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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 어의로 자금 모으고, 도쿄서 항일투쟁… 독립운동 뛰어든 의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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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 어의로 자금 모으고, 도쿄서 항일투쟁… 독립운동 뛰어든 의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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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간상업발사체 '한빛-나노' 실패한듯…폭파 장면 포착
<8>국민 건강이 곧 독립의 힘
몽골에 병원 열고 매독 퇴치 기여한 이태준 선생
임시정부 군의관 활동도... 폭탄 의거 준비 중 순국
일본서 유학하며 독립 선언 참여한 현덕신 선생
광주 최초 여의사... 만주 동포 구호운동에도 참여


7월 24일 경남 함안군 군북면 명관리에서 대암이태준선생기념사업회 사무국장인 이창하씨가 몽골에서 독립운동을 한 이태준 선생의 생가가 있던 곳을 가리키며 설명하고 있다. 1970년대에 이 자리에 저수지가 조성되면서 생가는 수몰됐다. 함안=변태섭 기자

7월 24일 경남 함안군 군북면 명관리에서 대암이태준선생기념사업회 사무국장인 이창하씨가 몽골에서 독립운동을 한 이태준 선생의 생가가 있던 곳을 가리키며 설명하고 있다. 1970년대에 이 자리에 저수지가 조성되면서 생가는 수몰됐다. 함안=변태섭 기자


“묘를 찾으려고 현지 TV 광고도 해보고 노력했지만 수포에 그쳤어요. 생가도 수몰돼 후손으로서 참 안타깝죠.”

지난달 24일 경남 함안군 군북면 명관리에서 명관저수지를 가리키며 이창하(62)씨가 말했다. 이곳은 몽골 마지막 황제 보그드 칸의 어의이자, 몽골 일대에서 독립운동을 한 ‘몽골의 슈바이처’ 이태준 선생의 생가가 있던 곳이다. 그러나 1970년대 새마을운동 일환으로 저수지를 만들면서 수몰됐다. 대암이태준선생기념사업회 사무국장인 이씨는 이태준 선생과 7촌 관계다.

그는 “100년이 지난 지금도 선생의 당시 활동은 한국‧몽골 교류 확대에 큰 역할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몽골 울란바토르 전승기념공원엔 이태준 기념관이 있는데, 리모델링을 마치고 9월 개관식을 앞두고 있다. 김동균 대암이태준선생기념사업회 이사장은 “우국선열 중 외국에 본인 이름의 기념관을 두고 있는 분은 드물다”고 말했다.

임시정부의 군의관, 독립운동 자금 감무


1883년 함안군에서 태어난 이태준 선생은 세브란스의학교 2회 졸업생으로, 의사로 근무하던 중 도산 안창호 선생을 만나 독립운동에 눈을 떴다. 애국계몽단체 신민회의 자매단체인 청년학우회에서 활동하다, 일제가 반일 인사 제거를 위해 벌인 ‘105인 사건’으로 체포 위기에 놓이자 중국을 거쳐 몽골로 떠났다. 김 이사장은 “1914년 몽골 고륜(현재 울란바토르)에 ‘동의의국’이란 병원을 열고 독립운동을 했다”고 말했다.

1917년 세브란스의학교 2회 졸업식 당시 학사모를 쓴 이태준 선생. 대암이태준선생기념사업회 제공

1917년 세브란스의학교 2회 졸업식 당시 학사모를 쓴 이태준 선생. 대암이태준선생기념사업회 제공


이태준 선생은 김규식 선생이 한국의 독립 필요성을 알리기 위해 파리강화회의로 향할 때 자금 2,000원(현재 6,000만 원 상당)을 지원했고, 임시정부의 군의관이자, 독립운동 자금을 모으는 감무로 활동했다. 소비에트 정부가 임시정부에 지원하기로 한 200만 루블 중 1차로 지급한 40만 루블 가운데 8만 루블을 몽골을 거쳐 무사히 전달하는 데 성공하기도 했다.

김 이사장은 “이태준 선생은 당시 몽골에서 만연한 매독을 퇴치하는 데 공을 세워 몽골 마지막 황제의 어의로 활동했다”며 “어의 신분이 독립운동에도 큰 도움이 됐을 것”이라고 했다. 반병률 한국외대 사학과 명예교수는 “독립운동을 단순한 항일 투쟁에 그치지 않고, 국적과 인종을 넘어선 보편적 인류애의 실천으로 확장시킨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몽골의 매독 퇴치에 기여한 공로로 몽골 황제로부터 이태준 선생이 받은 에르데니-인 오치르 훈장. 대암이태준선생기념사업회 제공

몽골의 매독 퇴치에 기여한 공로로 몽골 황제로부터 이태준 선생이 받은 에르데니-인 오치르 훈장. 대암이태준선생기념사업회 제공


무장투쟁의 핵심인 의열단에도 가입한 그는 의열단장인 김원봉에게 폭탄 제조 기술자를 소개해주겠다고 약속한 후 소비에트 정부의 지원금(4만 루블)을 추가로 운송하는 과정에서 38세의 나이로 순국했다. 김 이사장은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소비에트 정부의 포로가 된 헝가리인으로, 폭탄 제조 기술자이자 이태준 선생의 운전사였던 마쟈르의 도움으로 의열단은 각종 폭탄을 성공적으로 제작할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김상옥 의사가 종로경찰서에, 나석주 의사가 동양척식주식회사 경성지사와 조선식산은행에 폭탄을 투척한 의거의 밑바탕이 된 셈이다.

일본 경무국 1급 시찰 대상, 근우회 임원


이태준 선생이 몽골에서 활동하던 1919년, 일본 도쿄에선 2월 8일 한국인 유학생들이 모여 조선 독립을 선언했다. 3‧1운동의 도화선이 된 2‧8독립선언 현장엔 동경여자의학전문학교 재학생인 현덕신 선생도 있었다. 3‧1운동 1주년을 기념해 1920년 3월 1일 도쿄에서 벌어진 재동경조선학생독립만세 운동으로 체포된 후 일본 경무국 1급 주요시찰 인물로 지목됐으나,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독립운동을 이어갔다.

1921년 일본 동경여자의학전문학교 졸업 기념사진. 앞줄 왼쪽에서 두 번째가 현덕신 선생이다. 이화여대 제공

1921년 일본 동경여자의학전문학교 졸업 기념사진. 앞줄 왼쪽에서 두 번째가 현덕신 선생이다. 이화여대 제공


1921년 11월 동경여자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한 세 번째 한국인 여성 의사가 된 현덕신 선생은 귀국 후 조선총독부의원의 유일한 여의사로 일하다가, 동대문부인병원에서 여성‧아동 진료를 시작했다. 간호원양성학교에선 간호학과 생리위생학을, 태화여자관에선 영어를 가르치며 의료 발전에도 힘을 보탰다.


‘현덕신 평전’을 쓴 이동순 조선대 자유전공학부 교수는 “귀국 후 여성독립운동단체 근우회 임원으로 활동하면서 진료 시간 확보를 위해 당시만 해도 여성의 상징과 같았던 긴 머리채를 잘라 단발을 한 인물이자, 몇 안 되는 조선의 여성 의사로서 사회적 책무를 짊어진 여걸”이라고 평했다.

광주 최초의 여의사인 현덕신 선생이 현덕신병원에서 진료를 보고 있다. 이화여대 제공

광주 최초의 여의사인 현덕신 선생이 현덕신병원에서 진료를 보고 있다. 이화여대 제공


현덕신 선생의 외손자로 조선대 미대 학장을 지낸 최영훈 작가는 “광주 최초 여의사로서 병원을 열어 인술을 펼치는 한편, 근우회 광주지회 설립, 만주사변 이후 만주 조난동포구제 광주협회 결성 등 독립운동과 구호운동에도 적극 참여했다”고 말했다. 현덕신 선생은 2020년 건국포장에, 이태준 선생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됐다.

함안= 변태섭 기자 libertas@hankook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