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중앙박물관 상설관 특별전 전시장에 나온 국내 최고의 데니 태극기.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
역시 태극기가 으뜸이다.
1880년대 등장한 이래 140여년 동안 한민족에게 희망과 의지의 푯대가 되었던 각양각색의 태극기가 광복 80돌을 맞아 서울을 비롯한 각 도시의 건물과 박물관에서 집중 조명되고 있다. 특히 올해는 단순한 국가 표상을 초월해 한국 근현대사에서 위인·민중과 함께한 태극기의 역사를 다각도로 살펴보는 전시들이 주로 열리고 있다.
서울 덕수궁 돈덕전의 항일유산 특별전에 나온 구한말 의병들의 항쟁 관련 기록문서들을 관객들이 살펴보고 있다. 국가유산청 제공 |
우선 주목되는 전시판이 서울 세종로 대한민국역사박물관 3층 전시실에서 8일부터 시작한 광복 80주년 특별전 ‘태극기, 함께해온 나날들’이다. 지난 120여년간 역사적 굽이마다 다기한 용도로 등장한 그 시절 태극기들이 두루 나왔다. 1900년 파리만국박람회에 내걸린 것으로 추정되는 프랑스국립기메동양박물관 소장 태극기는 4괘를 푸른색으로 칠한 것이 인상적이다. 당시 ‘대한제국관’에 전시했던 향로, 주한공사 플랑시가 기메박물관에 기증한 삼층탁자장과 함께 볼 수 있어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1910년 8월29일 국권상실을 하루 앞두고 대한제국군함 광제호의 함장 신순성(1878∼1944)이 배에서 내린 뒤 남몰래 보관한 광제호 태극기, 장롱과 장독대 밑에 숨긴 동덕여자의숙의 태극기, 무늬진 비단에 정성껏 수놓아 만들고 대형 불화 괘불을 담은 상자에 고이 보관해온 전남 장성군 백양사의 태극기, 대한민국임시정부 의정원에서 내걸었던 바느질 태극기 등이 관객과 만난다. 해방 뒤에는 한국전쟁 당시 병사들이 조국 수호를 다짐하며 서명한 태극기와 1980년 5·18 광주항쟁 당시 전남대 학생회장으로 활동하다 이후 옥중에서 단식투쟁 중 숨진 박관현(1953∼1982) 열사의 관을 덮은 태극기 등이 강렬한 감동을 안겨준다.
서울 덕수궁 돈덕전 특별전에 나온 진관사 태극기. 일장기 위에 태극과 4괘를 그려넣었다. 국가유산청 제공 |
세종로 건너편 덕수궁 권역의 정동 돈덕전 건물에서는 서울 은평구의 800년 고찰 진관사의 100여년 묵은 태극기가 단연 눈에 띈다. 2009년 칠성각 벽체를 뜯어 해체하다 극적으로 발견된 유물이다. 일제강점기의 일장기에 태극 무늬를 덧칠하고 4괘를 둘레에 그린 내력이 울림을 낳는다. 구멍 나고 귀퉁이 한쪽이 사라진 진관사 태극기는 빛이 바래고 문양이 거칠지만, 치열한 자주독립의 기운이 살아 나온다. 돈덕전에서 국가유산청 주관으로 마련된 ‘빛을 담은 항일유산’ 특별전의 핵심 작품으로, 18일까지 전시된다. 개항기부터 대한제국, 일제강점기, 광복까지 분투한 국권회복과 항일투쟁의 역사를 110여점의 유물로 소개한 전시다. 19세기 말 주미공사를 지낸 이범진(1852∼1911)의 외교 일기 ‘미사일록’과 지난해 일본에서 환수한 구한말 의병장들의 항전 기록문서 13건, 일본에서 환수된 안중근 의사의 보물 유묵 ‘녹죽’(綠竹·푸른 대나무)과 2022년 보물이 된 또 다른 유묵 ‘일통청화공’(日通淸話公)도 관객에게 처음 공개된다.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서 전시 중인 1900년 파리만국박람회 출품 추정 태극기.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제공 |
서울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의 상설전시관 1층 대한제국실의 광복 80주년 기념 전시 ‘광복 80주년, 다시 찾은 얼굴들’은 백범 김구 선생이 ‘백범일지’에서 말한 저 유명한 문구가 서두 패널에 붙어있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기 때문이다.” 문구를 읽은 뒤 안쪽 공간을 보면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19세기 데니 태극기 실물이 나타난다. 1886~1891년 고종이 외교 내무 고문을 맡았던 미국인 오웬 니커슨 데니(1838∼1900)에게 주었던 태극기다. 눈대목은 국사편찬위원회가 보존해온 ‘일제 주요 감시 대상 인물 카드’의 실물들이다. 유관순, 안창호 등 독립운동가들의 신상 정보, 수감 상황, 수배 이력을 체계적으로 파악하고 관리하기 위해 제작한 신상 정보 자료로, 체포 직후 촬영했거나 수집한 사진들과 설명 내용 등을 볼 수 있다.
1936년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우승 직후 손기정이 서명해 나눠준 엽서. 노형석 기자 |
인근 상설전시관 기증 1실에서는 마라톤 영웅 손기정(1912~2002)이 1936년 8월9일 11회 독일 베를린올림픽에서 우승한 뒤 그해 8월15일 직접 서명한 기념 엽서 실물이 처음 세상에 나온다. 특별전 ‘두 발로 세계를 제패하다’의 공간으로, 손기정 서명 엽서를 비롯한 미공개 유물들을 기존 유물들과 함께 출품해 내보인다. 손기정이 베를린올림픽 당시 특별 부상으로 받았다가 지난 1994년 기증한 고대 그리스 청동 투구(국가지정 보물)를 비롯해 금메달과 월계관, 우승 상장, 미국 뉴욕타임스 등의 신문기사 등 18건의 유물들을 처음 한자리에 모았다. ‘손긔졍’이라는 서명이 선명하게 나와있는 기념 엽서는 당시 뮌헨에 살던 독일인에게 준 것이다. 1979년 수장가 허진도씨가 독일 경매에 나온 것을 입수해 소장해왔다. 박물관은 1936년 일장기를 달고 뛰어야 했던 청년 손기정의 모습부터 1988년 서울올림픽 성화 봉송 주자로 나선 노년의 모습을 인공지능(AI) 영상으로 생생하게 재현했다. 12월28일까지.
독립지사 1명을 집중 조명하는 전시도 차려졌다.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낸 석주 선생을 기리는 ‘국무령 이상룡과 임청각―나라 위한 얼과 글’전이 5일 서울 종로구 서울역사박물관 기획전시실에서 개막했다. 오는 31일까지 열리는 전시에선 그의 문집 ‘석주유고’(石洲遺稿)에 수록된 시문 등을 먹으로 새로 쓴 서예 작품 59점과 발자취를 느낄 수 있는 문서 자료 등을 선보인다.
국립중앙박물관의 손기정 특별전에 나온 1936년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우승 기념 고대 그리스 투구와 상장, 메달. 뒤쪽 벽에 손기정의 서명이 확대된 모습으로 나왔다. 노형석 기자 |
경기도박물관은 광복 80주년을 기념하여 특별전 ‘여운형: 남북통일의 길’을 15일부터 10월26일까지 연다. 중도파로서 일제강점기와 해방 전후에 걸쳐 독립과 통일을 위해 헌신한 몽양 여운형(1886~1947)의 삶을 조명하면서 그가 역설한 연대와 공존의 정신을 살핀다. 3부로 구성된 전시에서는 여운형이 피격당할 당시 입었던 혈의(血衣), 데드마스크, 만장, 분즉도 합필입(分則倒 合必立) 유묵, 신한청년 창간호, 조선건국동맹 성명서 등 유물과 자료 100여점을 공개한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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