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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과 시선 끝에 탄생한 작품 … 부산, 미술의 바다에 빠지다

매일경제 김슬기 기자(sblake@m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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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과 시선 끝에 탄생한 작품 … 부산, 미술의 바다에 빠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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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규철 '외국어로 된 열두 개의 잠언'. 국제갤러리

안규철 '외국어로 된 열두 개의 잠언'. 국제갤러리


세계가 주목하는 '프리즈 위크'는 서울만의 축제가 아니다. 미술 도시로 거듭나고 있는 부산도 이 잔치에 풍성한 전시로 참여한다. 국내 대표 작가부터 세계적인 화제를 모으는 회고전까지 미술의 바다가 넘실대는 부산에서 만날 수 있다.

바닥에 놓인 돌도 미술이다

국제갤러리 부산에서는 오는 10월 19일까지 안규철의 개인전 '열두 개의 질문'이 열린다. 4년 전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에서 은퇴하고 전업 작가가 된 이후의 예술적 성취를 한자리에 모은 전시다.

안규철은 2021년 이후 세 권의 책을 쓴 미술 작가다. 이번 전시도 하나의 '질문'에서 모든 이야기가 시작된다. 개막일인 지난 22일 만난 작가는 "질문은 제가 미술을 하는 목표다. 누구에게는 미술이 표현이고 위로일 수 있겠지만, 저는 늘 질문일 수 있다고 생각해왔다"고 말했다.

알 수 없는 외국어로 쓰인 문장을 그림처럼 그려낸 '외국어로 된 열두 개의 잠언'은 작가의 엉뚱함과 기발함이 돋보이는 대표작이다. 12개의 칸에 검은색과 흰색의 사각형이 격자처럼 칠해진 캔버스에 첫 칸에는 '글은 어디서 시작하는가? 그림은 어디서 시작하는가?'라는 글이 적혔다. 일본 수묵화를 보고 롤랑 바르트가 쓴 문장이다. 옆 칸에는 파울 첼란, 페르난두 페소아 등 12명의 글이 적혔다. 포르투갈어, 프랑스어, 한문 등으로 적힌 글자는 읽을 수 없는 이에게는 그저 '그림'일 뿐이다.

안규철 '세 개의 수평선'. 국제갤러리

안규철 '세 개의 수평선'. 국제갤러리


기울어진 지평선을 담은 회화 '세 개의 수평선'은 재미있는 경험을 선사한다. 세 점의 바다 지평선 그림은 수평이 맞지 않게 걸려 있다. 가운데 그림은 유독 지평선이 비뚤게 그려졌는데 앞에 놓인 기울어진 발판에 올라서 보면 평행한 지평선을 만날 수 있다. 작가가 처음 그린 유화 작품이다.


'두 개의 돌'은 전시장 바닥에 놓인 돌과 상자 속에 든 돌만으로 관람객을 어리둥절하게 만든다.

이 작품은 어떤 것은 미술이 되고 어떤 것은 안 되는지 기준이 무엇이냐고 질문한다.

작가가 처음 시도한 애니메이션 '걷는 사람'(2024년), 안무가 피나 바우슈에게 오마주를 바치며 직접 퍼포먼스를 펼친 영상 '쓰러지는 의자-Homage to Pina'(2024) 등이 이번 전시에 포함된다. 1990년대에 제작된 퍼포먼스 사진 작품과 집을 주제로 만든 조각 연작까지 작가의 지난 30여 년을 돌아보는 작업도 다양하게 소개된다. 성실함과 호기심만으로도 마음을 움직이는 미술을 창작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아주 보통의 예술가'의 성취를 목격할 수 있다.


이광호 'Untitled 9662'. 조현화랑

이광호 'Untitled 9662'. 조현화랑


'선인장 화가' 20년 만에 그린 초상화

바다의 전경이 근사한 해운대 달맞이 고개의 조현화랑에서는 8월 29일부터 10월 26일까지 이광호(58)의 개인전 '시선의 흔적'을 선보인다. '선인장 작가'로 알려진 이광호가 20여 년 만에 다시 선보이는 초상화 8점을 만날 수 있는 보기 드문 전시다.

이 밖에도 2023년부터 이어온 추상과 구상의 경계를 넘나드는 신작 'Blow-up' 프로젝트 76점을 포함해 총 90여 점을 공개한다.


이광호의 30년 예술을 관통하는 화두는 '시선'이다. 작가는 2006년 창동스튜디오 레지던시에서 발표한 'Inter-View' 프로젝트 이후 처음으로 초상화 작업에 복귀했다.

초상화를 그리면서 작가는 핀홀 렌즈라는 원시적 광학 장치를 통해 포착된 흐릿하고 불완전한 이미지를 캔버스에 그리는 방식을 사용했다. 낮은 해상도와 미세한 흐림, 깊은 심도를 특징으로 하는 핀홀 렌즈는 긴 노출 시간을 필요로 하기에, 더 길고 느린 시간의 흐름을 담아낼 수 있다. 완벽한 재현을 거부하며 붓질을 쌓아올린 초상화는 '회화의 장인'의 손을 거쳐 인물의 내면을 들여다본 것처럼 독특한 경험을 선사한다.

스웨덴에서 온 추상미술의 신화

부산 을숙도에 자리 잡은 부산현대미술관에는 한국에 상륙한 힐마 아프 클린트(1862~1944)를 만나려는 순례의 길이 이어지고 있다. 7월 19일 개막해 10월 26일까지 열리는 '힐마 아프 클린트: 적절한 소환'은 1세기를 기다려 만나게 된 스웨덴 여성 화가의 극적인 예술을 소개한다.

힐마는 자신의 작품이 미래에 더 잘 이해될 거라고 생각해 생전에는 거의 공개하지 않았고 "사후에도 20년간 전시를 하지 말아달라"고 유언을 남겼다. 추상화 거장 바실리 칸딘스키보다도 5년 앞선 1911년부터 추상화를 그렸던 그의 봉인된 작품은 1300여 점에 달한다. 회화를 중심으로 드로잉, 기록 등 140여 점의 작품을 소개한다. 스웨덴 왕립미술학교에서 여성으로는 드물게 정식 미술 교육을 받았던 작가는 초기에 식물과 자연을 관찰하며 그림을 그렸다. 신지학(神智學)에 심취했던 그는 보이지 않는 세계를 탐색하며 점차 원과 나선 같은 상징으로 가득한 추상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당대에는 혹평을 받고 사후에도 잊혔던 화가는 21세기 들어서야 주목받고 있다. 2018년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열린 회고전이 60만명 넘는 관객을 동원하면서 세계적인 열풍을 일으킨 것이다. 이번 전시에는 10점의 대형 회화 연작이 화제를 모으고 있다. 파노라마처럼 걸린 대작을 통해 신비로운 색채와 상징이 가득한 그의 예술세계를 한눈에 조감할 수 있다.

[부산 김슬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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