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세 유럽은 이국 취향에 차례로 이끌렸다. 먼저 튀르키예풍을 모방한 ‘튀르케리’(Turquerie)가 유행했다. 밝은 색채의 그림, 화려한 장식의 건축에 매료됐다. 음악에선 율동적인 행진곡풍 선율이 인기였다. 그 유명한 모차르트 ‘터키 행진곡’도 유럽을 휩쓴 이 물결의 여파로 탄생했다.
유럽인의 시선은 더욱 먼 곳을 향했다. 중국의 푸른 백자와 정교한 문양을 앞다퉈 사들였다. 왕과 귀족이 청화백자와 옻칠 가구로 궁궐과 성채를 채웠다. 정원도 중국식을 모방했다. 값비싼 중국 물품이 부를 과시하는 수단이었다. 중국 열풍 ‘시누아즈리’(Chinoiserie)가 유럽을 강타한 시절이었다.
19세기 후반엔 일본의 전통 판화 우키요에가 유럽 예술가들의 시선을 강탈했다. 평면적 구성, 대담한 색채, 일상적 소재가 화가들의 영감을 자극했다. 반 고흐, 클로드 모네가 기모노 입은 일본 여성을 그렸다. 1872년 ‘자포니즘’(Japonism)이란 용어가 처음 사용됐다. 일본풍이 널리 퍼졌고, 공연예술 쪽도 무풍지대가 아니었다. 푸치니 오페라 ‘나비부인’이 초연된 1904년은 유럽 자포니즘이 정점을 이룬 시기였다.
21세기 들어 한국풍이 눈부시게 약진하며 판을 뒤집고 있다. 최근 글로벌 흥행 돌풍을 일으킨 넷플릭스 애니메이션 ‘케이팝 데몬 헌터스’(케데헌)는 한류가 새로운 단계에 접어들었음을 보여준다. ‘케데헌’ 삽입곡 ‘골든’은 미국 빌보드 메인 싱글 차트 정상 등극을 노린다. 작품을 연출한 한국계 캐나다인 매기 강 감독은 ‘코리아니즘’이란 표현을 썼다. ‘한국의 전통과 정서를 창작의 중심에 두고 이를 글로벌 대중문화의 언어로 풀어내는 세계관’쯤 될 것이다.
코리아니즘은 음악과 드라마, 영화 등 콘텐츠에 한정된 개념이 아니다. ‘케이뷰티’ ‘케이푸드’가 세계인의 일상 깊숙이 자리 잡았다. ‘비비고 만두’는 지난해 미국 냉동 만두 시장에서 41% 점유율을 기록했다. 먹고, 놀고, 입고, 사는 것을 ‘최대한 한국식으로’ 설계하는 창작 전략을 써야 먹히는 시대,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시대가 도래했다. 지금은 디지털 플랫폼에서 지구인이 직접 소통하는 시대다. ‘코리아니즘’은 서구에서 아직 낯선 용어지만, 머지않아 보편적 개념으로 자리 잡을 날이 올 것이다. 튀르케리와 시누아즈리, 자포니즘에 이어 ‘코리아니즘의 21세기’로 기록될 수도 있지 않을까.
임석규 문화팀 기자 sk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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