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들이 학교 주변의 아파트와 상가 등의 엘리베이터에 부착된 점자가 올바르게 표기되었는지 점검하고 있다. 박재준 교사 제공 |
교육의 힘은 약(弱)하다. 교사가 아무리 선한 의도를 갖고 교육활동을 해도 학생이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학습자 고유의 자율적인 영역이다.(Biesta, 2013) 특히 변혁적 역량을 강조하는 세계시민교육의 실천을 위해서는 교사 중심의 수업에서 벗어나 학생이 주체적으로 사고하고 능동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공간을 형성했을 때, 비로소 세계시민으로서의 주체화의 가능성이 열린다. 실제로 필자는 학생들과 ‘유니버설 디자인’을 주제로 수업을 하면서, 학생들이 교사의 의도를 넘어 예상치 못한 탐구와 통찰을 함으로써 스스로 세계시민의식을 형성해가는 과정을 확인할 수 있었다.
‘유니버설 디자인’ 수업에서 우리가 진행한 것은 건물, 복도, 계단, 화장실, 엘리베이터, 운동장 등 학교 안에서 쉽게 지나칠수 있는 모두를 위한 디자인의 사례와 기능을 살펴보는 것이었다. 이후 학생들은 “우리 학교에는 어떤 시설물이 누구를 위해 디자인 됐을까? 또 어떤 디자인이 더 필요할까?”라는 질문을 갖고 학교 이곳저곳을 탐구했다.
학생들은 ‘유니버설 디자인’ 수업을 통해 마을 골목길에 새로 생긴 방지턱 때문에 기존에 있던 점자블록이 제거된 사실을 발견했다. 박재준 교사 제공 |
그때 몇몇 학생들이 “우리 마을도 살펴보자”고 제안했다. 이에 ‘유니버설 디자인으로 본 우리 마을’이라는 주제로 뉴스 만들기 수업을 진행했다. 예지네 모둠은 마을 골목길에 새로 생긴 방지턱 때문에 기존에 있던 점자블록이 제거된 사실을 발견했다. “누군가의 안전을 위해 설치된 시설이 다른 누군가의 안전을 빼앗았다”는 예지의 발표는 우리 모두에게 다른 방향으로 생각을 확장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즉, ‘무엇을 더했는가’에서 ‘무엇이 제거됐는가’라는 관점의 전환은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또 다른 접근을 가능하게 했고 우리 공동체는 새로운 ‘사건’에 도전했다.
예지의 ‘문제 제기’를 계기로 우리 반은 ‘(숫자)점자’에 대한 공부를 시작했다. 학교 주변에서 숫자 점자가 사용된 사례를 살펴보던 중 한 학생이 엘리베이터 숫자 버튼을 생각해냈다. 이에 학생들은 스스로 구역을 정해 우리 학교 주변의 아파트와 상가 등의 엘리베이터에 부착된 점자가 올바르게 표기되었는지 점검했다.
학생들이 학교 주변의 아파트와 상가 등의 엘리베이터에 부착된 점자가 올바르게 표기되었는지 점검하고 있다. 박재준 교사 제공 |
그 결과 학생들은 두 곳의 건물 엘리베이터에 점자가 잘못 표기되었을 뿐 아니라, 한 곳에는 아예 점자가 기록되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했다. 학생들은 편지를 작성해 관리사무소에 교체를 요구했고, 한 곳은 허락을 받아 직접 점자 스티커를 붙여 수정했다.
이 수업에서 교사인 나는 ‘지식 전달자’의 역할을 내려놓았다. 그러자 학생의 생각과 목소리가 교실에 가득했고, 학생들의 입체적인 탐구와 성찰이 수업을 비선형적(직선적인 방식이 아닌, 다양한 방향으로 접근하는 방법)이며 풍성한 내용으로 가득 채웠다.
교사와 학생의 관계 변화로 시작된 수업은 학생의 경험이 주체적인 세계시민으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형성하고 주변의 사물과 사건에서 새로운 의미를 창출해가는 유의미한 교육의 가능성을 제시해주었다. ‘우리들이 세상을 바꿨어요.’ ‘시각장애인의 관점에서 세상을 볼 수 있었어요’라고 학생들은 수업 소감을 이야기했다. 학생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수업이, 세계시민으로서의 감수성을 한뼘 더 자라게 했을 뿐만 아니라 세계시민으로 성장하게 만드는 밑거름을 제공했다는 사실을 학생들의 모습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박재준 서울 묵동초 교사·세계시민교육연구소 운영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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