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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몸으로 느끼는 181평의 화폭 '계속 걸어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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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몸으로 느끼는 181평의 화폭 '계속 걸어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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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31일 아모레퍼시픽 미술관에서 열린 마크 브래드포드의 개인전 설명회 현장. 캔버스천, 종이, 실 등을 이어 만든 수백개의 각양각색 띠들로 들머리 전시 공간 바닥을 덮은 회화 설치물 ‘떠오르다’(Float, 2019) 위에서 작가가 취재진을 이끌며 작품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노형석 기자

지난달 31일 아모레퍼시픽 미술관에서 열린 마크 브래드포드의 개인전 설명회 현장. 캔버스천, 종이, 실 등을 이어 만든 수백개의 각양각색 띠들로 들머리 전시 공간 바닥을 덮은 회화 설치물 ‘떠오르다’(Float, 2019) 위에서 작가가 취재진을 이끌며 작품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노형석 기자


꽈당! 그림 위를 걷다가 뒤로 자빠졌다.



드넓은 화폭 속에서 앞으로 걷다 뒤로 걷다를 되풀이하다가 튀어나온 이미지에 발부리가 걸렸다. 벌렁 넘어진 채 화폭 양옆을 둘러본다. 캔버스천, 종이, 실 등을 이어 만든 수백개의 각양각색 띠들이 툭툭 솟아올라 전시장 한 방 바닥을 가득 덮은 거대 회화의 표면이 보인다. 회화의 넓이는 600㎡(181평)나 된다. 툭툭 털고 일어선다. 넘어진 충격을 몸으로 느끼면서 그림은 마냥 눈으로만 보는 것이 아님을, 걸어가면서 몸으로 빨아들이는 것일 수도 있음을 깨닫는다.



여러 걸음 사방팔방으로 마구 방황하면서 보는 초대형 회화가 서울 도심에 나타났다. 용산구 아모레퍼시픽 미술관 1전시실을 채운 설치 회화 ‘떠오르다’(Float, 2019)다. 지난 1일부터 미국 현대미술판을 대표하는 흑인 작가 마크 브래드포드(64)의 첫 한국 개인전 ‘킵 워킹’(Keep Walking)이 열리고 있는 장소의 들머리 공간이다.



‘계속 걸어봐’로 해석되는 전시 제목이 시사하듯 전시회는 오롯한 발걸음을 거듭하면서 눈과 귀로 미국 흑인들의 사회적 현실을 정교하고 세련된 추상화면과 랩, 솔 음악으로 마주하게 한다. 브래드포드는 로스앤젤레스(LA) 남부 흑인 서민촌 출신자다. 어머니가 하는 미용실에서 흑인 공동체의 삶을 지켜보면서 자랐다. 30대 초반 캘리포니아 예술대에서 수학하고 포스터, 전단지 등을 겹겹이 쌓고 긁고 찢어내며 만든 대형 추상회화를 통해 사회 비판적 메시지를 표현하는 독특한 기법과 발상으로 일찍부터 주목받았다. 2017년 베네치아비엔날레 미국관 대표 작가 등으로 여러 국제미술전과 아트페어 등에서 두각을 드러내면서 미국을 대표하는 동시대 최고의 현대미술 대가로 꼽히고 있다.



두번째 전시실 바닥에서 만나게 되는 조형물 ‘데스 드롭’(Death Drop, 2023). 패딩 재킷을 입은 인물이 두 팔을 한껏 벌리고 오른 다리를 꺾은 채 바닥에 누운 모습을 형상화한 이 작품은 어린 시절 작가 자신이 넘어진 순간을 포착한 영상을 바탕으로 뉴욕 퀴어클럽의 데스 드롭이란 춤 동작을 결합시킨 도상이라고 한다. 죽음과 자유, 몸의 역동성과 유약함, 환희와 공포 등의 엇갈리는 감정과 상상을 떠올리게 한다. 조형물 뒤쪽 정면과 옆으로는 미용실에서 쓰는 파마 조발용 격자 종이 ‘엔드 페이퍼’를 줄지어 붙인 특유의 추상회화 연작들이 내걸려 있다. 노형석 기자

두번째 전시실 바닥에서 만나게 되는 조형물 ‘데스 드롭’(Death Drop, 2023). 패딩 재킷을 입은 인물이 두 팔을 한껏 벌리고 오른 다리를 꺾은 채 바닥에 누운 모습을 형상화한 이 작품은 어린 시절 작가 자신이 넘어진 순간을 포착한 영상을 바탕으로 뉴욕 퀴어클럽의 데스 드롭이란 춤 동작을 결합시킨 도상이라고 한다. 죽음과 자유, 몸의 역동성과 유약함, 환희와 공포 등의 엇갈리는 감정과 상상을 떠올리게 한다. 조형물 뒤쪽 정면과 옆으로는 미용실에서 쓰는 파마 조발용 격자 종이 ‘엔드 페이퍼’를 줄지어 붙인 특유의 추상회화 연작들이 내걸려 있다. 노형석 기자


전시 개막을 앞두고 지난달 31일 열린 설명회에서 그와 나눈 대화와 감상의 시간은 흥미진진했다. 20여년간 그린 주요 회화 작품과 영상 설치 작업, 미술관 공간에 맞춰 제작한 신작까지 약 40점이 배치된 7개 전시장 곳곳을 브래드포드는 종횡무진했다. ‘사회적 기억’의 대상이라고 명명한 전단지, 포스터, 신문, 잡동사니들을 캘리포니아의 일상 공간에서 긁어모아 화폭에 붙이거나 쌓는 작업 개념과 이를 설명하는 언어는 명징하고 거침이 없었다. 190㎝ 넘는 큰 키의 그가 회화 이미지로 뒤발한 전시장의 바닥을 성큼성큼 앞서서 걸어가며 취재진을 이끄는 집단 퍼포먼스 같은 풍경이 펼쳐졌다. 취재진은 바닥에 깔리거나 천장과 네면 벽을 음악, 소리와 함께 수놓은 정교한 짜깁기 회화와 설치 이미지들 속에서 진지한 산책객이 되었다.



그 첫 무대가 들머리 전시 공간 바닥을 덮은 회화 설치물 ‘떠오르다’였고, 두번째 전시실의 조형물 ‘데스 드롭’(Death Drop, 2023)이 뒤를 이었다. 패딩 재킷을 입은 인물이 두 팔을 한껏 벌리고 오른 다리를 꺾은 채 바닥에 누운 모습을 형상화한 이 작품은 어린 시절 작가 자신이 넘어진 순간을 포착한 영상을 바탕으로 뉴욕 퀴어클럽의 데스 드롭이란 춤 동작을 결합시킨 도상이다. 모든 것을 놓아버린 자유로운 육체의 기백이 느껴지면서도 죽음, 몸의 역동성과 유약함, 환희와 공포 등 엇갈리는 감정과 상상이 떠올랐다.



브래드포드의 초창기 대표작 중 하나인 ‘파랑’(Blue, 2005)의 일부분. 유년 시절 미용실에서 흔히 봤던 파마 조발용 반투명 격자 종이 ‘엔드 페이퍼’의 가장 자리를 태워 검게 그을린 테두리 윤곽선이 나타나게 하고 화폭 위에 줄지어 붙인 ‘엔드 페이퍼’ 연작의 일부다. 노형석 기자

브래드포드의 초창기 대표작 중 하나인 ‘파랑’(Blue, 2005)의 일부분. 유년 시절 미용실에서 흔히 봤던 파마 조발용 반투명 격자 종이 ‘엔드 페이퍼’의 가장 자리를 태워 검게 그을린 테두리 윤곽선이 나타나게 하고 화폭 위에 줄지어 붙인 ‘엔드 페이퍼’ 연작의 일부다. 노형석 기자


조형물 뒤쪽과 옆으로는 미용실에서 쓰는 파마 조발용 격자 종이 ‘엔드 페이퍼’를 겹쳐 붙인 특유의 추상회화 연작들이 내걸려 있었다. 연작들 중 초창기 대표작인 ‘파랑’(Blue, 2005)이 단연 돋보인다. 유년 시절 미용실에서 흔히 봤다는 엔드 페이퍼의 가장자리를 태워 검게 그을린 테두리 윤곽선이 나타나게 하고 화폭 위에 줄지어 붙인 연작의 일부다. 엔드 페이퍼를 줄줄이 부착한 추상적 화면 위에 파란색 스텐실로 엘에이 시내 지도 형태를 표현하고 신문지 조각들도 덧붙여 도시 구조와 역사에 대한 서사를 담은 작품으로 만들었다.



전시장 안쪽 한가운데 여러개의 지구 모양 구체를 매단 설치 작품 ‘잿더미의 왕이 되기 위해서라도 나라가 타오르는 것을 볼 것이다’(2019). 종이로 만든 구체들에는 불타고 그을린 대륙과 바다가 나타나는데 각기 크기와 질감이 달라 파편화하고 불균형이 심화한 오늘날 지구 세계의 모습을 암시한다. 사람들이 같은 행성에 살지만, 결코 같은 세계를 공유하고 있지 않다는 진실을 드러낸 작품이다. 노형석 기자

전시장 안쪽 한가운데 여러개의 지구 모양 구체를 매단 설치 작품 ‘잿더미의 왕이 되기 위해서라도 나라가 타오르는 것을 볼 것이다’(2019). 종이로 만든 구체들에는 불타고 그을린 대륙과 바다가 나타나는데 각기 크기와 질감이 달라 파편화하고 불균형이 심화한 오늘날 지구 세계의 모습을 암시한다. 사람들이 같은 행성에 살지만, 결코 같은 세계를 공유하고 있지 않다는 진실을 드러낸 작품이다. 노형석 기자


깊숙한 안쪽 전시장 내벽에 붙은 설치 회화 ‘명백한 운명’(2023)은 해진 벽면을 연상시키는 캔버스 세 폭을 위아래로 맞붙여 ‘조니가 집을 삽니다’(JOHNNY BUYS HOUSES)란 전단지 문구를 재현해 보여준다. ‘즉시 현금을 준다’는 구호를 내세워 빈민들로부터 집을 헐값에 사들이는 투기자본 업체의 실상을 짚은 작품이다. 옆쪽의 넓은 중간부 전시장에서는 여러개의 지구 모양 구체를 매단 설치 작품 ‘잿더미의 왕이 되기 위해서라도 나라가 타오르는 것을 볼 것이다’(2019)가 나타났다. 종이 구체들에는 불타고 그을린 대륙과 바다가 나타나는데, 각기 크기와 질감이 달라 파편화하고 불균형이 심화한 지금 세계의 모습을 암시한다. 사람들이 같은 행성에 살지만, 결코 같은 세계를 공유하고 있지 않다는 진실을 드러낸다고 작가는 설명했다.



가장 깊숙한 안쪽 전시장 내벽에 붙은 설치 회화 ‘명백한 운명’(2023). 해진 벽면을 연상시키는 캔버스 세 폭을 위아래로 맞붙여 ‘조니가 집을 삽니다’(JOHNNY BUYS HOUSES)란 전단지 문구를 재현해 보여준다. ‘즉시 현금을 준다’는 구호를 내세워 빈민들로부터 집을 헐값에 사들이는 투기자본 업체의 실상을 짚은 작품이다. 노형석 기자

가장 깊숙한 안쪽 전시장 내벽에 붙은 설치 회화 ‘명백한 운명’(2023). 해진 벽면을 연상시키는 캔버스 세 폭을 위아래로 맞붙여 ‘조니가 집을 삽니다’(JOHNNY BUYS HOUSES)란 전단지 문구를 재현해 보여준다. ‘즉시 현금을 준다’는 구호를 내세워 빈민들로부터 집을 헐값에 사들이는 투기자본 업체의 실상을 짚은 작품이다. 노형석 기자


그 둘레에는 과거 역사에 붙었던 ‘기차 시간표’들을 흘러내리는 듯한 추상화면 이미지로 변환시킨 대작들이 붙었다. 특히 올해 신작 ‘공기가 다 닳아 있었다’는 지난 세기 초 미국에서 백인들의 차별을 피해 거처를 옮겨간 흑인 600만명의 ‘대이주’를 역사적 모티브로 삼았다. 열차의 출발 시각과 행선지 지명을 담은 시간표를 모호한 추상적 화면으로 변형시켜 삶의 유동성과 불안을 시각적 이미지로 보여주었다.



마지막 공간은 잡동사니 널린 우범가 같은 콘크리트 거리를 흑인 소년이 걸어가는 뒷모습을 반복해 틀어주는 동영상이 나온다. ‘나이아가라’(2005)란 제목의 2017년 베네치아비엔날레 출품작으로, 마릴린 먼로가 출연한 1953년 작 동명 영화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낭만적인 영화 속 풍경과 달리 엘에이의 흑인촌은 여전히 긴장과 빈곤의 굴레를 풀지 못하고 있다는 현실이 은연 중 배어나온다.



작가의 ‘기차 시간표’ 연작 중 일부인 올해 신작 ‘공기가 다 닳아 있었다’(The Air Was Worn Out)의 부분. 지난 세기 초 미국에서 백인들의 차별을 피해 거처를 옮겨간 흑인 600만명의 ‘대이주’를 역사적 모티브로 삼은 이 작품은 열차의 출발 시각과 행선지 지명을 담은 시간표를 모호한 추상적 화면으로 변형시켜 삶의 유동성에 따른 내면의 불안을 시각화시켰다. 노형석 기자

작가의 ‘기차 시간표’ 연작 중 일부인 올해 신작 ‘공기가 다 닳아 있었다’(The Air Was Worn Out)의 부분. 지난 세기 초 미국에서 백인들의 차별을 피해 거처를 옮겨간 흑인 600만명의 ‘대이주’를 역사적 모티브로 삼은 이 작품은 열차의 출발 시각과 행선지 지명을 담은 시간표를 모호한 추상적 화면으로 변형시켜 삶의 유동성에 따른 내면의 불안을 시각화시켰다. 노형석 기자


7개 전시실의 작품들 사이를 오가면서 느낀 작품들의 특장은 놀라울 정도로 형식과 내용의 적실한 조화가 일관되게 이뤄지고 있다는 점을 들 수 있겠다.



작가는 자신의 성장 경험과, 경험의 주체인 몸의 상태, 미술사적 성찰 등을 시간 속에 섞고 융합시키면서 추상의 세계 속에서 각기 차별적 위상을 지닌 자신의 분신으로 만들어놓았다. 일상적 소재들을 찢고 뜯고 쌓는 형식을 구사하면서 1950년대 잭슨 폴록의 추상표현주의는 물론이고 미니멀아트, 초현실주의, 신표현주의 같은 현대 사조 요소들까지 흡수하면서 자연스럽고 강인한 짜깁기 화폭을 만들어냈다. 현실 비판과 혁신을 꿈꾸는 청년 예술가들에게 리얼리스트의 눈과 추상의 손길로 사회적 기억을 화폭에 기록하는 그의 자세와 관점은 전범이 될 수 있을 듯하다. 내년 1월25일까지.



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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