 받으면 달려가 일손을 돕는 썩 좋다고 할 수 없는 저급 일자리를 전전합니다. 한국 기준으로도 최저임금도 되지 않는, 특히 폴이 해본 적도 없는 잡일들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는 실수를 반복하지만 몇 유로라도 벌 생각으로 ‘자빙’ 어플의 호출을 기다립니다. 18유로쯤 받고 정원 관리해주기, 20유로 받고 벽에 못질하기 등 궁색한 생활이었습니다.

하지만 소설가가 되겠다는 선택으로 인해 그는 가난해졌고 그의 결혼생활은 종료됐으며, 모건 스탠리 인턴에 뽑혔다며 반갑게 전화를 걸어오는 아들 앞에서 면목이 없습니다. 그는 반지하 독방에서 네 번째 책을 쓰고 있습니다. 폴의 책은 성공을 거둘 수 있을까요.

그런데 그에 앞서, 폴의 불가해한 선택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걸까요.


영화 ‘앳 워크’를 연출한 발레리 돈젤리 감독이 29일(현지시간) 베니스영화제 레드카펫에 선 모습. [로이터·연합뉴스]

영화 ‘앳 워크’를 연출한 발레리 돈젤리 감독이 29일(현지시간) 베니스영화제 레드카펫에 선 모습. [로이터·연합뉴스]


영화 ‘앳 워크’는 인간의 피할 수 없는 영원한 질문, 바로 ‘선택’을 사유하는 영화입니다.

살다보면 그런 감정이 누구에게나 찾아오지 않던가요. 지금 내가 가고 있는 길이 뭔가 어긋날 골목길로 들어선 건 아닐까 하는 생각. ‘지금, 여기’가 아닌 ‘그때, 저기’에 내가 실은 가야만 했던 길이 숨겨져 있던 건 아닐까, 지금 가고 있는 길조차도 어쩌면 ‘그때, 저기’를 찾아가기 위한 에움길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 말이지요. 폴은 사진의 길을 선택했지만 소설이 자신의 길이라고 느꼈습니다. 그가 삶의 시간 위에 축조한 성(城)을 스스로 허물어뜨린 뒤 모래 위에 초막집을 세우기 시작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특히 그가 이 일을 선택한 건 단지 ‘선택적 가난’으로 진입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노동을 할 때는 생각을 하지 않는 무념(無念)을 유지하다가, 밤중 집필에 들어갈 때 생각할 수 있는 삶의 여백을 만들기 위한 불가피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수성하고 유지함으로써 머물 것인가, 해체하고 재설계함으로써 ‘나’의 자아를 찾을 것인가를, 이 영화는 우리에게 ‘선택’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유럽 영화 매체 씨네유로파는 ‘앳 워크’ 리뷰기사에서 어니스트 헤밍웨이가 말했다고 전해지는 유명한 격언, “글쓰기는 쉽다. 네가 할 일은 그저 그저 타이프라이터 앞에 앉아 피를 흘리면 된다”를 떠올리게 하는 영화라고 상찬했습니다.

영화는 은유와 상징으로 시작됩니다. 영화의 첫 장면은 한 주택의 철거현장인데, 주택의 벽을 해머로 내리는 일용직 폴의 모습은 그가 부수고자 했던 ‘현실의 벽’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앳 워크’는 6일(현지시간) 베네치아영화제 폐막식에서 유의미한 성과를 거둘 수 있을까요. 하지만 수상 여부와 무관하게 영화는 우리 모두의 삶에 드리워진 선택의 무게를 환기하는 영화입니다.

[ⓒ 매일경제 & mk.co.kr,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