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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읽기]공익제보, 손가락이 아니라 달을 보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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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읽기]공익제보, 손가락이 아니라 달을 보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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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을 잘 못해서 잘린 것이다.” 여성가족부 장관 후보자였던 강선우 더불어민주당 의원의 ‘갑질’ 의혹을 제기한 전 보좌진에 대해 유시민 작가가 한 말이다. 단순한 개인 의견이라 해도, 진보 진영에서 영향력을 가진 인사의 발언이라는 점에서 무겁다.

무엇보다 이는 공익제보자를 공격할 때 흔히 쓰이는 전형적 프레임과 겹친다. 내부제보자는 ‘조직 부적응자’ ‘업무 태만자’ ‘인사 불만자’로 몰리고, “신고 내용 자체가 허위”라는 반격에 직면한다. 결국 신고자는 사회적으로 고립된다. 공익제보가 나오면 언제나 ‘그 사람이 문제였다’는 식의 말이 따라붙지만, 그것은 본질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개인의 흠결이나 능력이 아니라, 제보가 드러내는 내용이 사회적으로 필요한 진실인가에 있다. 달을 가리키면 달을 봐야지, 손가락에 매달려서는 안 된다.

이번 보좌관 갑질 의혹 제보자도 신원이 이미 드러났을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면 정치권에 다시 자리 잡기란 어렵다. 실익은 거의 없고, 오히려 경력단절과 고립만 남는다. 그럼에도 신고를 감행했다는 사실은 공익신고가 지닌 윤리적 무게를 잘 보여준다. 개인의 이해득실을 넘어선 선택이며, 사회가 결코 가볍게 다루어선 안 될 문제다.

우리 사회는 오래도록 제보자를 배신자로 낙인찍어왔다. 드라마 <미생>에서 문제를 제기한 부서가 “너희는 얼마나 깨끗하기에 고발하느냐”는 비난을 받는 장면, 영화 <도가니>에서 특수학교 성폭력을 알린 이들이 지역사회의 압박과 고립에 시달리는 장면은 이를 잘 보여준다. 제보는 곧바로 낙인으로 이어지며, 공익신고가 얼마나 위험하면서도 피할 수 없는 선택인지 드러낸다.

물론 공익제보자가 사회적 신뢰를 얻으려면 원칙이 분명해야 한다. 상급자 지시나 조직 압력에 의해 부득이하게 가담했더라도 “나는 어쩔 수 없었다”는 변명보다는 사과와 반성, 처벌 수용의 태도가 필요하다. 그래야만 사회적 지지가 따른다. 드라마 <낭만닥터 김사부 2>에서 선배의 불법 의료행위를 고발한 후배 의사가 따돌림을 당하면서도 “내가 특별히 잘한 것도, 잘못한 것도 없다”고 말하듯, 스스로를 영웅시하지 않고 피해의식에 빠지지 않는 균형 잡힌 태도가 바람직하다.

그러나 제보자의 태도만큼 중요한 것은 사회와 정치의 책임이다. 여야를 막론하고 신고자의 배경을 공격하는 방식은 잠재적 내부고발자들을 위축시킨다. “내가 고발하면 저렇게 당하겠구나”라는 두려움은 깊은 침묵을 낳는다. 개인의 좌절일 뿐 아니라 사회 전체의 손실이다. 정치와 언론이 제보를 정파적 논리로 소모하는 순간 피해자는 결국 공동체다.


역사적으로도 공익제보 보호의 필요성은 확인됐다. 조선 태종 시대 사헌부의 정연은 고문까지 당했지만 제보자의 신원을 끝내 지켰고, 태종은 그 기개를 인정했다. 절대 권력조차 그 가치를 수긍한 것이다. 오늘날의 민주사회는 더 높은 기준과 제도를 갖추어야 한다. 공익제보자를 지켜내지 못한다면 더 많은 불의와 부조리가 묻힐 것이다. 2017년 대선 당시 이재명 후보가 약속했던 ‘공익신고 핫라인 설치, 사회 복귀 지원, 독립적 보호법 제정, 신고 범위 확대’는 여전히 실현해야 할 과제다. 이제는 더 미룰 수 없다. 대통령이 된 이상, 5대 국정목표 아래 제시된 ‘국민권익을 실현하는 반부패 개혁’을 통해 적극 추진해야 한다.

공익제보는 상식과 원칙의 문제다. 중요한 것은 신고자가 ‘완벽한 사람’인지가 아니라, 그 신고가 공익에 부합하고 진실한가다. 시인 김수영은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는 풀”을 노래했다. 짓눌려도 먼저 고개를 드는 풀처럼, 공익제보는 민주주의를 지탱하는 가장 낮고도 강한 용기다. 그것이 배신이 아니라 공동체를 지키는 힘으로 받아들여질 때, 우리 민주주의는 한층 더 단단해질 것이다.

이지문 내부제보실천운동 상임고문

이지문 내부제보실천운동 상임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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