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영화 리메이크 ‘부고니아’ 주연 활약
외계인 음모론자에 납치되는 기업 CEO 연기
“누구든 믿음 부여잡기 마련… 음모론 익숙”
베니스국제영화제 경쟁 부문 초청돼 눈길
에마 스톤의 머리는 짧았다. 예전에는 볼 수 없었던 모습이었다. 그의 커다란 눈은 더욱 두드러져 보였다. 할리우드 영화 ‘부고니아’ 촬영이 남긴 훈장 같은 흔적이었다. 스톤은 제82회 베니스국제영화제 경쟁 부문에 초청된 이 영화의 주인공 미셸을 연기했다. 27일 낮 이탈리아 베니스 한 호텔에서 그를 만났다.
‘부고니아’는 장준환 감독의 한국 영화 ‘지구를 지켜라’(2003)를 밑그림으로 삼고 있다. 외계인 침공 음모론에 빠진 남자 테디(제시 플레먼스)가 사촌과 함께 유명 바이오 회사 최고경영자 미셸을 납치하면서 벌어지는 일을 그린다. 테디는 미셸이 외계인으로서 개기월식 때 지구를 절멸시키려 한다고 믿고 이를 막기 위해 미셸을 압박한다. 테디와 미셸의 대치 속에서 인류의 잔혹성과 이기심이 드러난다.
‘부고니아’의 이야기 얼개는 ‘지구를 지켜라’를 따르면서도 촬영과 이야기 전개 방식에서 자신만의 색깔을 보여준다. ‘지구를 지켜라’의 유제화학회사 사장인 중년 남성 강만식(백윤식)을 젊은 여성으로 바꾼 점이 눈에 띈다. 음모론을 맹신해 납치극을 벌이는 병구(신하균)의 조력자가 여성 순이(황정민)였다면 테디를 돕는 이는 남성 돈(에이던 델비스)이다. ‘지구를 지켜라’가 우스꽝스러운 정서가 가득한 영화라면 ‘부고니아’는 블랙 유머가 화면을 채운다. 때밀이수건으로 발뒤꿈치를 문지른 후 파스를 바르는 식의 소름 끼치면서도 웃기는 장면은 없다. 대신 서늘한 기운과 팽팽한 긴장감이 117분 동안 스크린을 지배한다.
외계인 음모론자에 납치되는 기업 CEO 연기
“누구든 믿음 부여잡기 마련… 음모론 익숙”
베니스국제영화제 경쟁 부문 초청돼 눈길
에마 스톤은 영화 '부고니아'에서 바이오 회사 최고경영자 미셸을 연기했다. 의상과 말투에서 차가움이 느껴지는 인물이다. 포커스 피처스/프레먼틀, CJ ENM 제공 |
에마 스톤의 머리는 짧았다. 예전에는 볼 수 없었던 모습이었다. 그의 커다란 눈은 더욱 두드러져 보였다. 할리우드 영화 ‘부고니아’ 촬영이 남긴 훈장 같은 흔적이었다. 스톤은 제82회 베니스국제영화제 경쟁 부문에 초청된 이 영화의 주인공 미셸을 연기했다. 27일 낮 이탈리아 베니스 한 호텔에서 그를 만났다.
‘부고니아’는 장준환 감독의 한국 영화 ‘지구를 지켜라’(2003)를 밑그림으로 삼고 있다. 외계인 침공 음모론에 빠진 남자 테디(제시 플레먼스)가 사촌과 함께 유명 바이오 회사 최고경영자 미셸을 납치하면서 벌어지는 일을 그린다. 테디는 미셸이 외계인으로서 개기월식 때 지구를 절멸시키려 한다고 믿고 이를 막기 위해 미셸을 압박한다. 테디와 미셸의 대치 속에서 인류의 잔혹성과 이기심이 드러난다.
'지구를 지켜라'보다 서늘한 영화
'부고니아'의 테디는 외계인 침공 음모론을 믿는 인물이다. 그는 외계인이라 확신하는 여성 미셸을 납치해 인류 멸망을 막으려 한다. 포커스 피쳐스/프레먼틀, CJ ENM 제공 |
‘부고니아’의 이야기 얼개는 ‘지구를 지켜라’를 따르면서도 촬영과 이야기 전개 방식에서 자신만의 색깔을 보여준다. ‘지구를 지켜라’의 유제화학회사 사장인 중년 남성 강만식(백윤식)을 젊은 여성으로 바꾼 점이 눈에 띈다. 음모론을 맹신해 납치극을 벌이는 병구(신하균)의 조력자가 여성 순이(황정민)였다면 테디를 돕는 이는 남성 돈(에이던 델비스)이다. ‘지구를 지켜라’가 우스꽝스러운 정서가 가득한 영화라면 ‘부고니아’는 블랙 유머가 화면을 채운다. 때밀이수건으로 발뒤꿈치를 문지른 후 파스를 바르는 식의 소름 끼치면서도 웃기는 장면은 없다. 대신 서늘한 기운과 팽팽한 긴장감이 117분 동안 스크린을 지배한다.
'지구를 지켜라'에서 외계인 음모론에 빠진 병구는 옷차림새부터가 우스꽝스럽다. CJ ENM 제공 |
스톤이 연기한 미셸은 가해자와 피해자의 경계선에 서있다. 그는 테디 일행에게 납치돼 고문을 당하지만 알고 보면 냉혈한 ‘인물’이다. 스톤은 “(가해자와 피해자의) 모호함이 정말 매력적이다”라고 했다. 그는 “여성인 미셸이 두 남자에게 납치돼 지하실에서 묶이는 순간 자체로 영화는 강렬해진다”며 “선한 누군가가 옳은 일은 하는 건지, 미친 자가 미친 짓을 하는 건지, 영화 내내 판단하기 어려워지며 긴장감이 형성된다”고도 말했다.
"한번 뭔가를 보면 '토끼굴' 빠져드는 시대"
영화 '부고니아'. 포커스 피쳐스/프레먼틀, CJ ENM 제공 |
‘부고니아’는 가짜뉴스가 횡행하고 음모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대한 우화처럼 여겨진다. 스톤은 “인류 탄생 이래 우리 모두는 누군가 믿을 수 있는 이야기를 들려주면 그 믿음을 부여잡게 된다”고 말했다. 그는 “한번 뭔가를 (인터넷에서) 보면 같은 것을 (콘텐츠 플랫폼이) 계속 제공해서 ‘토끼굴’로 빠져들게 만드는 게 너무 쉬워졌다”며 “정말 무섭지만 사실 저에게는 새로운 현상이 아닌 것 같다”고 덧붙였다.
‘부고니아’는 그리스 감독 요르고스 란티모스가 메가폰을 잡았다. ‘더 랍스터’(2015)와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2018), ‘가여운 것들’(2023) 등을 통해 세계 영화계 갈채를 받은 이다. ‘지구를 지켜라’의 열렬한 팬인 미국 감독 아리 에스터(‘유전’ ‘미드소마’ 등)가 5년 전부터 장 감독 연출로 할리우드판 제작을 국내 투자배급사 CJ ENM과 함께 추진했으나 2년 전 메가폰이 란티모스 감독에게 넘어갔다.
'지구를 지켜라'에서 외계인으로 여겨지는 인물은 중년 남성 강만식이다. '부고니아'의 미셸 역시 강만식처럼 강제 삭발을 당한다. CJ ENM 제공 |
스톤은 “아리에스터 감독이 시나리오를 의뢰한 (드라마 ‘석세션’ 작가) 윌 트레이시가 (회사 경영자를) 남성에서 여성으로 바꿨다”며 “제가 역할을 맡게 된 건 운이 좋았을 뿐”이라고 말했다. 스톤은 ‘가여운 것들’로 란티모스 감독과 첫 호흡을 맞춘 후 “앞으로 적어도 영화 3편을 그와 함께 할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스톤은 ‘가여운 것들’ 연기로 지난해 미국 아카데미상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라라랜드’(2016)에 이어 두 번째 수상이었다. 그는 란티모스 감독의 ‘카인즈 오브 카인드니스’(2024)에도 출연했다.
베니스= 라제기 영화전문기자 wenders@hankookilbo.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