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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은 너를 보호하지 못한다”…분노에 목소리 찾아준 스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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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은 너를 보호하지 못한다”…분노에 목소리 찾아준 스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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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미국 뉴욕 헌터칼리지에 설립된 ‘오드리 로드 여성 시 센터’ 개원식에 참석한 오드리 로드. 필자 제공

1985년 미국 뉴욕 헌터칼리지에 설립된 ‘오드리 로드 여성 시 센터’ 개원식에 참석한 오드리 로드. 필자 제공


내가 페미니스트 시인으로 유명한 오드리 로드(1934~1992)를 처음 만난 것은 1984년 10월 미국 뉴욕 헌터칼리지의 여성학 수업에서였다. 당시 나는 ‘여성과 정치 변화’(Women and Political Change)라는 나의 첫 여성학 수업을 듣고 있었다. 중간고사 기간이었던 그날은 마침 내가 ‘아시아 여성’에 대한 리포트 발표를 하기로 되어 있던 날이었다.



미국 학생들 앞에서 영어로 첫 발표를 하게된 나는 거의 초주검이 돼 있었다. 자다가도 벌떡벌떡 일어나고 생각만 해도 손에 진땀이 나는 공포에 시달리며 시라고는 써 본 적이 없던 내가 ‘황인종 여성이 쓴 시’(Poem by a Yellow Woman)라는 제목의 시를 썼다. 아시아 여성으로서 한국 이민 여성의 얘기를 하는 게 좋을 것 같다는 판단에서였다. 중간고사 리포트를 대신해 발표했던 내 시는 그날 의아할 정도로 열렬한 환호를 받았다.



오드리 로드는 내 리포트 발표가 끝난 뒤 코멘트하면서 초면인 나에게 자기 시 수업을 들으라고 권했다. 나는 그때까지 오드리 로드가 누구인지, 그 시간에 거기 와 있었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여성과 정치 변화’ 수업의 담당 교수는 라디오 방송과 함께 수업을 진행하면서 뉴욕의 다양한 페미니스트들을 강의에 초빙했는데, 그날은 마침 헌터칼리지 교수였던 오드리 로드가 초대되었던 것이다.



나는 오드리 로드가 권유한 대로 다음 학기인 1985년 봄 학기에 그의 시 워크숍 수업을 들었다. 오드리 로드가 가르치는 그 강좌는 헌터칼리지에서도 매우 인기 있는 수업이었고 경쟁도 치열했다. 흑인, 백인,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많은 학생이 몰렸고, 오드리 로드는 학생들에게 여신처럼 추앙받았다.



오드리 로드는 수업 첫 시간에 브라질 교육학자 파울루 프레이리의 ‘페다고지’(Pedagogy of the Oppressed)를 교재로 소개하면서, 그 책을 그냥 읽을 게 아니라 ‘씹어 먹으라’고 말했다. 책을 ‘씹어 먹는다’는 것은 과연 어떤 의미일까? 그것이 시인이었던 그의 표현법이고 교수법이었던 것 같다. 일을 하면서 공부를 병행했던 나는 절대적인 시간 부족으로 프레이리의 책을 씹어 먹을 만큼 읽지는 못했다. 그렇지만 매번 주제를 주고 시를 써 오게 했던 오드리 로드의 숙제를 안 해갈 수는 없었다.



예를 들면 지금도 잊지 못하는 수업이 있는데 오드리 로드가 분노를 다루는 시를 써 오라고 했던 때였다. 그때 오드리 로드는 ‘낫 어바웃 앵거 벗 아웃 오브 앵거’(not about anger but out of anger)라고 주문했는데, 이는 분노에 관해서 또는 대해서가 아니라 직접적 분노의 경험에서 나온 시를 써 오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당시 미국 내 중국인들이 불매 운동을 벌이고 있던 마이클 치미노 감독의 영화 ‘용의 해’(year of the dragon)를 보고 영시를 써 갔다. ‘용의 해’는 1985년작 범죄스릴러 영화로 주인공인 뉴욕시 백인 경찰이 차이나타운 마약조직 소탕에 나서는 내용을 다뤘는데, 인종차별적 요소가 있는데다 중국 화교사회를 부정적으로 그려 논란을 불렀다.





용의 해





용의 해/ 그것이 그 영화의 제목이다/ 숨겨진/ 아메리카의 진짜 얼굴/ 진정한 메시지.



그래 나도 안다/ 우리는 친구가 아니다/ 너는 우리를 조롱한다.



너는 우리 황인종에게 침을 뱉는다/ 나는 내 얼굴에서 너의 자랑스러운 침을 맛본다/ 너의 그 하얀 피부가 그렇게 소중하더냐?



×× 놈의 치미노/ ×× 놈의 아메리카 (중략) 누구도 다시는/ 강간하지 못하게 만들고 싶다.



너의 망각증, 네 자신의 폭력성, 네 자신의 살인/ 너의 자민족 중심적 어리석음에 축복을/ 아메리카에 축복을



무력한 눈물, 무력한 분노가/ 내 뺨 위로 흘러내린다/ 나는 혹독하게/ 내 눈물을 닦는다/ 힘없는 자의/ 유일한 잔혹함으로





내가 이 시를 발표하자 교실에서는 문자 그대로 난리가 났다. 몇 안 되는 남학생들이 집단적으로 흥분해서 발언하기 시작했고 그 와중에 한 백인 남학생은 진짜 자기 팔뚝을 꼬집으며 “그래 내 하얀 피부가 그렇게도 소중하다”고 나에게 들이대며 수업은 난장판이 되었다. 예상치 못한 상황 전개에 나는 할 말을 잃은 채 침묵을 지킬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나는 뜻밖의 상황에 겁이 나서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 중구난방으로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학생들의 발언을 지켜보던 오드리 로드는 좌중을 조용하도록 만들더니 “아메리카 이즈 레이핑 더 홀 월드”(Ameica is raping the whole world·미국은 전세계를 강간하고 있다)라고 말하며 좌중을 평정시켰다. 학생들은 로드 교수의 한마디에 일순간에 잠잠해졌다.



그리고 그는 제3세계 여성들과 그 외 소수자들은 안전한 환경이 필요하다면서, 다음 학기에 교수가 지정한 학생들만 들어올 수 있는 컬러퀴엄 시 수업을 약속했다. 정말로 1985년 가을 학기엔 학생 수를 10명 정도로 한정한 후속 시 워크숍을 열어주었다. 그 수업에는 나는 물론 그의 딸도 참여했고, 우리는 오드리 로드의 시 수업을 계속 들을 수 있게 되었다.



미국 뉴욕 헌터칼리지에 1985년 만들어진 ‘오드리 로드 여성 시 센터’ 개원식 찍은 기념 사진. 왼쪽에서 두번째가 오드리 로드이고 세번째가 필자. 필자 제공

미국 뉴욕 헌터칼리지에 1985년 만들어진 ‘오드리 로드 여성 시 센터’ 개원식 찍은 기념 사진. 왼쪽에서 두번째가 오드리 로드이고 세번째가 필자. 필자 제공


오드리 로드는 그해 12월 그의 이름을 딴 ‘오드리 로드 여성 시 센터’가 헌터칼리지에 생기고 개원식이 열리자, 다른 제자들과 아울러 나에게 시를 낭송하도록 했다. 당시 무대 공포증과 영어 공포증까지 겹쳐 뒷걸음치려는 나에게 그가 단호한 목소리로 말한 “삶은 테러(공포)와 직면하는 것”이라는 한마디는 4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지금에도 귓가에 쟁쟁하다. 그는 “침묵은 너를 보호하지 못한다”면서, 나에게 “들려줘야 할 목소리를 갖고 있다”고 말했다. 나는 그날 ‘자본주의의 냄새’(The Smell of Capitalism)를 비롯해 시 두세편을 낭송했다. 침묵을 죽음과 동일시했던 오드리 로드는 그렇게 나에게 목소리를 찾아준 내 영혼의 엄마 같은 사람이었다.





자본주의의 냄새





오늘 아침/ 나는 지하철에서 한 노숙자를 만났어/ 다른 칸들은 모두 혼잡했는데/ 그의 칸만 비어 있었지/ 난 그곳으로 들어갔어.



“우…우! 이 끔찍한 냄새는 뭐야?/ 거기 그가 있었어/ 무지한 얼굴에 맨발로/ 누더기 옷을 걸치고



소외의 현현/ 그가 잠자고 있었어.



신이여, 당신인가?/ 그를 만든 이가?/ 사람들은 그를 잊기 위해 그 칸을 떠났어/ 그들은 그 냄새를 참을 수가 없었지/ 그건 그토록 지독했어/ 나는 그것을 자본주의의 냄새라 이름 붙였어



한줌도 안되는 소수의 사람들에게/ 그건 우아하고 화려하며 섹시하지/ 마치 존 매켄로와 테이텀 오닐이/ 맨해튼에 있는 그들의 화려한 펜트하우스에서/ 마시는 와인의 향처럼



대부분의 다른 사람들에게/ 그건 먹거리 장바구니처럼/ 혼란스럽고, 피곤하고, 지루하지.



나머지 사람들에게/ 그것은 노숙자의 냄새야/ 만약 당신이 뉴욕시에서 산다면/ 내 말의 의미를 알거야.



백악관에서 살고 있는 사람과/ 지하철에서 살고 있는 사람의/ 인간성의 차이란 무엇인가?



오늘 아침/ 나는 지하철에서 한 노숙자를 만났어/ 내 코에 매달려 있는 그 냄새로/ 나는 하루종일/ 속이 메슥거려.



나는 그를 위하여 울지 않아/ 나는 그에게 적선을 하지도 않아/ 난 그저 그 빌어먹을 냄새를 비난할 뿐이야.








유숙열 | 나이 서른을 넘긴 1980년대 중반부터 극렬 페미니스트로 살고 있다. 합동통신 기자로 재직 중 1980년 해직된 뒤 1982년 결혼해 미국 뉴욕으로 떠났다. 1984~1990년 미주조선일보에서 기자로 일하며 뉴욕시립대 대학원에서 여성학 석사학위 취득. 1991~2004년 문화일보 국제부 차장, 생활건강부장, 여성전문위원. 1997년 ‘페미니스트저널 이프’(if)를 창간했다. 2003~2006년 2기 방송위원회 위원. 현 이프북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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