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폭력 피해 생존자 7명이 공동으로 펴낸 문집 ‘그래서 글을 써’ 표지. 참여자 ‘푸른나비’(필명)가 ‘아픔의 동료’에게 건네는 말을 포스트잇에 써 붙였다. 한국성폭력상담소 제공 |
한 여자가 가위를 들고 머리칼을 숭덩숭덩 잘랐다. 그 모습을 본 아버지는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여자는 울며 말했다. 오빠가 나를 성추행했고, 그동안 힘들었고, 그래서 죽으려 했다고. 아버지가 건넨 건 이해나 위로가 아닌 돈이었다. 미용실에 가서 머리를 다듬고 오라고 했다. 난데없이 짧아진 머리칼을 보고도 가족들은 누구 하나 자초지종을 묻지 않았다. ‘묻지 않음’은 ‘침묵하라’는 말이었다. 아니, 말보다 더 크고 또렷한 압박이었다.
40년이 흘렀다. 침묵 속에서 천천히 죽어가던 여자는 노트북 앞에 앉았다. 묻지 않아도 말해야 했다. 그러지 않고는 살 수 없었다. “‘침묵은 죽음이다’라는 구호를 본 적 있어요. 성폭력 피해자는 말하지 말라는 사회적인 압박을 받아요. 하지만 침묵하면 죽을 수밖에 없어요. (…) 말을 해야 사는데, 말하지 말라고 하니까, 난 글로 써서라도 말해야겠다 싶었어요.”
지난 14일 서울 마포구 한국성폭력상담소에서 만난 ‘물’(필명)이 말했다. 물은 어린 시절 친오빠에게 성폭력을 당했다. 둘 다 초등학교 입학 전일 정도로 어렸지만 물은 직감적으로 알았다. 부모에게 말하면 안 된다는 것을. 그 직감은 결과적으로 맞았다. 수십년 뒤 엄마에게 당시의 일을 털어놓았을 때 엄마는 이렇게 말했다. “그때 네가 그런 얘기까지 했다면 정말로 나는 힘들어서 죽었을지도 몰라.” 눈물이 뚝 그쳤다. 엄마는 침묵에 잠겨가던 딸을 구해줄 의사가 없었다. 침묵 안에서 나를 끄집어내줄 이는 세상에 오직 한 사람, 나뿐이었다.
“처음엔 혼자 써보려고 했어요. 노트도 펜도 준비하고 책상 앞에 앉았는데, 써지지 않더라고요. 혼자 써봤자 똑같을 거 같았어요. 들어줄 사람이 없잖아요.” 그래서 택한 게 ‘함께 쓰기’였다. 한국성폭력상담소가 성폭력 피해자 치유·회복 프로그램의 하나로 여성주의 글쓰기 집단 상담 프로그램 운영을 앞두고 있었다. 2022년 이후 3년 만에 부활한 프로그램이다. 이른바 ‘그래서 글에 써’. 4월부터 6월까지 10주 동안 은유 작가와 성폭력 피해자들이 함께 책을 읽고, 글을 쓰고, 낭독하고, 이야기하는 프로그램이었다. 물은 “다른 사람과 함께 쓰고 이야기하면 누군가 한 사람은 내 얘기를 들어주겠지 싶었고, 글을 남기면 혹시 내가 죽더라도 ‘쟤는 한평생 왜 저렇게 우울해했을까’를 이해시키는 데 도움이 되리라 생각했다”고 했다.
매주 월요일 저녁 7시. 물 포함 일곱명의 성폭력 피해자와 은유 작가가 모여 앉았다. 매주 ‘참여자들의 약속문’을 함께 낭독한 뒤 글쓰기 모임이 시작됐다. “내가 말하고 싶은 만큼, 말할 수 있는 만큼만 말해도 괜찮아요.” 소리 내어 읽는 이 다짐이 공간의 팽팽한 공기를 누그러뜨렸다. 두부와 버섯이 들어간 된장찌개를 나누어 먹으면서 위장을 덥혔고, 서로의 문장들을 나누며 마음을 덥혔다.
마음이 예열되자 억압당한 문장들이 토해져 나왔다. “(피해 상황을) 머릿속에서 수없이 떠올렸지만, 글자로 옮긴 건 처음이었어요. 쓰고 보니 이 아이가 너무 안된 거예요. 가엽고요. 사실은 그동안 나를 책망했었거든요. 그때 하지 말라고 했다면 (오빠가) 멈췄을 텐데 왜 자는 척했을까. 그런데 글을 쓰고 보니 그때 상황이 객관화됐고 ‘얘가 이럴 수밖에 없었네!’ 싶더라고요. 부모님은 항상 바빴고, 오빠랑 단둘이 집에 남겨진 날들이 많았으며, 화장실이 집 밖에 있던 낡은 집에서 의지할 사람은 오빠뿐이었어요. (성폭력을 당했어도) 그 아이는 오빠가 필요했던 거예요.” 물은 퇴고를 거쳐 최종적으로 제출한 글(‘말하기 시작한 우리들’)에 이렇게 썼다. “서지현 검사는 티브이에서 ‘피해 사실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모든 것을 걸어야 하는 사회는 이제 종결되어야 합니다’라고 했다. 모든 것을 걸고 얘기해야 한다면 사실상 침묵을 강요하는 것이나 마찬가지 아닌가? 친족 성폭력을 경험한 아이가 걸어야 할 것은 세상 전부이다. ‘가정이 아이의 모든 세계’라고 하면 말이다. (…) 친족 성폭력은 가장 악질적인 폭력이며 인격 말살 폭력이다.”
“그리고가해자가동지라는이름으로이광장어딘가에있다” 띄어쓰기 하나 없이 숨 막히게 이어지는 문장들. ‘이제야’(필명)도 이 글쓰기 모임에 함께했던 참여자 중 한 사람이다. 12·3 내란 사태 이후 그는 남들과 좀 다른 이유로 줄곧 불면의 밤을 보냈다. “섹스와강간의명확히구분지어지지않는그경계사이에서일어난” 비동의강간 가해자를 “동지”라는 이름으로 “광장에서 무방비하게 맞닥뜨”렸기 때문이다. “광장에 그 사람이 있는 걸 발견했을 때 순간 반갑다는 착각을 할 정도로 놀랐어요. 그 뒤로 탄핵 광장은 제가 알던 광장이 아니었어요. 그와 헤어지고 수년이 흘렀지만, 묻어둔 기억이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떠올랐어요. (…) 마침 인스타그램에서 이 프로그램 홍보글을 봤어요.”
처음 침묵을 갈랐던 날을 문집에 이렇게 썼다. “새로 사고 아직 한번도 세탁하지 않아 방수 기능이 가장 탁월한 때일 지금, 새 바람막이에 눈물이 툭 떨어져 또르르 굴렀다. 이제 입이 트인다. 눈물을 동반해야만 비로소 창자 밖으로 꺼내어지는 이야기.”
이제야는 피해 이후 8년여 만에 이제야 글을 썼다. “성폭력인지 아닌지 정의 내리기가” 너무 오래 걸렸다. “확실하고 명백한 강간에 비해 그것은 좀 덜 강간이었고, 피해를 당했다기에는 나는 제법 멀쩡히 살아 있었다. (…) 그러나 해프닝이었다 하기에 나는 너무 오래 고통받았고 너무 오래 입 밖으로 꺼내지도 못했다.” 그가 말한 “덜 강간”이자 “해프닝”은 이런 행위들의 연속이었다. “포르노의 문법, 그러니까 폭행과 신체의 훼손, 여성의 거부와 거절 등의 비동의가 ‘야하고’ ‘꼴리는’ 것으로 읽히는 문법이 그대로 현실의 섹스에서 적용되었다.” 가해자는 동의 없는 촬영, 세이프 워드(safe word: 육체적·정신적 한계에 도달한 경우를 알리고자 하는 일종의 시그널) 설정 없는 결박 및 폭행, 콘돔 거부 등을 이어갔다. 상식의 경계는 진작에 넘었고 법의 경계에 아슬아슬하게 걸쳐 있던 행위들이었지만, 이제야는 가해자가 아니라 자신을 비난했다. “‘거절 의사를 아주아주 명확히 표현하지는 못했던 나에게 법적·정치적 승산이 조금도 없는 거 아닐까?’ ‘나에게도 책임이 있는 거 아닐까?’ ‘사실은 내가 그 섹스를 원했던 것이 아닐까?(근데 아니었다씨발@!!!!!!)’”(문집 발췌)
성폭력인가 아닌가, 피해자인가 아닌가. 그 사이에서 헤매느라 완전히 삶의 방향을 잃었다. 하지만, 기어코, 끝끝내 “자신을 비난하지 않는 길”(인터뷰)에 진입했다. 텍스트가 내비게이션이 되어주었다. “나는 공부를 ‘존나게’ 했다. 나의 성폭력의 경험은 단순히 그 사람과의 섹스-강간 사이 어드메 행위에서의 원치 않는 성기의 드나듦과 신체접촉과 폭행만이 다가 아니었구나. 내가 실은 이중 삼중의 모순과 통념과 ‘다움’에 내내 시달렸던 거구나.”(문집 발췌) 이제야는 이제 또 다른 가해자를 지목한다. “아직도 성녀·창녀의 이분법으로 나를 갈라 재단하고 낙인찍는 나의 가해자, 나.” 이제야는 “모임이 있는 날마다 3시간 일찍 출근해 글을 썼다”며 “이제야 나의 한 시기가 저물고 있는 게 분명하게 느껴진다”고 했다. “글을 쓰고 ‘나한테 성폭력이 지나갔지. 하지만 제법 잘 살아 있지. 이 경험만이 나를 구성하는 전부가 아닐 거야’라고 말할 수 있게 됐어요. 저처럼 피해자의 정형에 들어맞지 않는 피해자가 훨씬 많아요. 제 글이 비동의강간죄를 제정하는 재료가 된다면 큰 기쁨이겠습니다.”
푸른나비는 이미 책 두권에 공동 저자로 참여한 ‘기성 작가’다. 그래도 글을 쓰러 이곳에 왔다. 친족 성폭력의 심각성과 공소시효 폐지 필요성을 주장하는 글은 수없이 써봤다. 하지만 ‘대의’가 아닌 ‘나’를 위한 글을 써본 적은 없었다. “누구를 위할 타이밍이 아니었어요. 오직 나를 위해서 기억하고 써야 했어요.” 친족 성폭력 근절을 위한 공적 활동을 하고 회복을 위한 상담을 이어가던 시기 ‘그 기억’이 기습했다. “엄마가 나의 숨통을 끊으려 했던” 기억. 해리장애(감당하기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스스로 기억을 잃어버리는 증상)까지 불러왔던, 어쩌면 아빠의 가해보다 더 절망적인 기억. “여태 엄마 손에 (죽을 뻔했던) 그 아이가 동생들인 줄 알고 살아왔어요. 그런데 그게 아니라 저였던 거예요.” 그동안 아빠의 성폭력도, 엄마의 학대도 애매하게 처리하거나 아예 삭제하고 살아왔다. 머릿속에만 있을 땐 가능했다. 하지만 글을 쓸 때는 불가능했다. 푸른나비는 쓰고 나서야 자신이 진짜 어떤 일을 겪었는지 정확히 알게 됐다고 했다. “그동안 정액이라는 단어를 쓰지 못했어요.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거예요. 아빠의 가해가 이렇게까지 심각했다는 것을요. 너무 잔인하잖아요. (…) 그런 저를 물님이 응원해줬어요. 누구의 눈치도 보지 말고, 하고픈 말 다 쓰라고요. (참여자인) 밤가을님이 굉장히 사실적인 표현을 쓰신 걸 보고도 용기를 얻었어요.”
이들의 말처럼, 참여자들은 서로의 문장을 짚고, 올라타며 거대한 고통을 함께 직면했다. 이 과정의 안내자 역할을 한 은유 작가는 “뭐부터 어떻게 써야 할지 막막할 때 누군가 쓴 글을 보면 용기가 나고, 자극도 된다”며 “혼자 고독하게 쓴 글은 자칫 나의 불운, 비극, 수치의 기록으로만 머물 수 있지만 여럿이 함께 쓰면 나의 고통에 사회적 좌표가 생기면서 ‘사회적 상처’를 헤아릴 수 있게 된다. 그게 ‘함께 쓰기’의 힘”이라고 말했다. 성폭력 피해 치유와 회복에서 ‘쓰기’가 갖는 특별한 의미도 짚었다. 그는 “여러 관계와 맥락 안에서 발생하는 성폭력의 특성 탓에 많은 생존자분들이 ‘내가 피해자가 맞나?’ 헷갈리다 글을 쓰고 나서야 ‘맞구나’ 한다”며 “휘발성이 강해 모순을 알아채기 어려운 말과 달리, 찬찬히 들여다볼 수 있고 논리적 완결성이 요구되는 글을 쓸 때는 ‘내가 이토록 아픈데 왜 성폭력이 아니라고 생각하지?’라는 자기 안의 모순을 붙들고 고민하면서 사후적으로 진실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라고 했다.
이 프로그램 운영 실무자로 10주 동안 참여자들을 지켜본 앎 한국성폭력상담소 활동가는 “처음에는 피해 경험을 직면하는 게 힘들어 회피하는 글을 써오신 분들이 다른 참여자가 쓴 글을 보고 다음주에 조금 더 발전된 글을 써온다거나, 사람들이 나를 비난할까 봐 하지 못했던 말들을 쓰고 읽으며 ‘이거 너무 성폭력이잖아!’ 하며 체감하는 순간들을 함께했다”며 “‘아픔의 동료를 발견했던 시간’이라던 참여자의 말이 오래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말과 달리 글은 오래 남고 확산됩니다. 참여자들이 서로를 의지해 쓴 이 기록들을 읽고 더 많은 피해자가 아픔의 동료를 발견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문집은 한국성폭력상담소 누리집에서 내려받을 수 있다.
최윤아 기자 a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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