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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답하라, WK리그 … 자생적 ‘슈퍼팬’의 열정이 식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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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답하라, WK리그 … 자생적 ‘슈퍼팬’의 열정이 식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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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날 축구가 인생으로 날아든 김나은 우만컴퍼니 대표 등 팬들이 말하는 WK리그의 나아갈 점

2025년 8월2일 오후 7시 경남 창녕스포츠파크 4구장에서 열린 제24회 전국여자축구선수권대회 화천KSPO와 문경상무의 예선 2차전에서 김나은씨가 경기를 관람하고 있다. 창녕(경남)=김진수 선임기자 jsk@hani.co.kr

2025년 8월2일 오후 7시 경남 창녕스포츠파크 4구장에서 열린 제24회 전국여자축구선수권대회 화천KSPO와 문경상무의 예선 2차전에서 김나은씨가 경기를 관람하고 있다. 창녕(경남)=김진수 선임기자 jsk@hani.co.kr


2025년 8월2일 경남 창녕스포츠파크 4구장 앞. 기자와 함께 걷던 김나은(32)씨가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모기기피제다. “이거 없으세요? 여름에 경기 볼 때 필수인데.” 나은씨가 몸에 기피제를 뿌리더니 기자도 뿌리라며 내밀었다. 나은씨는 ‘여축’(여자축구) 팬이다. 더블유케이(WK)리그 경기를 두루 챙겨 보지만, 2025년 시즌엔 화천KSPO팀에 특히 꽂혔다. 이날 4구장에선 저녁 7시부터 화천KSPO와 문경상무의 전국여자축구선수권대회 예선 2차전이 열렸다.





독일 경기를 보고 떠난 WK리그 여정



경기장에 들어가자마자 나은씨가 대형 카메라를 들고 있는 한 남성에게 아는 척을 했다. “어, 장슬기 선수 팬이다. 야! 모른 척 지나가네. 쟤 봐라?”



나은씨가 인사를 건넨 사람도 ‘여축’ 팬이다. 어떤 경기장을 가든 최소 1명씩은 안면을 튼 팬들이 있다. 이날 경기장엔 나은씨가 인사하고 지내는 지인 팬 3명을 포함해 100여 명이 모였다. 주말 저녁 경기임을 감안해도 많이 모인 편이라고 나은씨는 말했다. “저희끼리는 ‘한줌단’이라고 표현하거든요. 가끔 팬보다 선수가 많을 때도 있어서, 몇 번 다니다보면 안면을 터요.”



나은씨는 원래 남자축구를 즐겨 보는 편이었다. 엘클라시코(스페인 프리메라리가 레알 마드리드와 FC바르셀로나의 경기)를 찾아보기도 하고, 국내 케이(K)리그를 보러 다니기도 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남자축구가 자신을 위한 스포츠가 아니라고 느껴져 자연스레 축구와 멀어졌다. 다시 축구가 인생으로 들어온 건 2023년 8월3일, 국제축구연맹(FIFA) 2023 오스트레일리아·뉴질랜드 여자월드컵에서 한국과 독일의 예선 3차전 경기를 보면서다. “그때가 집들이 날이었어요. 음식을 차려놓고 티브이(TV)를 켰는데, 딱 독일전을 하더라고요. 그냥 ‘볼래?’ 해서 봤는데, 너무 재밌더라고요. 그날 경기를 보고 반해서 바로 가장 빠른 WK리그 경기를 보러 갔어요.”



전북 군산에 사는 나은씨는 그날 이후 전국을 돌아다녔다. 경기장으로 가는 길에 얻어 탄 그의 차 계기판엔 13만㎞가 찍혀 있었다. 구매한 지 채 4년도 되지 않은 차라고 했다. “(팀별 홈구장의) 매력이 다 달라요. 화천은 들어가는 길에 38선을 지나는 게 독특한 경험이거든요. 갈 때마다 38선 표지판을 항상 찍어요. 경주는 경기장이랑 관람석이 정말 가까워요. 선수들이 뛰면서 하는 이야기가 다 들릴 정도로.”



WK리그 경기 직관이 네 번째라는 최예슬(23·왼쪽)씨가 2025년 7월21일 저녁 서울 마포구 상암동 서울월드컵경기장 보조경기장에서 열린 서울시청 아마조네스(검은색 유니폼)와 인천현대제철 레드엔젤스WFC의 경기를 사진에 담고 있다. 이종근 선임기자 root2@hani.co.kr

WK리그 경기 직관이 네 번째라는 최예슬(23·왼쪽)씨가 2025년 7월21일 저녁 서울 마포구 상암동 서울월드컵경기장 보조경기장에서 열린 서울시청 아마조네스(검은색 유니폼)와 인천현대제철 레드엔젤스WFC의 경기를 사진에 담고 있다. 이종근 선임기자 root2@hani.co.kr


어느 날 경기장 출구에 몇 안 되는 팬들이 모여 있기에, 함께 간 친구와 함께 무리에 합류하기도 했다. 여자축구 선수들이 경기나 훈련, 공식 일정을 마친 뒤 귀가하면서 팬들과 소통하는 모습을 가리키는 ‘퇴근길’ 문화였다.





전쟁 같은 축구의 아름다움



나은씨가 여자축구에 빠져든 과정은 특별한 사례가 아니다. 2025년 체육학회지에 실린 ‘팬들의 시각에서 본 WK리그의 미래 발전 방향’(김소현)을 보면 작은 규모의 경기장이나 ‘퇴근길’ 문화가 “선수들과의 거리감을 좁히고 선수들에게 더욱 많은 지원을 하고 싶다는 의지를 불러일으키는 중요한 계기”라고 설명한다.



일단 한 번이라도 직관해본 사람은 그 맛을 안다. 2025년 7월21일 서울 마포구 상암월드컵경기장 보조경기장에서 열린 서울시청 아마조네스와 인천현대제철 레드엔젤스WFC의 경기에서 만난 최예슬(23)씨는 “다른 스포츠에 비해 여자축구는 크게 흥미가 없었는데 (직접 보니) 되게 거친 느낌이 좋다”며 “오히려 여자축구가 더 공격적이고 몸싸움도 거칠게 하고 이런 것들이 재밌다”고 말했다.



나은씨는 이렇게 말했다. “축구가 전쟁 같은 느낌이 있거든요. 여자축구에서도 땀을 흘리면서 정말 거칠게 싸우고 경쟁하는 모습이 우리 사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여성성과는 굉장히 반대 되는 것이잖아요. 정말 이기고자 하는 원초적 욕망을 드러내고, 이기기 위해 태클도 하고 옷을 잡아당기고 하는 모든 신체적인 노력과 전략들이 매력적이고 아름답다고 느꼈어요.”



“어, 어, 골!” 8월2일 화천KSPO와 문경상무의 경기를 보면서 한창 이야기를 나누던 중에 나은씨가 갑자기 소리쳤다. 화천KSPO의 최유정 선수가 전반 17분 페널티박스 밖에서 수비 한 명을 제치고 찬 공이 골대 안으로 빨려 들어가면서 선제골이 터진 것이다. 득점 장면을 제대로 보지 못한 나은씨가 휴대전화로 유튜브 중계를 켰다. “보통 (여자축구) 경기장엔 전광판에 ‘다시보기’가 없으니까, 팬들도 계속 휴대전화를 들고 무슨 상황인지 다시 확인해요.”



경기장의 열악함은 WK리그 팬이라면 누구나 공감한다. 전광판에서 ‘다시보기’를 볼 수 없는 건 다른 불편함에 비하면 큰 단점도 아니다. 서울월드컵경기장 보조경기장에서 만난 WK리그 팬 이유한(25)씨는 “WK리그를 본 지 5년 정도 됐는데 일단 홍보가 너무 안 된다”며 “일본에 잠깐 살았을 때 위(WE)리그(일본 여자축구 프로리그)를 종종 봤는데 거기는 입장권도 돈을 내고 사야 하고, 비시즌엔 팬들이랑 이벤트도 한다. (한국은) 경기 진행부터 올드하다”고 말했다.



유한씨의 이야기처럼 일본은 꼭 공식 행사가 아니어도 모든 연습 일정을 누리집에서 공유하고, 연습에 찾아온 팬들이 선수들과 이야기 나눌 수 있는 공간도 구단에서 직접 마련한다. 그러나 한국 구단들은 팬들에게 다가가지 않는다. 앞서 언급한 체육학회지 연구에 참여한 팬들은 “경기 외적인 즐거움을 충분히 경험할 수 있는 K리그 관람 환경과 달리, WK리그는 경기장에 방문해 즐길 거리가 부족하고 대중교통으로 방문하기 어려워 대중에게 매력적으로 다가가기 힘들다”고 지적했다.



결국 선수들의 퇴근길을 기다리며 알아서 친해지거나 선수가 직접 팬들과 소통하는 것을 기대하는 수밖에 없다. 인천현대제철의 박예은 선수의 팬이라는 김정아씨는 “박 선수는 인스타그램 등을 통해 소통을 많이 한다. 선물을 주면 항상 감동해주고, 영국(브라이턴 앤 호브 앨비언)에 있을 때도 꾸준히 연락했다”며 “(반대로) 여자축구연맹은 팬들과의 소통이 너무 없다”고 말했다.



2025년 8월2일 저녁 7시 경남 창녕스포츠파크 4구장에서 열린 제24회 전국여자축구선수권대회 화천KSPO와 문경상무의 예선 2차전에서 김나은씨가 경기를 관람하고 있다. 창녕(경남)=김진수 선임기자 jsk@hani.co.kr

2025년 8월2일 저녁 7시 경남 창녕스포츠파크 4구장에서 열린 제24회 전국여자축구선수권대회 화천KSPO와 문경상무의 예선 2차전에서 김나은씨가 경기를 관람하고 있다. 창녕(경남)=김진수 선임기자 jsk@hani.co.kr


일부 팬은 단순히 여자축구를 적극 관람하는 것을 넘어 축구를 통해 본인의 삶이 변화하기도 한다. 직접 축구나 풋살 동호회를 찾아 가입하고 취미로서 즐기는 것이다. 세종스포츠토토의 팬인 문혜리씨는 WK리그를 보기 전까지는 운동을 해본 적이 없지만 팀을 좋아하게 되면서 풋살을 시작하고, 심지어 세종에서 팀원들과 풋살 대회도 직접 주최했다.





축구를 통해 느낀 ‘애정’이라는 동력



나은씨와 같은 자생적 ‘슈퍼팬’의 열정이 식기 전 WK리그가 얼른 응답해야 한다. 나은씨는 ‘STAND: 여자축구 WK리그 A to Z’를 창간했다. 문화기획자라는 특기를 살려 2024년 4월 홀로 기획·편집한 여자축구 문화전문지다. WK리그에 대한 정보부터 직접 고른 장면, 선수 인터뷰와 화보 등으로 220쪽을 꽉 채웠다. 축구는 그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내가 축구를 몰랐으면 어떻게 살았을까. 이 책을 만들 만큼 아주 뜨거운 뭔가를 느껴본 것이 처음이었어요. 연애도 시큰둥하게 하는 편이고 로맨스 영화도 잘 안 보거든요. 그런데 애정이란 것이 하나의 큰 동력으로 작동한다는 것을, 지금껏 살아오면서 처음 느껴본 것 같아요.”





창녕(경남)=류석우 기자 raintin@hani.co.kr·박수진 기자 jin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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