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뼛속까지 교육자였던 강우규, 자신의 죽음조차 '교육'을 위해 감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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뼛속까지 교육자였던 강우규, 자신의 죽음조차 '교육'을 위해 감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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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80년, K도약 리포트]
조선 총독에 폭탄 던진 65세 강우규
의술로 돈 모아 여러 학교 세운 교육자
'국권회복' 넘어 '동양평화'까지 꿈꿔
의거는 조선 청년들 향한 최후의 '교육'


서대문형무소 수감 당시 강우규 의사의 모습. 한국일보 자료사진

서대문형무소 수감 당시 강우규 의사의 모습. 한국일보 자료사진


'조선 총독에게 폭탄을 던진 65세의 대한노인단 단원' '1920년대 본격화된 의열투쟁의 계기'···.

독립운동가 강우규 의사에 대해 학교에서 배우는 역사 상식은 이렇다. 그가 일제 기관을 파괴하고 요인을 처단한 의열투쟁가 중 최고령자이며, 그의 의거가 3·1운동 이후 단독으로 감행한 최초의 사건이라는 점에 주목했다.

그러나 독립운동가로서 행적과 뗄 수 없는 것이 바로 '교육자 강우규'다. 강 의사는 한반도에서 태어나 만주와 러시아 일대를 유랑하는 동안, 정착한 곳마다 학교를 세우고 학생들을 가르쳤다. 일제의 총독을 처단하는 행동과 자신의 죽음 자체를 식민지 조선 청년을 향한 메시지로 여겼다. 광복 80주년인 올해는 강 의사 탄생 170주년이기도 하다.

함경도→만주→연해주···사재 털어 학교 세워



박환 수원대 사학과 명예교수가 지난 6일 서울역 광장에 있는 강우규 의사 동상을 바라보고 있다. 하상윤 기자

박환 수원대 사학과 명예교수가 지난 6일 서울역 광장에 있는 강우규 의사 동상을 바라보고 있다. 하상윤 기자


강 의사 평전을 쓴 박환 수원대 사학과 명예교수는 한국일보와 인터뷰에서 "강우규의 본질은 교육"이라고 말했다. 그의 평가처럼, 강 의사의 독립운동 행보는 의거 이전까지 학교 설립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1855년 평안남도 덕천군에서 태어난 그는 30대에 접어든 1885년에 함경남도 홍원군으로 이주했는데, 이곳에 영명학교를 세웠다. 강 의사는 1910년 국권 상실 이듬해부터 두만강을 건너 북만주 두도구(현 지린성 허룽시 소재), 연해주 하바롭스크 등지를 떠돌다 1917년 북만주 요하현(현 헤이룽장성 라오허현)에 이주해 한인 마을인 신흥촌을 개척했는데, 이곳에 광동학교를 세웠다. 이 밖에도 그가 세운 학교는 러시아 이만(현 달네레첸스크)의 협성학교, 밋가루시카학교(하바롭스크 소재로 추정)가 있다.

학교는 한의술을 펼치며 약방을 운영해 쌓은 재산을 써서 설립했다. 강 의사의 아들 강중건씨는 1920년 5월 4일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일 년에도 수천 원을 버시지만은 그 돈을 한 푼도 내게 주시지 않고 전부 학교에 기부하시면서 '너는 너대로 살아라, 나는 나 할 일이 있으니까' 하셨다"고 밝혔다.


한인 정착촌을 번듯하게 꾸린 후, 환갑이 넘은 나이에도 학교 운영비를 감당하기 위해 만주와 연해주 곳곳을 유랑하며 의료업으로 돈을 벌었다. 강 의사의 손녀 강영재씨는 1969년 '신동아'에 기고한 글에서 "독립단체와 연락을 취하고 새로 세운 학교 운영비를 마련하기 위해 행상의료업에 나섰다"고 회고했다.

'국권회복' 넘어 '평화'까지 가르친 교육



1920년 3·1 운동 1주년을 맞아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에 거주하던 한인들이 만세운동 1주년 기념 행진을 하고 있다. 박환 교수 제공

1920년 3·1 운동 1주년을 맞아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에 거주하던 한인들이 만세운동 1주년 기념 행진을 하고 있다. 박환 교수 제공


강 의사는 청년들을 신식 교육으로 계몽하고 민족 의식을 고취시켜 잃어버린 국가를 다시 세우는 일을 꿈꿨다. 그는 1920년 2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열린 첫 공판에서 '자제들을 가르칠 때 어떤 사상을 담아주었나'는 재판장의 물음에 "물어볼 것도 없이 '너희들은 아무쪼록 열심히 공부하여 어서 잃어버린 국권을 회복하는 큰 일꾼이 되라'고 항상 가르쳤다"고 답했다.

강 의사가 세운 학교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교육이 이뤄졌는지를 전하는 기록은 없으나, 박 교수는 "당시 설립된 민족학교들과 유사한 커리큘럼을 따랐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주시경의 '국어문법'으로 국어를 가르치고, 구한말 보급된 교과서인 '대한지지'로 지리를 가르치고, 그가 독실한 기독교인이었으니 성경 강독이나 창가 등의 수업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강우규 의사 평전을 집필한 박환 수원대 명예교수가 지난 6일 서울역 광장 내 강 의사 동상을 찾아, 강 의사가 사형 집행 직전에 남긴 시를 살펴보고 있다. 하상윤 기자

강우규 의사 평전을 집필한 박환 수원대 명예교수가 지난 6일 서울역 광장 내 강 의사 동상을 찾아, 강 의사가 사형 집행 직전에 남긴 시를 살펴보고 있다. 하상윤 기자


강 의사가 궁극적으로 꿈꾼 건 국권 회복을 넘어선 '평화'였고, 교육에도 이런 이념이 반영됐을 것으로 보인다. 그는 사형 선고에 불복해 제출한 상고취지서의 마지막 부분을 '동양평화론'에 할애하며 "본인은 자국과 동포를 위해 신명(몸과 목숨)을 희생하여, 영혼으로 하여금 국권 회복과 자유 독립, 동양 평화를 위하여 노력하고자 한다"고 했다. 박 교수는 "당시 직면한 과제였던 독립에서 멈춘 게 아니라, 인류의 보편적 가치인 평화를 주장한 것"이라며 "그가 제2의 안중근이라고 불리는 이유다. 그가 바란 교육의 지향점도 여기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의거는 조선청년 향한 최후의 교육


강 의사는 3·1운동 이후 조선의 독립이 이뤄지지 않고, 새로운 조선 총독이 부임한다는 소식을 전해듣자 의거를 결심했다. 1919년 9월 2일 서울역에서 갓 부임한 사이토 마코토 총독을 향해 폭탄을 던졌으나, 그의 목숨까지 뺐지는 못했다.

이후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지만, 그는 의거가 실패했다고 한스러워하지 않았다. 사형 선고에 대한 상고가 기각된 1920년 5월 27일 면회 온 아들에게 "내 가슴에 한이 되는 것은 조선 청년들의 교육이다. 눈을 감고 있으면 쾌활하고 용감히 살려고 하는 조선 청년들이 보고 싶다. 아, 보고 싶다. 일러 주고 싶다"고 했다.


박환 수원대 명예교수가 지난 6일 서울 중구 한국일보 본사에서 교육자로서의 강우규에 관해 말하고 있다. 하상윤 기자

박환 수원대 명예교수가 지난 6일 서울 중구 한국일보 본사에서 교육자로서의 강우규에 관해 말하고 있다. 하상윤 기자


강 의사는 본인의 의거와 죽음 자체가 조선의 청년에게 교육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는 아들에게 전한 유언에서 "내가 살아서 돌아다니면서 가르치는 것보다 내가 죽는 것이 조선 청년의 가슴에 적으나마 무슨 이상한 느낌을 줄 것 같으면 그 느낌이 무엇보다도 귀중한 것"이라고 했다.

아울러, 만주와 연해주로 행상 의료를 다닐 때 데리고 다니며 직접 한문을 가르쳤던 손녀 강영재씨를 언급하며 "막내 아이 영재는 재주가 있으니 끝까지 공부를 시켜야 한다"고 당부했다. 여성 교육에도 차별이 없었던 것. 강영재씨는 할아버지의 뜻을 이어 교사로 일하며 교육계에 몸담았다.

강우규 순국 52주기인 1972년 11월 29일 서울 신문회관에서 열린 추모식에 손녀 강영재(오른쪽)씨가 앉아 있다. 강씨는 조부의 유언대로 이화여고를 졸업한 후 교사로 일했다. 강씨는 1985년 사망했다. 정부기록사진집

강우규 순국 52주기인 1972년 11월 29일 서울 신문회관에서 열린 추모식에 손녀 강영재(오른쪽)씨가 앉아 있다. 강씨는 조부의 유언대로 이화여고를 졸업한 후 교사로 일했다. 강씨는 1985년 사망했다. 정부기록사진집


홍인택 기자 heute128@hankook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