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로 건너뛰기
검색
한국일보 언론사 이미지

문형배 “정치할 거냐고요? 제가 한 말은 대체로 지키는데 걱정 마세요”

한국일보
원문보기

문형배 “정치할 거냐고요? 제가 한 말은 대체로 지키는데 걱정 마세요”

서울흐림 / -0.8 °
[인터뷰] 문형배 전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
“평의 때 고성 오간 적 없어... 단 한 번 평결”
“‘왜 빨리 선고 안 하냐’ 압박하던 국회,
그런 모순이 어디 있나.. 자신 돌아보길”
“대통령 윤석열 파면” 말한 뒤 든 생각은…
“자존감 유지할 수 있었던 비결은 유머”
“가난했지만, 타인의 호의로 여기까지 왔다”


문형배 전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을 29일 서울 중구 한국일보사에서 만났다. 문 전 재판관은 이날 한국일보 시사유튜브 ‘이슈전파사’에도 출연해 라이브로 시청자들과 만났다. 하상윤 기자

문형배 전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을 29일 서울 중구 한국일보사에서 만났다. 문 전 재판관은 이날 한국일보 시사유튜브 ‘이슈전파사’에도 출연해 라이브로 시청자들과 만났다. 하상윤 기자


4월 1일 오전 헌법재판소 평의실. 헌법재판관 여덟 명이 모두 원탁에 둘러 앉았다. 문형배(60) 당시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이 재판관들에게 물었다. “지금부터 평결을 해도 되겠습니까.”

신임 재판관부터 차례대로 입을 열었다. “인용”, “인용”, “인용”… 일곱 번의 ‘인용’이 평의실에 울렸다. 마지막으로 문 대행의 순서. 그 역시 내심 안도하며 말했다. “인용입니다.” 평결은 금세 끝났다. 이미 인용론과 기각론의 초안을 써두고 평의에 평의를 거듭한 끝에 나온 결론이었다.

29일 만난 문 전 재판관은 “치열했지만 원만했다”고 당시 탄핵 심판 과정을 돌아봤다.

111일 동안 확인되지 않은 설들이 헌재를 휩쌌다. “평의 때 고성이 들렸다”, “5대3 데드록(교착 상태)에 빠졌다”, “평의에 진척이 없다”… 그는 “고성이 오간 적도 없고, 평결은 단 한 번 했다”는 말로 뜬소문을 일축했다.

문 전 재판관은 이번 탄핵 심판의 의미를 이렇게 정리했다. “민주주의가 우리나라에 확고하게 뿌리내렸음을 확인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다시 말하면, 가지를 친다고 해서 그 나무를 흔들 수는 없다는 거죠. 이미 민주주의는 대한민국에 확고하게 뿌리내렸습니다.”

문 전 재판관은 최근 첫 책 ‘호의에 대하여’(김영사)를 냈다. 에세이집이다. 2006년부터 블로그 ‘착한 사람들을 위한 법 이야기’에 써온 글을 매만지고 추려 엮었다.


왜 ‘호의’인가. 호의는 지금의 문 전 재판관을 있게 한 동력이다. 그는 “어린 시절이 아름답다는 데 동의하지 못한다. 힘들었다”고 했다. 교복 살 돈이 없어 친척의 것을 물려 입고, 졸업식 날엔 친구 것을 빌려 입었다.

“보통 가난은 부끄러운 게 아니라고 그러잖아요. 하지만 그 말은 진짜 가난한 사람에게는 와 닿지 않아요. 가난은 그냥 부끄러운 거예요.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에요. 생각해 보세요. 가난하면은 옷이 꾀죄죄해요. 머리도 정돈돼 있지 않죠. 그렇게 공중에 나가는데 그게 왜 안 부끄럽겠어요.”

그 메마른 땅에 물을 부어준 이가 김장하(81) 선생이다. 경남 진주에서 남성당 한약방을 하며 번 돈을 꾸준히 지역 사회에 나눠온 사회사업가다. 문 전 재판관 역시 고등학교 2학년부터 김 선생의 장학금을 받으며 공부할 수 있었다. “가난에서 탈출하려면 다른 사람들의 호의가 있어야 하고, 그 호의가 제도화하고 구조화한 게 국가”라는 철학의 씨앗도 따지고 보면 선생이 심어준 것이다.


그는 지난 4월 18일 6년간의 헌법재판관 임기를 마쳤다. 33년간 입은 법복도 내려놨다. 김 선생에게 받은 호의를 지역법관으로서 또 헌법재판관으로서 공동체에 나누고자 했던 시간이었다. 그는 말했다. “이제 선생님께 받은 도움의 이자는 갚았어요. 지금부터는 원금을 갚겠습니다.”

◇가난했지만, 김장하 선생 덕에 부끄럽지 않았다



문 전 재판관은 28일 첫 책인 에세이집 ‘호의에 대하여’를 출간했다. 그가 자신의 책을 들고 있다. 하상윤 기자

문 전 재판관은 28일 첫 책인 에세이집 ‘호의에 대하여’를 출간했다. 그가 자신의 책을 들고 있다. 하상윤 기자


-책 제목이 ‘호의에 대하여’예요. 생애 첫 호의가 뭔가요.

“김장하 선생이죠. 저한테 돈을 줄 이유가 없는 분이 제게 등록금과 책값을 대줬죠. 제게 호의를 베푼 거고 호의를 갚아야 된다는 생각으로 살았어요.”

고교 2학년 때 은사가 연결해 준 인연이었다. 석 달에 한 번씩 남성당 한약방으로 ‘장학금’을 받으러 갔고 그때마다 선생은 별말 없이 돈을 줬다. 어릴 땐 그저 ‘돈 많은 부자인가 보다’ 생각했다.


-그 시기에 이 김장하 선생이라는 분은 어떤 존재였나요.

“고마운 분이죠. 흔히 주변에서 보면, 장학금을 주면서 학생의 심정을 배려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아요. 사진을 찍고 기자를 부르고. 그 장학금을 받는 학생의 입장을 한번 생각해 봐요. 학생에겐 내 가난을 증명하는 자리예요. 그런데 김장하 선생은 그렇지 않았어요. 그러니까 부끄럽지도 않았고 자존감이 살았죠. ‘아, 이 양반이 있어서 내가 공부를 할 수 있구나. 열심히 하자. 사회는 이렇게 굴러가는 거구나’ 생각했죠. 그런 호의가 제도화하고, 구조화하는 게 국가입니다.”

-졸업사진을 찍을 때 친구 교복을 빌려 입어서 이름표가 다르게 달려있는 사진이 화제가 됐어요.

“잘 기억은 안 나요. 추측해 보자면, (친척 것을 빌려 입다 보니) 교복이 너무 낡아서 학교에 안 입고 간 것 같아요. 부끄러우니까요. 그래서 친구 교복을 입고 찍은 것 같아요.”

-그 시절을 어떻게 견뎠나요.

“여러 호의가 있었죠. 예를 들면, 저는 참고서가 없었어요. 이 친구, 저 친구한테 빌려서 공부했죠. 그거 호의잖아요. 저는 가난했지만, 그런 사람들의 호의로 버틴 거예요. 친구들이 매점 가서 뭘 사 먹으면 저한테도 나눠줬고요. 그런 기억이 있으니 내가 좀 잘됐을 때는 (다른 이들에게) 돌려줘야 한다는 생각이 있죠.”

◇이 사회는 호의 없이는 굴러가지 못한다



문 전 재판관은 올해 4월 18일 헌법재판관 임기 6년을 마쳤다. 당시 퇴임식을 마친 문 전 재판관이 직원들의 환송을 받으며 헌법재판소를 떠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문 전 재판관은 올해 4월 18일 헌법재판관 임기 6년을 마쳤다. 당시 퇴임식을 마친 문 전 재판관이 직원들의 환송을 받으며 헌법재판소를 떠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손석희의 ‘질문들’ 인터뷰를 보니 오랜 벗인 양기식씨가 “가난하지만 찌부러지지 않은 친구”라고 표현을 했더라고요. 그 힘은 어디서 나왔나요.

“자존감이죠. 이 역경을 극복할 힘이 내게는 있다고 생각했어요. 서울로 대학을 와서 만난 친구들을 보니까 그 친구들은 책을 진짜 많이 읽었더라고요. 세계문학전집 같은 것들요. 그래서 그때부터 저도 책을 읽기 시작했어요. 그 이후로도 쭉. 그런데 대개 사람들이 책을 안 읽잖아요. 그럼 결국 저는 그 사람들보다 책을 많이 읽은 사람이 된 거죠. 끝은 그렇게 다를 수 있다는 자존감이 예전부터 있었어요.”

그는 유명한 ‘독서광’이다. 좋아하는 책은 여러 번 읽는다. 읽을 때마다 다른 생각을 기록해 두기도 한다. 책 ‘호의에 대하여’엔 그의 그런 독서일기도 있다.

-호의의 가치가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세상이라는 생각을 많이 하게 돼요.

“보세요. 동물 중 인류가 굉장히 (생존에) 취약해요. 그런데도 문명을 이뤘어요. 그건 호의 때문에 그런 거예요. 인류는 협력할 줄 알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역경을 극복했어요. 지금은 그게 너무 당연해져서 이 공동체를 끌고 가는 힘이 뭔지를 모르는 거예요. 따지고 보면, 이 사회는 호의 없이는 굴러갈 수 없어요.”

-그게 복지제도나 사회 안전망의 시작이겠죠.

“맞아요. 내 옆의 사람이 지독하게 불행한데 내가 어떻게 계속 행복할 수 있나요? 우리는 다 연결돼 있잖아요. 집에 가는 길가에 헐벗고 굶주린 사람들이 서 있다고 생각해 보세요. 형편 되는대로 구제할 수 있는 노력을 해야죠. 그래서 그가 옷도 입고 밥도 먹고 하면 사회에 유익한 여러 가지 일을 할 수 있잖아요. 그럼 그걸로 나도 행복해질 수 있는 거예요.”

◇“나한테 갚지 말라”는 선생의 말, 이해 안 됐다



김장하 선생은 경남 진주에서 남성당 한약방을 운영하며 지역 공동체에 나눔을 실천한 사회사업가다. 다큐멘터리 ‘어른 김장하’로 그의 진면모가 널리 알려졌다. 시네마달 제공

김장하 선생은 경남 진주에서 남성당 한약방을 운영하며 지역 공동체에 나눔을 실천한 사회사업가다. 다큐멘터리 ‘어른 김장하’로 그의 진면모가 널리 알려졌다. 시네마달 제공


사법시험에 합격하고 나서 김장하 선생을 뵈러 가니 선생이 문 전 재판관에게 했다는 말이 있다. “내가 아니었어도 자네는 오늘의 자네가 됐을 거다. 내게 고마워할 필요 없다. 나는 이 사회의 것을 자네에게 주었으니 갚으려거든 내가 아니라 이 사회에 갚아라.”

-당시에 그 말씀이 어떤 뜻인지 이해가 되셨나요. 살면서 곱씹어 보게 됐을 것 같아서요.

“당시엔 약간 불만이었어요. 왜냐하면은 당신한테 갚으라면 쉽잖아요. 그런데 ‘나한테 갚을 게 아니다’라고 하시니 그럼 누구한테 갚으라는 건지, 어떻게 갚으라는 이야기인지. 판사 생활을 하면서 곱씹어 보니까 ‘이거는 내가 좋은 판사가 되라는 뜻이구나. 그걸 한결같은 마음으로 하라는 거구나’ 싶더라고요.”

-‘김장하 정신’을 표현해본다면, 뭘까요

“제가 그리기에 너무 큰 산이라서 뭐라 말할지 잘 모르겠지만, 저는 그분이 가치 있는 삶을 창조했다고 생각해요.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되는지 그 삶을 창조했다는 거죠. 그게 가능했던 이유는 그분이 변방에 살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중심부는 기존 가치를 고수한 곳이에요. 창조가 일어나는 곳이 아니에요. 창조는 변방에서 일어나는 거예요. 그런데 전제가 있어요. 중심부에 대한 콤플렉스가 없어야 돼요. 이게 신영복 교수의 말입니다. 그걸 증명한 분이 저는 김장하 선생님이라고 생각해요.”

그는 “숨겨진 이야기”라며 김장하 선생과 관련한 사연도 공개했다. 알려진 대로 김 선생은 언론의 숱한 취재 요청에 일절 응하지 않은 걸로 유명하다. 오랜 기간 김주완 전 경남도민일보 기자가 선생의 주변 인물을 취재해 쓴 책 ‘줬으면 그만이지’(피플파워)를 내면서 알려졌다. 이후엔 MBC경남이 김 기자와 협업해 다큐멘터리 ‘어른 김장하’를 만들었다. ‘김장하 정신’이 세인의 마음에 새겨진 계기다. 이 작품은 2023 백상예술대상 TV부문 교양 작품상을 받기도 했다.

“김주완 기자가 오랫동안 김장하 선생님을 취재했잖아요. 제가 그분을 만나 책 출간도 독려하고 선생님과 관련된 에피소드도 전해줬죠. 말하자면 취재원이 된 거죠. 김장하 선생님은 절대 자신이 한 일을 스스로 알릴 분이 아니니까요. 그런데 마침 김 기자가 책을 쓰겠다고 나섰으니 저로선 얼마나 고맙습니까. 그러니까 저도 음으로, 양으로 ‘어른 김장하’를 탄생시키는 데 일조했어요. (웃음)”

◇법복 입은 첫 마음 ‘나쁜 판사는 되지 말자’



그는 고교 때 일치감치 ‘법으로 사회 문제를 해결해보자’고 마음먹었다. 사진은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 당시 헌재 대심판정에 앉아있는 문 전 재판관. 한국일보 자료사진

그는 고교 때 일치감치 ‘법으로 사회 문제를 해결해보자’고 마음먹었다. 사진은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 당시 헌재 대심판정에 앉아있는 문 전 재판관. 한국일보 자료사진


서울법대에 진학한 그는 만 스물한 살에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인권 변호사를 하고자 했지만 현실의 문제를 극복할 자신이 없어 지역법관으로 방향을 틀었다.

-학창시절에 왜 ‘법의 길’을 가고자 마음먹었나요.

“사회 문제에 좀 관여하고 싶었던 거 같아요. 고교 때 보통 뉴스를 대화 소재로 안 삼잖아요. 그런데 저는 그렇지 않았어요. (사회 문제를) 법으로 풀어봐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정치엔 관심이 없었고요.”

정치에 뜻이 없는 건 지금도 마찬가지. 그는 인터뷰 중에도 기회가 될 때마다 강조했다. 아예 묻지 말란 뜻이다. 이미 여기저기서 질문을 받았던 탓이다. “어떤 분이 저한테 자꾸 ‘정치할 거다’라고 그러던데, 제가 정치 안 할 거라는 걸 어떻게 증명해 드릴까요. 정치 안 합니다. 제가 말한 거는 대체로 지킵니다. 정치 안 하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정치권에서 영입 제안이 있었느냐’는 질문엔 “없었다. 한 번도 없었다”고 답했다.

-1992년 부산지법 판사로 처음 법복을 입을 때 마음은 뭐였나요.

“좋은 판사는 아니라도 나쁜 판사는 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어요.”

-33년 만에 법복을 내려놓는 마음은 또 어땠나요.

“되게 좋았어요. ‘이제 자유다. 쉬어야겠다’ 싶었죠.”

◇“왜 빨리 선고 안 하냐”는 국회의 모순



헌법재판소의 탄핵 심판이 이어지는 동안 헌재 앞에선 탄핵 찬반 시위가 이어졌다. 국회의원들까지 거리로 나서 시위를 자극했다. 사진은 올해 3월 헌재 앞 시위의 한 장면. 한국일보 자료사진

헌법재판소의 탄핵 심판이 이어지는 동안 헌재 앞에선 탄핵 찬반 시위가 이어졌다. 국회의원들까지 거리로 나서 시위를 자극했다. 사진은 올해 3월 헌재 앞 시위의 한 장면. 한국일보 자료사진


-헌법재판관 임기 마지막 해에 대통령 탄핵 심판 선고를 하게 될 줄은 모르셨죠. 2017년엔 부산가정법원에 계실 때인 것 같은데,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심판 선고를 보면서 어떠셨나요.

“예상치 못한 일이었죠. 하지만 8대0 파면 선고가 나올 거라고 예상했어요. ‘국정을 저런 식으로 운영하는데 파면 안 시킬 수가 있나. 저건 8대0이다’ 예측했죠.”

-8년 만에 같은 일이 반복됐어요. 윤석열 전 대통령 탄핵 심판 사건은 어떤 마음가짐으로 시작하셨나요.

“재판할 때는 항상 비슷해요. 우리한테 오는 사건은 다 역사적인 사건이자 어느 하나도 가벼운 게 없으니까.”

-처음에 인용론과 기각론의 초안을 각각 써두고 평의를 거듭했다고요.

“중요 사건은 인용론과 기각론을 일단 써요. 그런 뒤 쟁점별로 논거를 두고 평의를 하죠. 누군가 이 논거는 약하다고 지적하면, 누군가 다음 평의 때 그걸 수정해서 가져오고, 그 안을 두고 또 토론을 하죠. 그렇게 쭉 가는데 그 사건 결정문을 보시면 알겠지만 쟁점이 10개가 넘습니다. 그걸 하나하나 정리하는 데 시간이 많이 걸렸어요. (정확한 횟수는 모르겠지만) 하여튼 평의를 많이 했어요. 그렇게 완전하게 이해를 하고 난 다음에 표결을 하는 겁니다.”

-가장 논쟁적인 대목은 뭐였고, 어떻게 해소했나요.

“그건 말 못해요.”

-국회나 국민이 예상하는 것보다 선고 시기가 지연되니 여러 추측이 난무했어요. 그런데 당시 업무가 과중하기도 하지 않았나요. 한덕수 전 국무총리, 이진숙 방송통신위원장, 최재해 감사원장을 비롯해 국회가 넘긴 탄핵소추안이 쌓여있었으니까요.

“제 기억에 10건 정도 됐어요. 국민이 ‘왜 탄핵 재판이 늦어지냐’ 하는 건 정당해요. 그런데 국회가 탄핵 심판 사건 10건을 넣어놓고 왜 빨리 선고를 안 하냐고 하는 건 모순이죠. 대통령 탄핵 심판 사건이 중요하면 그것에만 집중하게 할 수 있게 해야죠. 게다가 탄핵 심판 사건 중에 상당수가 기각됐잖아요. 심리를 해서 구제해 줘야 할 건을 전부 미루고 이 사건만 해야 된다는 건 아니잖아요. 그렇다면은 재판 처리에 시간이 걸리는 것을 좀 기다려줘야 되지 않습니까?”

-재판관들이 보안은 어떻게 지키셨나요. 평의를 회의실 밖에서 들을 수도 있나요?

“보안을 지킨다는 각오가 없으면 재판관을 할 수 없어요. 평의하면서 고성이 오간 적도 없고, (그런 일이 있다 하더라도) 밖에서 들리지도 않아요. 치열하게 토론한 건 맞지만 평의는 원만했어요.”

-주변에서 연락도 많이 했을 것 같아요.

“전화, 문자, 카톡… 많이 왔는데요. 반응한 적은 없습니다. 보안은 재판관들이 의지를 가지면 다 지킬 수 있습니다.”

◇주문 말한 뒤 든 생각은… ‘요구대로 잘 했나’



문 전 재판관이 29일 한국일보 시사유튜브 ‘이슈전파사’에 출연해 탄핵 심판 당시를 돌아보고 있다. 화면 캡처

문 전 재판관이 29일 한국일보 시사유튜브 ‘이슈전파사’에 출연해 탄핵 심판 당시를 돌아보고 있다. 화면 캡처


-선고 기일인 4월 4일 아침 선고하기 전에 미리 연습을 하셨다고요.

“재판관들이 앞에서 한번 해보라고 하더라고요. 거절하고 사무실로 가서 선고 요지를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봤어요. 해 보니 17, 18분 정도 걸리더라고요. 내부적으로 재판관들이 20분 정도로 하는 게 좋겠다고 의견을 모았거든요. 그래서 실제 선고 때는 연습한 것보다 조금 더 느리게 해도 되겠다고 생각한 거예요. 평소에 제가 말이 좀 빠르고 목소리가 작아요. 그래서 선고할 땐 또박또박 크게 말했죠. 22분이 걸렸더라고요.”

-마지막 주문을 말씀하실 때 심경 생각나시나요.

“심경이라기보다는 ‘(재판관들) 당신들이 요구한 대로 내가 잘 읽었냐, 이 정도면 되겠나’ 하는 생각이 들었죠.”

‘문형배식 유머’다.

-그래서 나중에 실제 반응도 들으셨나요.

“잘 읽었다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그때 제가 발음을 하나 틀린 부분이 있어요. 그걸 어느 재판관이 지적해줬죠.”

◇탄핵 결정문 필사 열풍, 바람직하지만…


-결정문이나 선고 요지 필사 열풍도 불었어요.

“그런 말 저도 들었습니다. 바람직하다고 생각해요. 당시 저희가 선고 요지에서 강조한 말들이 몇 가지가 있거든요. 그중에 하나가 관용과 자제예요. 필사를 하시면서 ‘왜 재판관들이 관용과 자제를 썼을까. 나는 그걸 실천하고 있나’ 이런 생각도 해주셨으면 더 고맙겠어요. 관용과 자제라는 건 이런 거예요.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을 존중하는 것, 내가 가지고 있는 권한 행사에 신중함을 잃지 않는 것이죠.”

그는 이 대목에서 정치권에 쓴소리를 부연했다.

“그 다음 정치권에서 ‘상대 진영에게 내가 그렇게 하고 있나’ 생각해보는 데까지 발전했으면 좋겠어요. 탄핵 결정문을 일회성이라고 생각하지 말았으면 해요. 앞으로 우리나라가, 우리 정치가 나아가야 될 바를 재판관 8명이 111일 동안 고민해서 내놓은 거 아니에요. 그러면 정치인들도 한번 음미를 해 봤으면 좋겠어요. 왜 굳이 관용과 자제라는 표현을 넣었을까 생각을 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그래야 그 열풍이 의미가 있는 거죠. 글씨 연습하려는 건 아니잖아요.”

-선고 요지 중 “피청구인과 국회 사이에 발생한 대립은 일방의 책임에 속한다고 보기 어렵고 이는 민주주의 원리에 따라 해소돼야 할 정치의 문제”라는 지적도 인상 깊었어요.

“민주주의 원리는 견제와 균형입니다. 견제와 균형은 성문 헌법에 따라야 되지만, 비공식적인 규범인 관용과 자제에도 충실해야 민주주의가 깨지지 않는 겁니다. 관용과 자제를 잃었을 때 정치는 실종돼요. 정치가 실종되면 민주주의가 어떻게 유지, 발전되겠어요? 그 대목을 비판하는 글도 봤어요. 헌재가 피청구인의 잘잘못을 따지면 되지, 왜 국회의 잘잘못을 따졌냐는 건데 그건 우리의 뜻을 잘못 이해하시는 겁니다. 우선 성문 헌법에 따르더라도 위헌입니다. 파면이에요. 그럼 피청구인의 입장에서도 이걸 한번 정당화해보자 생각한 거예요. 우리의 결론은 뭐냐. 그건 정치의 문제라는 거예요. ‘정치로 풀어야지, 왜 병력을 동원해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냐, 그러니까 당신은 파면이다’ 이렇게 정리된 거예요. 이 과정이 왜 안 필요합니까? 논리의 근거를 명확히 해 준 거 아니에요. ‘이런 관점에서도 안 되고, 저런 관점에서도 안 되고, 그러므로 파면이다.’ 이렇게 하는 게 맞죠.”

윤 전 대통령의 처신이나 내란 특검 수사로 드러난 한 전 총리의 혐의, 파면 선고 이후 여야의 움직임과 관련해서도 물었으나 그는 “언급하지 않겠다”, “정치적으로 논란을 일으키고 싶지 않다”는 말로 답변을 갈음했다.

-윤 전 대통령 탄핵 심판 사건의 의미는 뭐라고 보시나요.

“우리나라에 민주주의가 확고하게 뿌리내렸음을 확인했어요. 다시 말하면 가지를 친다고 해서 그 나무를 흔들 수는 없다는 거죠.”

◇헌법 10조를 1조로 해야 하는 이유



33년간 입었던 법복을 벗은 그는 “입고는 있었지만 참 버거운 옷이었다”고 돌아봤다. 하상윤 기자

33년간 입었던 법복을 벗은 그는 “입고는 있었지만 참 버거운 옷이었다”고 돌아봤다. 하상윤 기자


-최근에 사적 제재를 소재로 한 드라마가 잇따라 인기를 얻었어요.

“그런 드라마가 환호받는다는 것은 공적 제재가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다는 뜻이죠. 저 자신을 포함해서 법원이 반성해야 되는 내용이라 생각해요. 그럼 공적 제재를 강화하는 방법이 뭐냐. 중한 건 중하게 하고 가벼운 건 가볍게 해야 돼요. 그런데 이게 또 생각의 차이가 있거든요. 그럼 뭐가 중하냐. 고위 공직자 뇌물, 정치인의 부패, 대기업 회장들이 구조적으로 횡령·배임하는 거 이런 거 중해요. 중하게 처벌해야 돼요. 그런데 예를 들어 교통사고인데 돈이 없어 합의 못 하는 사건이 있어요. 그거 중하지 않은 사건입니다. 합의 안 되더라도 좀 선처할 수 있는 거면 과감하게 선처하십시오.”

-좋아하는 헌법 구절로 10조를 꼽으시잖아요.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이렇게 시작하죠.

“그 뒤 문구도 중요해요.”

-그렇죠.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진다’로 이어집니다. 개헌을 하면 이걸 1조로 해야 된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어요.

“독일이 그래요. 우리나라 헌법 1조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죠. 국가부터 먼저 나오잖아요. 그런데 국가와 개인을 놓고 볼 때 누가 우선이에요? 개인이 우선이에요. 국가가 있어서 국민이 있는 게 아니에요. 개인들이 자기들의 기본권을 보장하기 위해서 국가를 만든 거예요. 그러니까 국가는 그 존재 이유가 국민의 기본권 보장입니다. 헌법의 성질에 비추어 볼 때 10조는 1조로 가야 돼요. 그리고 1조가 2조로 가야 됩니다. 그런 발상의 전환이 필요해요.”

-2006년부터 블로그 ‘착한 사람들을 위한 법 이야기’를 운영하셨어요. 왜 블로그를 쓰게 되셨나요.

“법을 몰라서 손해를 보는 일이 없으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시작했어요. 그런데 사람이 살다 보면 글을 쓰고 싶을 때가 있잖아요. 그런 때 또 썼죠. 이번에 책 낼 때 보니 ‘내가 이렇게 많이 썼나’ 싶을 정도로 글이 많더라고요. (한창 많이 쓸) 그때 아마 좀 힘들었나 봐요. 사람은 힘들 때 글을 쓰잖아요. 행복한 사람은 글을 쓰지 않아요. 그러니 읽는 사람이 위로를 받는다고 생각해요. 힘든 사람이 쓴 글이니까.”

◇“유머는 자존감 유지의 비결”



문 전 재판관이 29일 한국일보 시사유튜브 ‘이슈전파사’ 라이브 인터뷰에 출연해 김지은(왼쪽) 기자와 인터뷰하고 있다. 화면 캡처

문 전 재판관이 29일 한국일보 시사유튜브 ‘이슈전파사’ 라이브 인터뷰에 출연해 김지은(왼쪽) 기자와 인터뷰하고 있다. 화면 캡처


-인터뷰를 하면서 마음의 바탕에 유머가 깔려있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유머를 잃지 않아야 자존감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창피함이 해소돼요. 실수해도 유머로 해소하면 됩니다. 평소에 그래서 개그 프로나 예능, 코미디 영화를 좋아하고 자주 봐요. 오늘 저와 얘기하면서 몇 번 웃으셨어요? 여러 번 웃으셨어요? 그럼 됐어요.”

문 전 재판관은 이날 별도 인터뷰를 포함해 한국일보 시사유튜브 ‘이슈전파사’ 출연에도 응했다.

“‘이슈전파사’ 구독자가 아직 50만 명이 안 되잖아요. 50만 명 넘으면 이제 저와 ‘거래’를 끝내시죠. 하하. 잘 되는 유튜브 채널들은 제안이 들어와도 하지 않았어요.”

이 역시 ‘문형배식 유머’다. 그의 유쾌한 말에서 작고 약한 것에 먼저 눈을 돌리는 ‘호의’가 느껴졌다.

그는 “비수도권 대학의 강단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또 학생들에게서 배우고 싶다”고 했다. 그가 받은 호의의 ‘이자’는 갚은 것 같다고 했으니, 그보다 더 큰 ‘원금’은 어떻게 상환할지 기대되는 건 나뿐인가.


김지은 콘텐츠스튜디오팀장 luna@hankook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